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20)화 (120/152)

오묘한 보랏빛 머리칼.

반짝이는 청록빛 눈동자.

오로라 멜칸은 늘씬한 몸매와 더불어 제 아름다운 외모에 자신이 넘쳤다.

“아아, 나는 정말 죄 많은 여자야. 이런 얼굴을 하고 다니니 모든 남자들이 나한테 홀딱 빠지잖아.”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마다 자화자찬하는 건 일과였다.

심지어 아버지인 조제프는 딸이 다 자란 이후에도 ‘공주님’이라고 불렀으니 작위와 무관하게 자신이 공주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만일 누가 제 외모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다면 시샘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모두가 아라벨 황녀님이라고 대답한다지. 하지만 그건 내가 휴양지에서 지내는 탓에 다들 내 얼굴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야.’

자신이 제도에서 데뷔만 한다면 룬멜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오로라 멜칸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대답할 게 분명했다.

오로라는 소문으로만 듣던 아라벨이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 외모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러니 1황자가 신붓감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어? 내 자리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 외에 달리 황자비가 될 인물이 있겠는가?

차기 황제로 유력하게 지명되는 1황자조차 제 외모를 보면 홀딱 빠지고 말 테다.

그런 생각으로 오로라는 자신만만하게 제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르셀에게 눈도장을 찍을 생각으로 오늘 연회에 참석했다.

비록 제 외모를 가릴 가면을 쓰긴 했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가면을 써도 나는 예쁘니까.’

남자들이 아라벨을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닐 때, 오로라는 마르셀을 찾느라 분주했다.

겨우 마르셀을 발견하고 그와 대화하기 위해 뒤를 밟았는데…….

‘황자님께서 로웨인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니!’

마르셀과 로웨인 부인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로웨인 부인이 떠나고, 뒷걸음질 치다가 기척을 낸 듯한데 다행히 잡히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채로 달리던 오로라는 빨리 아버지인 조제프에게 이 얘기를 할 생각으로 입이 근질거렸다.

그러던 그때였다.

“히익!”

덩치 큰 남자와 부딪쳤다.

순간 마르셀인 줄 알고 기겁하던 오로라는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곧바로 내쳐졌지만.

“방금 저분께서 날 잡아줬지.”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오로라가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곧바로 자신을 밀쳐낸 건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 듯했다.

역시 나는 죄 많은 여자라니까.

오로라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어디 갔지?’

카라얀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장소로 돌아온 루미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연회장에는 이전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카라얀을 찾기란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연회장이 워낙 넓은 터라 사람 하나 찾는 일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가면이라도 쓰지 않았다면 금방 찾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카라얀 님은 키가 크니까 비교적 알아보기 쉬운 편이긴 하지.’

그 덩치와 키에 흑발인 남성.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연회장 내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카라얀 님이 나를 찾으려고 다른 곳으로 간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혹 길이 엇갈릴까 봐 연회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

두리번거리던 루미나의 시선을 끄는 장신의 남성이 한 명 있었다.

금발이었다.

카라얀과 복장이 아예 달랐고, 뒷모습만 보이는 터라 눈 색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자가 카라얀이라는 기이한 확신이 들어, 루미나는 홀린 듯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쫄래쫄래-.

어찌나 보폭이 큰지 그를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맨발인 덕에 성큼성큼 걸어가기가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겨우 그의 등 뒤에 선 루미나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카라얀 님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면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일순 정신이 든 루미나가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상대가 카라얀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루미나는 ‘아니면 어쩔 건데?’라고 묻고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그녀는 이미 상대의 옷자락을 당긴 이후였다.

잡아끄는 느낌에 남자가 뒤돌아봤다.

남자는 저보다 작은 은발 여성의 머리통을 볼 수 있었다.

“루미나.”

남자. 아니, 카라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비록 머리 색도, 복장도 완전히 달랐으나 카라얀은 자신을 붙잡은 여성이 루미나라는 걸 직감했다.

루미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루미나와 카라얀의 시선이 교차됐다.

카라얀은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루미나는 환한 금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서로가 서로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전부터 서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카라얀 님.”

루미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 딱히 기다리지 않았어.”

카라얀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히 드러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안 본 새 착장이 많이 바뀌었네요.”

“아라벨을 만났거든.”

“황녀님을요?”

“그래. 그 녀석이 이 꼴로 만들어놓고 나서야 네가 있을 곳을 알려주더라고. 비록 그 장소에 없었지만.”

웬 민트색 머리의 남성만 있어서 지나쳐 왔었다.

아라벨이 자신을 골린 건가 싶어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연회장으로 돌아온 게 지금이었다.

‘아라벨이 루미나를 데려간 거라면 어쨌든 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맞혀서 다행이네.’

더는 자신과 맞춘 옷을 입지 않았고, 은빛 가발을 쓴 데다 처음 보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더라도.

카라얀은 루미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그래서일까.

카라얀이 저도 모르게 불쑥 속마음을 털어놨다.

“사실 자의로 폭주하려고 했어.”

“네?! 왜요?”

루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봤다. 카라얀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에 네가 말했잖아. 내가 위험하면 어디에 있든 단숨에 달려오겠다고.”

루미나는 카라얀이 폭주로 인해 제삼자가 피해받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 하나를 찾기 위해 신념을 버릴 결심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네가 정말 위험에 처했다면 다른 이들의 위험을 외면하면서까지 그런 선택을 했을 거야. 너만은 평생 지키겠다고 했으니까.”

진심이었다.

짙은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자면 굳이 진심을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순 당황한 루미나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카라얀이 아까보다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마차에서는 나를 못 알아볼 거라고 하더니 바로 알아봤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루미나가 웃으며 대꾸했다.

“농담이라고 했잖아요!”

“그렇지?”

카라얀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루미나가 중얼거렸다.

“사실 조금 신기하기도 해요.”

어떻게 그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데다 멀리서 뒷모습만 봤는데.

“신기한 일 아니야.”

카라얀이 루미나를 마주 본 채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러니까.”

그 순간이었다.

뎅-.

뎅-.

뎅-.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12’를 가리키자 커다란 종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새로운 날의 시작이자 아라벨의 생일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는데, 그중에는 황제 또한 있었다.

“아라벨은?”

성년이 된 아라벨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장을 방문한 그는 시종에게 물었다.

“아무도 황녀님을 찾지 못한 듯합니다.”

“대체 어디로 숨은 건지!”

아라벨과 충분한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던 황제는 고집불통인 막내딸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황녀님께서 아예 궁을 나가신 게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는 그럴 리 없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워낙 변덕스러운 딸의 성격을 생각하면 말문이 턱 막혔다.

자정이 됐는데도 아라벨이 나타나지 않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 소란을 단숨에 잠재운 사람이 있었으니.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어.”

계단 위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는 증폭 마법을 걸어놓은 것처럼 모두에게 들렸다.

남자가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가면을 벗었다.

동시에 까맣던 머리 색깔이 찬란한 은빛으로 변했다.

“나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를 아무도 못 알아보다니 말이야. 그만큼 내가 완벽했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제야 황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영애들과 춤을 췄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더군. 게다가 대화까지 나눴는데 말이야.”

남장한 아라벨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몇 영애들이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안타깝게도 상을 받을 자는 없겠네.”

아라벨이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가면무도회를 열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막내딸의 눈에 띄는 기행을 지켜보던 황제가 머리를 짚었다.

지금처럼 유모의 조언이 절실한 때가 없었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아라벨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으윽.”

당당하던 미소가 흐릿해졌다.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고통을 호소한 아라벨이 고개를 숙였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기 전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머리 위로 난 동그랗고 커다란 귀.

흰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의 지분을 커다랗게 차지한 동공.

거기다 가느다란 꼬리까지.

“세상에!”

“저게 뭐죠?”

아라벨의 귀를 본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경악했다.

“사람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보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라벨의 레기온 모습은 이제껏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마물 토벌에 징집된 전적도 없으니 황족 외에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몰랐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을 통해 ‘아주 멋지다’라고만 인지돼 있을 뿐.

그런데 본인에 대한 자긍심으로 똘똘 뭉쳤던 황녀가 사실은 비루한 쥐와 닮은 형상을 하고 있다니.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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