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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21)화 (121/152)

영락없이 쥐와 인간을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 나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아라벨이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제 모습을 보기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쥐였죠.”

“맞아요, 쥐예요.”

“아라벨 황녀님께서 쥐와 가까운 모습을 하시다니.”

아라벨은 성년이 되었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해야 할 하루를 꼽자면 성년식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에게 최악의 하루로 기억되리라.

***

아라벨의 성년식 기념 연회는 급하게 끝났다.

원래라면 연회가 며칠 더 준비돼 있었으나 모두 취소됐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일주일이 지난 지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아라벨이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돌아오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동그란 귀를 만지작거렸다. 소름이 끼쳤다.

이토록 오랫동안 레기온의 모습을 유지한 적 없었다.

보통 능력을 사용할 때만 모습이 바뀌니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 이 꼴로 살아야 하면 어쩌지?’

아라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이었다.

온갖 부정적인 망상이 차오르던 중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라벨. 상태는 좀…….”

“나가!”

마르셀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발작하듯 외친 아라벨이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넌 오라비가 말을 하는데 중간에 끊는 게 어디 있냐.”

마르셀이 짜증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아라벨은 협탁 위에 있던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침대에 드리운 캐노피를 살짝 걷어내 다른 한 손으로 화병을 던졌다.

와장창-.

마르셀의 바로 옆에서 화병이 깨졌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중상을 입을 만큼 화병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마르셀은 새삼 아라벨의 괴력을 실감했다.

“성격 참 더러워.”

하지만 자존심이 있었기에 두려운 티를 내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모습이 들통나는 바람에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켰다고 다들 아라벨을 멀리하라 했지만, 사정이 딱해서 친히 행차했더니. 이런 박대라니.’

철없는 막냇동생이었다.

차기 황제가 될 저를 이리 배척하는 건 전혀 좋지 못한 선택임을 알 텐데.

“네가 쥐새끼 같은 꼴을 한 게 부모님이나 내 잘못은 아니잖아.”

“꺼지라고 했어.”

아라벨이 살벌한 어조로 경고했다.

“오, 사, 삼…….”

“간다, 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마르셀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실제로 저를 죽이려고 들까 봐 무섭기도 했다.

‘연회에서 만난 그 여자나 다시 찾아야지.’

마르셀은 요즘 한눈에 반한 그녀를 찾느라 바빴다.

부황께서는 황태자 임명에 맞춰서 결혼을 준비하려는 듯한데, 이왕이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연회에 참석한 걸 보면 귀족인 건 분명한데. 제도에 올라온 미혼 영애를 중심으로 찾는데도 보이지 않았지.’

그날 자신이 신기루를 봤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은발과 분홍 눈동자.

겨우 머리와 눈 색이 일치하는 영애를 찾았지만, 그 얼굴이 아니었다.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르셀이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게 된 아라벨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방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내가 오지 말랬지!”

“벨. 나야.”

이번 방문객은 마르셀이 아닌 엘리엇이었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

아라벨이 아까보다 훨씬 유순해진 어조로 말했다. 여전히 까칠하고 불안하긴 했지만.

침대에는 캐노피가 드리워 있었다. 때문에 엘리엇은 아라벨의 실루엣만 볼 수 있었다.

“듣기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며. 아무리 레기온이라 해도 너무 오래 굶으면 안 돼.”

“지금 식사가 중요해? 돌아오지 않는다고! 원래 모습으로!”

“벨. 넌 충분히 사랑스러워.”

“오라버니는 지금 이런 꼴이 아니니 쉽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런 내 모습이 싫어!”

레기온으로서의 모습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웬만하면 사람들 앞에 보일 일이 없으니 당당했다.

렘브라나 황가 역사상 최고의 레기온.

실체를 숨긴 채 자신의 대단함을 널리 알렸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동경과 선망 그리고 압도당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애초에 오르지 못할 산 같은 존재였지. 그 누구도 감히 나를 시기하지도 못했어. 그런데 이제는…….’

레기온으로서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 그 순간.

혐오로 얼룩진 사람들의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차라리 하트 공작처럼 파충류를 닮았다면 좋았을 거야. 아니. 날개 달린 것도 좋아. 하다못해 뿔이라도 생겼으면!”

아라벨이 절규하듯 외쳤다.

“그런데 쥐라니!”

하수구에서도 찾을 수 있는 비천한 존재.

그것이 고귀한 황녀인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

엘리엇은 이어지는 아라벨의 한탄을 들었다.

그러다가 정적이 찾아왔을 때,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데 벨. 연회 도중에 하트 공자비를 만나지 않았어?”

“만났어.”

“내가 주라고 한 간식은?”

“줬어. 그런데 먹지 않았지.”

한바탕 속마음을 쏟아내고 나니 무기력해졌다.

지친 어조로 대답하던 아라벨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언성을 높였다.

“오라버니. 지금 그게 문제야?!”

“문제라.”

엘리엇의 보랏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문제라고 부를 건 아니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아라벨은 보지 못할 미소였다.

“벨, 나는 진심으로 지금 네 모습이 완벽하다고 생각해. 레기온으로 태어난 것이 축복인데 어찌 그 모습의 귀천을 나누겠어.”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몰라.”

애정이 듬뿍 담긴 엘리엇의 말투는 가식이 아니었다.

기가 한풀 꺾인 아라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의사들조차 이상한 점이 없다면서 일단 지켜보자고 말했어. 어쩌면…….”

“…….”

“평생 하트 공작처럼 이렇게 살아가야 할지도 몰라. 아니, 하트 공작은 눈만 바뀌었으니 나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지.”

평소 아라벨한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암담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절망에 빠진 아라벨을 보며 엘리엇은 “그렇구나.”라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애초에 아라벨을 저렇게 만든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아라벨뿐만 아니라 루미나까지 본 모습을 드러내게 할 생각이었는데. 역시 쉽지 않군.’

루미나가 레기온이라는 사실이 황궁, 그것도 연회 도중 밝혀지면 정식으로 레기온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하트 공작이라고 해도 막을 수 없을 터.

그러면 하트 공작과 루미나를 자연스레 떼어놓을 구실이 생길 거라고 계산했다.

‘비록 경계심이 많은 탓에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엘리엇의 계획에 아라벨은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엘리엇은 아라벨의 레기온 모습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의 본모습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오직 루미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저를 진짜 오라비라고 믿고 따르는 레기온의 희생쯤은 상관없었다.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하니 자꾸 마음대로 되지 않네.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오라버니.”

‘오늘 중이었나. 곧 약효가 떨어질 테니 아라벨의 투정도 끝이 나겠지.’

엘리엇이 검은 속내를 감춘 채 그렇게 생각했다.

“오라버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그럼. 당연하지.”

여전히 친절한 어조였지만 아라벨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캐노피 너머에 있는 자는 자신의 오라비였다. 재수 없는 첫째와 달리 유약하고도 다정한.

그런데 왠지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심지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꼭…….’

세상에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답답해진 아라벨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곳도 아라벨을 반길 곳은 없었다.

어딜 가도 조롱과 혐오 그리고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겠지.

아라벨이 시트가 구겨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

연회가 끝난 직후 루미나는 카라얀에게 혼이 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맨발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잘 정돈된 길을 걸어 다녀서 망정이지.

혹 유리 조각이라도 밟았다가는 큰일이 날 뻔했다.

심지어 발목까지 삐끗했으니 비상 상황이었다.

카라얀은 루미나를 안은 채로 마차까지 갔다.

루미나를 무사히 마차에 탑승시킨 그는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작고 하얀 발을 내보인 루미나는 저번에 이 근처를 손바닥으로 짚었다가 큰일이 났던 걸 떠올렸다.

혹여나 또 그렇고 그런 사고가 날까 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슬금슬금 다리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덥석-.

하지만 도주는 실패.

바로 잡혀버렸다.

“왜 이렇게 안전 불감증이야.”

뺨에 살짝 열이 오른 루미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라얀은 루미나가 면목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한 듯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반대쪽이었던가.’

카라얀의 허벅지를 힐끔거리고 있자니 발가락이 자꾸 곱아들려고 했다.

‘불감증은 무슨 불감증! 자꾸 그날을 의식하게 되잖아!’

카라얀이 말한 불감증은 그 불감증이 아니었지만 루미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미쳤어! 변태야, 변태!’

루미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쩌면 진짜 짐승은 나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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