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맨발을 만지는 카라얀의 손길이 워낙 담백했기에 루미나는 응큼한 속내를 금방 숨길 수 있었다.
카라얀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루미나가 슬쩍 손바닥을 내리며 웃었다.
헤헤.
카라얀이 그 미소를 보고 유야무야 넘어가 줬으면 좋았을 텐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넌 회복력이 남들보다 훨씬 좋아서 며칠 지나면 나으니까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
카라얀은 루미나가 할 대답을 완벽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네가 아프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
“안 아파요!”
“…….”
“정말이에요.”
루미나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배실배실 지어 보였다.
카라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디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한 이후로 나도 다친 적 없어.”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지만 폭주도 하지 않았고.
“그런데 네가 네 몸을 함부로 대하면 널 지키려고 한 내 노력이 뭐가 돼.”
“…….”
“차라리 내게 네 능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요. 도망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을걸요.”
“그래. 아라벨이 문제지.”
카라얀이 살벌한 눈빛을 했다.
그렇지만 카라얀과 달리 루미나는 아라벨이 걱정됐다.
새파랗게 질린 채 사라지던 그녀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아라벨 황녀님은 괜찮으실까요.”
“난 걔보다 네가 걱정이야.”
카라얀이 무신경한 어조로 말했다.
“꼬리나 귀가 달리는 게 무슨 엄청난 일이라고 다들 난리인지.”
아라벨이 레기온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모습이 쥐와 닮아서 문제였다.
아라벨에게는 치명적인 치부가 될 수 있건만, 카라얀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루미나와 관련된 일은 공감 능력이 잘 발달된 탓에 저택에서도 종일 업고 다니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하루 자면 낫는 상처로 카라얀과 씨름을 하고 난 루미나는 브랜든을 통해서 조제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조제프 숙부님과 오로라가 1황자님의 비가 될 생각으로 연회에 참석했단 말이죠?”
“그래. 혹시 마주치지는 않았고?”
“아, 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못 봤던 거 같아요.”
오로라 멜칸.
어쩌면 연회장을 돌아다니다가 그녀와 옷깃이 스쳤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생과 별반 다를 바 없을 테니 성격도 그대로겠지.’
루미나는 사촌인 오로라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여전히 또라이겠네.’
전생에서 루미나는 미친년이라고 불릴 만큼 막 나가는 성격이었다.
반면 오로라로 말할 것 같으면 루미나와는 사뭇 다른 행동으로 미친년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심각한 망상 환자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직접 얼굴을 본 적은 두 번 정도였나?’
오붓한 부녀 사이를 보고 루미나가 질투할까 봐 조제프는 셋이 한자리에 모이는 걸 경계했다.
‘약도 쓰고, 도박 중독까지 시켰으니 방심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어.’
파면 팔수록 조제프가 얼마나 치밀하게 루미나를 길들이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로라의 성격이 워낙 독특한지라, 짧은 만남으로도 그녀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슬슬 제도로 올라오고 싶어서 좀이 쑤실 거라고 생각했지. 숙부님은 전생에도 오로라를 1황자의 비로 만들려고 했으니까.’
그러나 헛물만 켰다.
‘쟁쟁한 후보들이 얼마나 많은데 오로라가 될 리 없지.’
오로라가 괜히 조제프의 딸이겠는가.
상종하고 싶지 않은 성격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린 루미나가 치를 떨면서 눈을 빛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나한테 손님이 찾아왔다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설마 조제프가 꼼수를 쓴 건가 싶어서 루미나가 긴장했다.
“네. 그런데 신분을 절대 밝히지 않으려고 한대요.”
더 수상한데?
“대신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
하트 공작저 앞.
“누구십니까? 신원을 명확히 밝히십시오.”
불곰 같은 문지기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문지기들 앞에는 검은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문지기의 물음에 욱한 듯, 상대가 순간 언성을 높였다.
“감히 나! 아라…….”
감히 나! 아라벨 피아제 에파고니조마이 휠로네이키아 폰 렘브라나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 몸이 왔는데 당연히 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문을 열면 알아서 엎드리지 않은 그 죄를 사해 주겠다.
의문의 불청객.
아니, 아라벨은 그런 말을 하려다가 급하게 삼켰다.
지금 그녀는 렘브라나 황족인 아라벨로서 공작저를 방문한 게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은밀히 황궁을 탈출하느라 변장을 해야 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아라벨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까지 올 때 황실의 마차가 아닌 삯마차를 탄 건 물론이고, 시녀나 하녀 같은 시중을 드는 사람도 당연히 대동하지 않았다.
그러니 문지기들이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까득-.
이를 간 아라벨은 오늘처럼 스스로가 초라하고 치욕스러운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소하고 말았다.
‘연회장에서 치욕이란 치욕은 전부 당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주먹을 꽉 쥔 아라벨이 목소리를 낮췄다.
“하트 공자비의 손님이야.”
“들은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공자비한테 전해.”
얼굴을 내보일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아라벨이 말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
루미나는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객이 아라벨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마침 루키우스가 부재중이었기에 그녀를 들일지, 아니면 내쫓을지는 루미나에게 달려 있었다.
‘카라얀 님이었다면 바로 쫓아냈겠지.’
하지만 루미나는 고민하게 됐다.
알려진 바로는 연회 이후 아라벨은 줄곧 칩거 중이라고 했다.
큰 충격을 받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분을 숨기고 자신을 찾은 이유가 있을 터.
‘평소 성격 같으면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은 풀네임을 말하며 다짜고짜 문을 열라고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잖아.’
“흐음.”
잠깐 고민하던 루미나는 결단을 내렸다.
***
“편하게 있으세요.”
응접실로 들어온 아라벨은 검은 후드를 눌러쓴 채 우뚝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루미나가 한마디 하자 아라벨이 다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직 그런 모습이야.”
“네? 그래서요?”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기를 낸 아라벨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눌려 있던 귀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루미나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제야 아라벨은 루미나가 자신의 모습이 아닌 눈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괜히 레기온을 남편으로 둔 게 아니구나.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하트 가문에서 며느리 노릇 하는 거겠지.”
욕인지 칭찬인지 애매한 말투였다.
루미나는 벌써부터 아라벨을 괜히 안으로 들였나 싶어졌다.
“어째서 저를 찾으신 거예요?”
“몰라.”
“네?”
“찾을 사람이 너밖에 없었단 말이야.”
마침 엘리엇이 루미나를 언급했기 때문일까.
루미나가 떠올랐다.
연회 날 변장한 자신을 알아봤으니까 혹시 다르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 또한 있었는데…….
‘정말 달라.’
아라벨이 살짝 반짝이는 눈동자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그러면 무슨 대화를 해야 할까요.”
루미나는 시무룩한 아라벨이 낯설었다. 다소 어색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아라벨과 언제부터 친했다고 활짝 문을 열겠는가. 이 모든 게 빚으로 돌아오는 거다.
“그때처럼 멋지다고 말해 줘.”
“네?”
“네가 나보고 최고라고 했잖아. 생각해 보니까 다시 한번 듣고 싶은 거 같아.”
사람이 자존심이 있는데 순순히 칭찬을 해 주겠는가. 심지어 상대는 칭찬할 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황녀님이 최고예요!”
루미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자존심이 당장 먹을 빵을 주는 건 아니잖아.’
잠깐 자존심을 굽히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냥 빵도 아닌 수 천 골드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방긋방긋.
그러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황녀님만큼 멋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아라벨이 갑자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녀님?”
잠시 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황녀님 모습이…….”
아라벨이 다급히 머리를 더듬었다.
끔찍하기 그지없었던 쥐 모양의 귀가 없었다.
“돌아왔어!”
기쁨에 겨운 아라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미나를 꽉 껴안았다.
“화, 황녀님.”
“네 칭찬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몰라! 어쨌든 돌아왔으니 된 거지! 역시 내가 최고야!”
아라벨이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는 탓에 제대로 된 해석이 불가능했다.
루미나가 난처한 듯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던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카라얀이 들어왔다.
“루미나!”
아라벨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가장 먼저 루미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런데 루미나와 아라벨이 꼭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흥. 팔불출이야, 뭐야?”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원래 성격으로 돌아온 아라벨이 코웃음 쳤다.
“아라벨, 너.”
“왜! 치졸하고 쪼잔한 남자야!”
“뭐?”
아라벨과 카라얀이 티격태격 다퉜다. 그러다가 카라얀과 루미나의 눈이 마주쳤는데, 루미나가 빠르게 눈짓했다.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라벨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금방 돌아갈 것이다. 카라얀의 등장은 아라벨의 성질만 돋울 뿐이었다.
다행히 눈짓의 의미를 읽은 카라얀이 한 번만 봐준다며 아라벨을 뒤로하고 나갔다.
“망할 싹퉁바가지.”
흥!
아라벨이 씩씩거렸다.
“대체 저 남자의 어디가 좋은 거야?”
“…….”
“넌 사랑해서 결혼했으니 내게 사랑을 운운하는 거 아니야?”
“얼굴이요.”
루미나가 살짝 웃으면서 항상 하는 변명을 했다.
그러나 아라벨의 반응은 싸늘했다.
“얼굴? 그 얼굴이 어디 가?”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아라벨의 말투와 달리 루미나의 뺨이 발그스름해졌다.
“……너 진짜 카라얀의 얼굴이 좋나 보구나.”
“네?”
“돈도 밝혀, 얼굴도 밝혀.”
아라벨은 루미나를 제대로 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아라벨이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도망치고 나서 저 망할 싹퉁바가지는 만났어?”
“네.”
“정원에서 만났나 보네.”
“아뇨! 연회장에서 만났어요.”
“음? 어떻게? 이름을 적은 피켓이라도 들고 다닌 거야?”
자신의 변장은 완벽했는데.
“그냥 바로 알아봤어요.”
그러고 보니 아직 의문으로 남은 미스터리였다.
“이상하긴 했죠. 카라얀 님도 저를 바로 알아봤거든요.”
루미나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아라벨이 어리둥절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왜 이상해? 사랑하니까 그런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