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23)화 (123/152)

아라벨은 고민 없이 사랑이라고 단정 지었다.

진리를 말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루미나가 당혹스러워졌다.

“황녀님은 레기온이잖아요.”

“그래서?”

조금 전에 레기온의 본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일까. 그녀가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그녀의 약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레기온을 언급한 게 아니었다.

“레기온들은 흔히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잖아요. 특히 사랑을.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라고 단정 짓는 거예요?”

“…….”

“집착일 수도 있잖아요.”

“집착도 사랑의 한 종류인데 뭐가 문제야?”

“집착이 크면 사랑한다 해도 추하니까요.”

“그건 상대가 싫어할 경우지. 그런데 카라얀도 널 알아봤다며.”

아라벨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밀어붙여. 네가 집착해 봤자 얼마나 집착할 거라고 그런 걱정을 하니. 그리고 내가 레기온 중 레기온인데 어째서 아냐고 물었지.”

“…….”

“로맨스 소설을 무시하지 마. 마음은 몰라도 머리로는 대충 이해하고 있으니까.”

어째서 성년식 기념 연회로 가면무도회를 열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라벨에게 친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로맨스 소설이 그녀의 친구가 돼 준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음의 크기가 같다면 집착도 괜찮다는 말씀이죠.”

“그래.”

루미나는 새로운 관점으로 사랑을 보게 된 기분이었다.

‘로맨스 소설이나 좀 볼 걸 그랬네.’

동화책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며 루미나가 배시시 웃자 아라벨이 따라 웃었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는 성년식 기념 연회에서 황녀님이 돌연 본모습을 보이는 사건이 없었지.’

무언가 바뀌었다.

가면무도회가 열렸다는 점부터 전생과 다르긴 했지만,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

‘전생에는 카라얀 님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곧 죽을 거라 간당간당하긴 했어도.’

아라벨은 카라얀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밀었다.

그러니 그가 죽기 전까지 다른 남편감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혹시 연회 중 수상한 점은 없었나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나.”

“딱히 없어. 그냥 갑자기 변한 거고, 의사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대.”

루미나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탐정이라도 된 듯 진지한 루미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라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다가 주운 듯이 툭 말했다.

“미안해.”

“네?”

깜짝 놀란 루미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아라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널 일부러 괴롭힌 거.”

사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라벨은 본인의 잘못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너무했던 거 같아.”

“황녀님은 제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신 적이 없잖아요.”

“하지만 내가 그러길 바랐지.”

본모습이 드러난 이후 아라벨은 자신이 철저하게 혼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제법 고독했다.

이제껏 그녀가 고독을 모를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도 그녀를 깔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황족이고, 레기온이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선 인간이야.

그 자존감이 그녀를 고독을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

그러다 바닥 중 바닥으로 추락했다. 진창을 뒹굴고 있는데 오직 루미나만이 그녀를 편견 없는 시선으로 봐 주었다.

아라벨의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앞으로도 그러실 거예요?”

“너한텐 안 그럴 거야.”

“남한테는요?”

“상대를 보고!”

쑥스러운 듯 아라벨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미소 지은 루미나는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쯤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을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어서 가세요.”

***

“에효효.”

힘들다, 힘들어.

아라벨을 보내고 나서 카라얀에게 한차례 시달린 루미나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채로 말했다.

“어디 한번 뚱땅뚱땅 두드려 보세요.”

“예, 사장님-.”

브랜든이 하인처럼 깍듯이 말하며 루미나의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면서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아까 속보가 들어왔는데.”

“뭔데요?”

“1황자 전하와 오로라 멜칸이 결혼을 약속했다네.”

“진짜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마르셀이 은발과 분홍 눈을 한 여자를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오로라의 외형은 아니었다.

‘왠지 나를 찾는 거 같아서 조금 싸한 기분이긴 한데……. 모르는 척해야지.’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라벨처럼 직접 찾아오면 몰라도 황자와 마주할 일이 몇 번 있겠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오로라랑 결혼한대요?”

“모르겠어. 꼭 약점이 잡힌 사람처럼 급하게 결정하던데. 아, 결혼 발표 전에 오로라가 1황자와 독대하긴 했지. 대화 내용까지는 몰라.”

달라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심하던 루미나가 말했다.

“숙부님은 어때요?”

“신이 나서 돌아다니지. 자기가 황실의 외척이 된다면서 이곳저곳 돈을 빌리러 다니기도 하고.”

“돈이요?”

“이번 기회에 무리하게 한탕 하겠다는 거지. 외척인데 돈이 많아야 체면이 선다나 뭐라나.”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역시 제 숙부는 욕심쟁이였다. 그것만큼은 변치 않았다.

“아저씨. 포도밭을 조금씩 매입하면서 퀸 상단이 포도주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을 내 주세요.”

“포도주 사업도 하게?”

“크게는 아니고, 그냥 눈속임할 정도면 괜찮아요.”

퀸 상단이 구매하려는 건 모두가 너도나도 같이 구매하려 들었다.

왜냐하면 퀸 상단은 실패를 모르는 황금 손이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어요.”

“뭔데?”

“포도밭 근처에 장미를 심는 거요!”

“대장의 귀에도 장미를 꽂더니. 부쩍 장미에 관심이 많아졌나 봐.”

“그건 장난이었어요.”

좋지 못한 과거의 전적을 떠올린 루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포도밭을 꾸미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또 있어요!”

“또? 그래, 말해 봐.”

루미나의 얘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었다. 브랜든이 귀를 활짝 열었다.

“제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자그마한 별장 한 채를 구매하려고 해요. 차명으로.”

‘그건 왜?’라고 묻는 듯한 브랜든과 마주한 루미나가 싱긋 웃었다.

“제 목표가 소박하게 사는 거라서요. 가끔 놀러 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요?”

***

조제프와 오로라가 입궁했다.

잘 차려입은 그들의 목이 뻣뻣했다.

“역시 우리 공주님이 황자비가 될 줄 알았지.”

“아빠가 봐도 나보다 예쁜 영애가 제도에 없었지? 그래서 그런 거야.”

오로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진실은 사뭇 달랐다.

그녀는 결코 예뻐서 황자비가 된 게 아니었다.

“황자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마르셀을 협박했다.

그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오로라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돼 줬다.

“그래서?”

“저와 결혼해요! 그러면 진실을 묻어드릴게요.”

당시 마르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당시 듣는 귀가 더 있었을 줄이야.

찾고 있던 여자는 나오지 않고 웬 이상한 여자가 나와서 결혼해 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 여자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나타나지 않는 통에 지친 마르셀이 반쯤 귀찮은 어조로 말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할 일은 없을 거야. 황위를 받으면 이혼할 확률이 높겠군.”

“이미 저를 사랑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뭐 하는 여자지?’ 싶었다.

그렇지만 마르셀은 일단 혼인을 해서 부황께 잘 보인 후 무사히 황위를 이어받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준 것이다. 평소라면 입막음부터 했을 텐데 오로라는 타이밍이 좋았다.

그것도 모르고 희희낙락거리던 부녀는 접견실로 갔다.

황제와 1황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가 들어오신 걸까?

그런 생각으로 일어나려던 부녀는 엉거주춤해졌다.

기다란 은발. 보랏빛 눈동자.

아라벨이 들어온 것이다.

연회 당시에도 아라벨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오로라는 살짝 위축됐다.

아라벨이 괜히 제국의 최고 미녀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었다.

“넌 뭐야?”

아라벨이 까칠하게 물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게 된 오로라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는…….”

“아, 네가 그 애야? 첫째 오라버니와 결혼한다는?”

오로라의 말을 중간에 뚝 끊은 아라벨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오로라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네, 네. 오로라 멜칸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제프 멜칸입니다.”

“오라버니는 뭐 이런 애를 주워 왔대. 그보다 아무도 없는 거야? 나한테는 일찍 오라고 뭐라고 하더니. 정말 짜증 나.”

아라벨은 금방 오로라와 조제프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황제와 마르셀만 온다고 했지, 아라벨이 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던 조제프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레기온의 모습을 보여 칩거 중이라더니 그새 나은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터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조제프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께서는 루미나를 전속 시녀로 들이고 싶어 하실 만큼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루미나의 외가 쪽 삼촌 됩니다.”

“아, 그래?”

무심하게 대꾸한 아라벨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로라 앞에 있던 찻잔을 들더니…….

“……!”

그대로 두 사람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아, 실수.”

“화, 황녀님! 이게 무슨!”

“실수라니까?”

아라벨이 무신경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실수라고 할 수 없었다.

홀딱 젖어버린 조제프와 오로라가 황당하다는 듯 아라벨을 쳐다봤다.

부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아라벨이 무표정한 얼굴로 오로라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꺅!”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서 잡기 좋아 보이지 뭐야.”

갑자기 봉변을 당한 오로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라벨은 뻔뻔했다.

“와, 너 머리 진짜 푸석푸석하다. 이게 지푸라기야, 뭐야.”

오로라가 울먹거렸다.

그렇지만 아라벨은 봐주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사람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루미나와 약속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건 괜찮지.’

자신밖에 모르던 아라벨은 루미나에 대해 알아봤다. 그리고 주변 관계를 정확히 외웠다.

동생은 엔디미온. 사이가 좋음.

친척 중 발레스 가문은 감옥행. 사이가 좋지 않음.

그리고 외가인 멜칸 가문.

“화, 황녀님! 놓아주세요! 제발! 꺅!”

“우리 공주가! 거기 밖에 누구 없습니까? 황녀님께서 폭력을……!”

“아악! 아빠! 나 아파! 아빠!”

사이가 좋지 않음.

‘분명 루미나도 넘어가주겠지.’

재수 없는 첫째 오라비의 아내가 될 여자였다. 일찍 와서 짜증이 났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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