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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24)화 (124/152)

“사람 살력……!”

오로라가 비명을 지르고.

“목소리도 별로구나. 와, 첫째 오라버니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더니 진짜 아무나 주워 왔나 봐.”

아라벨이 웃으며 그런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아라벨은 이제껏 고상하게 남의 손을 빌려서 괴롭혀 왔지만, 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는 직접 손봐주기로 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거니까!

조제프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레기온인 황녀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또 다른 레기온뿐이었으니까.

오랫동안 오로라와 조제프의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

“마르셀, 네가 마음을 정했다니 다행이구나.”

마르셀과 함께 접견실로 이동하며 황제가 허허 웃었다.

통 여자한테 관심이 없기에 혹 동성을 좋아하는 건 아닌지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무난한 혼처를 데려왔으니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실상은 혼인을 서두르지 않으면 황위를 빨리 물려주지 않을 것 같아 저를 협박한 여인을 데려온 것이지만.

마르셀은 진실을 쑥 삼켰다.

과정이 어떻게 됐든 부황께서 기뻐한다면 의도대로 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폐하. 제가 그런 자리에 껴도 괜찮은 걸까요?”

접견실로 가는 건 황제와 마르셀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유모인 헬렌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자처럼 여기는 마르셀의 아내가 될 자인데 부인께서도 함께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이어 말했다.

“요즘 고민이 많은 터라 부인께서 합석해 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헬렌 부인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자식 교육과 관련해서 황제가 제게 의견을 구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지내는 그녀가 제도까지 올라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부황의 말씀이 맞습니다. 부인께서 그런 악질적인 일을 겪어서 고단할 텐데 선뜻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르셀이 거들자 헬렌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사람이 실수한 거겠죠.”

“말이 됩니까? 대화할 때 분명 목적지를 밝혔는데 그런 외진 곳으로 사람을 보내다니. 삯마차를 구할 수 없는 곳으로! 악질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헬렌 부인이 제도로 올라왔을 때. 짐이 무거워 걸음하기가 힘들었다.

고작 유모인 자신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올라왔으니 아는 사람도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청했는데, 그는 친절하게 짐을 들어주고 삯마차까지 가 줬다.

하지만 그가 말한 목적지는 헬렌 부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놈을 잡을 수 있다면 바로 옥에 가뒀을 텐데.”

“됐어요. 폐하께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으세요.”

헬렌 부인은 한참을 헤매다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겨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며칠을 앓았다.

이 일을 알게 된 황제가 길길이 날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헬렌 부인이 제도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찾겠냐며 말렸기에 넘어갔지.

아니었으면 이 잡듯이 제도를 뒤졌을 거다.

황제와 마르셀 그리고 헬렌 부인이 접견실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악! 아빠! 나 아파! 아빠!”

여자의 비명이었다.

당황한 그들이 접견실로 들어가자…….

“아라벨!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아라벨이 한 여성의 머리를 잡고 흔드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아. 지푸라기가 있길래 좀 흔들어 봤죠.”

아라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멀쩡한 아라벨과 달리 오로라는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거렸다.

아주 난장판이었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을 조금 죽이나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레기온의 모습을 보이고 나서 의기소침했던 아이가 잠깐 가출하고 돌아오더니 괜찮아졌다.

그 뒤로 얌전하게 굴길래 철이 든 건가 싶었다.

그래서 황제는 가족 모임 같은 느낌으로 아라벨까지 이 자리에 불렀다.

“아라벨, 그 손 놓거라.”

“어떤 손이요?”

“아라벨.”

황제의 경고에 아라벨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오로라의 머리를 놓아줬다.

흐어엉.

오로라가 또다시 서러운 눈물을 터트렸다.

“일단 자리를 정리하고, 다음에 만나는 것이 좋겠구나.”

다음 모임에서는 아라벨을 제외해야 할 것 같았다.

심약하고 몸이 약한 헬렌 부인이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황제가 빠르게 자리를 파하려던 그때였다.

“어?”

헬렌 부인이 조제프의 얼굴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엉망이 된 오로라와 그 옆에서 쩔쩔매는 조제프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말했다.

“혹시 기차역에서 만나지 않았나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조제프는 헬렌 부인을 금세 기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 노파가 왜 황제 폐하와 황자님과 함께 들어온단 말인가.

그러나 겉으로는 알아보지 못한 척,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기차역?”

안 그래도 조금 전까지 기차역에서 헬렌 부인을 도와주는 척 골탕 먹인 사내에 대한 얘기를 한 터라 황제는 관심을 가졌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조제프는 꿋꿋하게 모르는 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어? 기차역? 혹시.”

오로라가 아는 척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훌쩍.

조제프는 코를 삼키는 오로라의 입을 황급히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빠한테 짐 들어달라고 해서 시간 낭비하게 만든 그 할머니야?”

“오로라!”

오로라가 훌쩍거리면서 실토하지만 않았어도 조제프는 친절의 가면을 계속 쓸 수 있었을 거다.

***

며칠 후.

루미나는 브랜든을 통해 의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1황자와 오로라 멜칸의 혼인이 거의 무산되기 직전이래. 황제 폐하가 반대하셨다네.”

“네? 분위기 괜찮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요?”

“그게…….”

브랜든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루미나가 ‘쯧’ 하고 혀를 쳤다.

“그 성격은 어디 가지 않네요.”

그러게 착한 척만 하지 말고, 진짜로 착하게 살았어야지.

‘꼭 그러지 않았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겠지만.’

뭐, 손을 미리 써놨으니 이제 남은 건 샴페인을 터트릴 일뿐이었다.

***

쾅!

“평판이 좋다고 알려져 있더니만! 다 거짓된 행실이었군!”

황제가 씩씩대면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테이블이 흔들렸다.

“뒤늦게나마 알게 돼서 다행이지. 헬렌 부인을 볼 면목이 없어.”

황제는 곧바로 이 혼담은 없던 얘기로 하자고 못을 박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르셀은 멜칸 영애를 생각보다 좋아하지 않았던 듯했다.

아버지의 의견이 그렇다면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뜻을 펼쳤다.

아무나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꼭 오로라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 속내를 모르니 황제는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벨, 잘했다. 옆에 있는 그 멜칸 백작의 머리채도 잡아당기지 그랬느냐.”

“그러게요.”

아라벨이 조금 전 황제가 했던 행동을 따라서 테이블을 톡 쳤다.

쩌저적-.

테이블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흠칫.

새삼 딸과의 거리감을 느낀 황제가 ‘크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라벨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첫째 오라버니가 고르고 고른 여자도 저렇게 문제투성이인데 혼인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황제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라벨이 웬일로 옳은 말을 했다. 아니, 웬일이 아니라 처음인 듯했다.

“그, 그렇지. 좋은 신붓감을 구하기가 참 쉽지 않지.”

“그렇죠?”

괜히 대답한 기분이었다.

대체 아라벨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긴장하던 와중이었다.

“신랑감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저는 결혼을 미루겠어요.”

“뭐?”

“대신 황위를 두고 오라버니와 다툴 거예요.”

“뭐, 뭐?”

“지금까지 제가 원하는 건 다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꼼꼼히 따져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제 본모습을 보였을 때 한 몸에 받았던 혐오로 가득 찬 시선.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아무 남자와 결혼하면 그 시선은 더 심해지겠지.

‘루미나가 나한테 최고라고 했잖아. 그런데 남들이 보기에도 최고가 되지 않으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

그건 바로 아버지가 앉은 그 자리였다.

“알잖아요. 제가 욕심 많은 레기온이라는 거.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거예요.”

아라벨이 싱긋 웃었다.

***

“아빠.”

오로라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조제프를 불렀다.

황궁에서 쫓겨난 이후 조제프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기차역에서 봤다는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오로라는 억울했다.

뭐라 변명하려다가 조제프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어두워 입을 다물었다.

대신 조금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초대장 같은 것도 왔는걸. 들어보니까 여기가 정말 초대받기 힘든 사교 클럽이래.”

튜베로즈.

귀부인들의 은밀한 사교 클럽 이름이었다.

“내가 봤을 땐 내가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초대받은 거 같아. 기혼의 여성만 모임에 갈 수 있으니까!”

오로라가 발랄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조제프만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 초대장이 왔으니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단 이 아빠는 황제 폐하나 그 노파에게 뒷돈을 바쳐서 마음을 돌려보도록 하마.”

따지고 보면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뇌물을 바치면 어느 정도 진정할 터.

대신 실수라고 아득바득 우기면서 가볍디가벼운 무릎도 꿇고, 이마도 박아야 할 거다.

조제프는 충분히 그럴 의향이 있었다.

황실의 외척이라니.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그냥 놓칠 수 있겠는가.

“아빠, 돈 많아?”

오로라가 순진하게 물었다.

“아빠한테 곧 거금이 들어올 예정이라서.”

“거금?”

조제프는 최근 포도밭을 구매하고, 양조장에 투자했다.

‘황금 손이라고 불리는 퀸 상단에서 포도주 사업에 뛰어든다고 했지.’

이 또한 은밀한 정보통을 이용해 얻은 소식이었다. 결코 실패할 수가 없었다.

퀸 상단과 엮인 일이라면 최소 10배의 수익을 낼 수 있으니까.

“멜칸 백작님한테만 알려주는 겁니다. 백작님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꼭이요!”

그러나 조제프는 몰랐다.

그에게 어마어마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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