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 루미나! 우리 꼬마 마님!”
브랜든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채 허우적대며 달려왔다.
“아저씨. 저는 어디로 도망 안 가요.”
반면 루미나는 여유롭게 꽃꽂이를 계속했다. 실력이 녹슬지 않았는지 결과물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만족!’
흡족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브랜든이 설레발을 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세상에!”
“아, 벌써 그럴 때가 됐던가요.”
브랜든의 반응만 봐도 척하면 척이었다.
루미나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열심히 꽃꽂이한 꽃을 살펴보며 말했다.
“사과주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죠.”
“너, 미래 보니?”
“네! 미래에서 왔습니다!”
루미나가 활기차게 응수했다.
반쯤 농담이라고 여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예상과 사뭇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진짜?”
“…….”
“어떻게? 설마 대장이랑 만난 적이 있는 거야?”
진지해도 너무 진지했다.
루미나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쳐다봤다.
말투만 진지한 척하는 연기일 줄 알았더니 표정도 진지했다.
“이상하다 했어. 어쩐지 요만한 꼬꼬마일 때 갑자기 나를 찾아오더라.”
“어째서 믿는 거예요?”
“네가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그동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의 대부분이 딱 맞거든. 그게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니요?”
‘아버님이 시간을 되돌리는 실험에 성공한 걸까?’
항상 고인이 된 공작부인을 만나고 싶어 했던 그였다.
그리고 슬슬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루미나가 죽을 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으음,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데 그런 게 있어.”
아직 완벽히 성공하지 못했구나.
브랜든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말하려는 듯했지만,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대장의 실험이 성공했나 봐?! 네가 아는 미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거야?”
아저씨가 죽었어요.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니 브랜든이 빠르게 말했다.
“아니다. 굳이 알 필요 없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 대부분일 테니까.”
브랜든이 정확하게 판단했다.
루미나가 살짝 놀란 듯이 쳐다보자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비효과라고,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온다는 얘기도 있잖아. 너도 그런 거겠지.”
“…….”
“그리고 구전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게 있거든.”
“나비 형태를 한 치유의 레기온이요?”
“응?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금지된 서고에서 관련 동화책을 읽었어요.”
“동화책?”
브랜든에게라면 얘기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루미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인간이 마물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를 다룬 동화책이었는데, 그런 얘기가 소수의 유랑민족들 사이에도 퍼져 있다면서요.”
“그런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 이것도 비밀이야?”
“아뇨. 2황자님이 잘 알고 계시던데요.”
“엘리엇 황자가?”
브랜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대장이 최근 엘리엇 황자의 행보가 수상하다고 했지.’
“그 동화책의 제목이 뭐야?”
“제목은 읽을 수 없는 언어라 몰라요. 대신 저자명이 ‘미미르’라고 했어요.”
“그것도 엘리엇 황자가 알려줬다고?”
“네.”
브랜든이 엘리엇에 대해 좀 더 깊게 파헤쳐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루미나가 그를 불렀다.
“아저씨.”
“응?”
“제가 미래에서 왔다는 얘기, 아버님께 할 거예요?”
“아니. 그런 건 네 입으로 직접 해야지. 대신 엘리엇 황자와 나눈 얘기는 보고할 거야.”
“그건 상관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루미나는 문득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왜, 왜? 무슨 일이야?”
“특별한 칼바도스는 미리 빼뒀죠?”
“그럼 당연하지.”
죽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된 브랜든과 루미나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성큼성큼.
달리듯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른 마르셀이 벌컥 문을 열었다.
“아라벨!”
“어머. 교양 없어라. 나와 같은 피를 나눴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급이 맞지 않는 행동이잖아.”
기품 있는 자세로 책을 읽던 아라벨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아라벨. 말장난할 기분 아니야. 네가 나와 황위 다툼을 한다고 들었어.”
“응. 맞아. 그런데 왜?”
“제정신이야?”
마르셀이 아라벨과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제왕학은 제대로 공부했고?”
“했지. 그 정도는 기본이잖아.”
“황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는 거야?”
“그럼. 백성들이 굶지 않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살게 하면 되는 거 아냐?”
의외로 정상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화를 꾹꾹 억누른 마르셀이 이를 갈 듯이 말했다.
“결혼을 미루고 싶어서 홧김에 말한 거라면 잘못됐어. 오히려 기혼자인 편이 아버지께 잘 보이는 길이니까.”
“오라버니야말로 결혼은 어떻게 할 셈이야?”
“…….”
“그러고 보니 은발에 분홍 눈동자의 여자를 찾더니 막상 데려온 지푸라기는. 음, 무슨 색이었지? 일단 은색 지푸라기는 아니었지.”
얘기를 하던 아라벨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연회 날 루미나를 내 마음대로 꾸몄을 때…….’
은색 가발을 씌우고, 눈동자는 굳이 손댈 필요 없으니 분홍색 그대로였다.
설마?
“첫눈에 반한 여자는 찾았어?”
“아니.”
마르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라벨이 한 손으로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쾅!
동시에 테이블에 금이 갔다.
움찔-.
흠칫 몸을 떤 마르셀이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생존 본능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아라벨은-.
푸하하.
박장대소했다.
“너 미친 거야?”
“하하, 아니. 그냥 웃겨서. 오라버니는 영원히 그 여자를 못 찾을걸.”
“아는 거야? 누군지?”
“응. 그 애는 내 거거든.”
웃음기를 꾹 누른 아라벨이 최대한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애썼다.
“뭐?”
“내 거라고.”
“너 설마.”
마르셀이 황당하다는 듯 아라벨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라벨. 너, 여자를 좋아했어? 그래서 결혼을 미루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아라벨 또한 어이가 없어졌다.
“그런 거 아니야. 어쨌든 오라버니는 그 여자랑 절대 결혼 못 해.”
이미 결혼했으니까.
지금 남편도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뭐, 좋다니까 굳이 말을 얹지 않겠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덜떨어지는 제 오라비를 붙인다? 그냥 평생 이름도 모른 채 찾아다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보다 오라버니.”
도도한 표정을 지은 아라벨이 날카롭게 마르셀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가 오라버니를 올려다보게 하는 일을 만들지 마.”
강한 힘으로 마르셀의 허리가 훅 굽어지면서 아라벨과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마르셀은 순간 그녀의 기백에 눌리고 말았다.
제아무리 본모습이 하찮은 쥐와 닮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와 차원이 다른 힘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될 몸이니까.”
아라벨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
“아빠, 아빠, 아빠!”
오로라가 비명을 지르듯 조제프를 부르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오늘 튜베로즈라고 불리는 귀부인들의 사교 클럽에 자신만만하게 입장했다.
다들 나를 추앙하기 위해 불렀구나.
그런 근본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빠아아악!”
“우리 공주님!”
세 살배기의 울음처럼 오로라의 외침이 저택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놀란 조제프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집을 나가기 직전만 해도 예쁘장하던 아이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공주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게…….”
자상한 아빠의 얼굴을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오른 오로라가 울먹거리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얼굴은 그냥저냥 볼만하네요.”
“볼만하다니. 부인께서도 나이가 들더니 평가가 후해지셨군요.”
“그러게요. 저는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줄 알았어요.”
흔한 외모라고 돌려 까이고.
“용기는 가상하죠.”
“설마 황자님을 만날 때도 이런 복장으로 간 건 아니죠?”
“맞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최신식 유행하는 복장…….”
“세상에.”
“유행하면 찍어낸 듯 비슷한 복장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보다 머리는 어디서 했나요? 빨리 알려주세요!”
“예쁘죠? 어디냐면…….”
“꼭 피해야겠어요.”
“맞아요. 끔찍해요.”
“최악.”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멜칸 백작이었나. 그분이 영애의 아버지죠?”
“네, 네. 맞아요.”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요. 좋지도 않고요. 게다가 멜칸이면 클로이 멜칸이 있던 가문이군요.”
클로이 멜칸?
자신의 고모인 것도 모르고 오로라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 여자가 조금 유명하긴 했죠. 가문의 평판도 다 깎아 먹고. 어쨌든 이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않겠어요?”
그들은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로웨인 부인이 황자님과 부도덕한 관계를 가진 걸 숨겨줄 테니 결혼해 달라고 협박했다고 알고 있어요.”
“혀, 협박이라니요!”
“그게 협박이죠. 남의 약점을 쥐고 뭔가를 요구하는 것.”
부인들이 눈을 빛냈다.
평소 오로라가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망상증을 앓고 있다고 하나 그래 봐야 이제 막 성인이 된 하룻강아지였다.
그들의 기백을 이겨낼 리 없었다.
“그래서 저희도 협박을 하려고 해요.”
부인 중 하나가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입 한번 잘못 벙긋거리면 다신 제도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영애의 아버지인 멜칸 백작에게 그만한 거금을 빌려준 게 누구라고 생각해요?”
“네, 네?”
오로라가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다.
“포도주 사업을 한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 갔잖아요. 딸이 황태자비가 된다고 어찌나 떠들던지.”
피식-.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졌다.
포도주 사업?
가문의 일이건만 정작 오로라만 모르는 얘기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영애가 말실수라도 하면 영애뿐만 아니라 백작마저 바로 처단할 사람들이니.”
오로라는 주변을 쭉 둘러봤다.
그중 빅토리아 로웨인도 있었다.
모두가 한패인 것이다.
오로라는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귀부인들에게 고상한 언어로 잔뜩 두들겨 맞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