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훌쩍.
오로라가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난 그저 황자 전하께서 날 좋아해서 받아준 죄밖에 없는데!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아!”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된 문장이었다.
일단 마르셀은 오로라한테 관심이 없었다. 오로라는 그런 그를 협박해 겨우 혼담을 나눈 사이가 됐고.
그러나 오로라는 마르셀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남자는 없었으니까.
“있잖아. 막 아빠의 돈줄을 자기네들이 잡고 있다면서 나한테 협박했어!”
“뭐? 그 부인들 이름이 어떻게 되니.”
“몰라!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다들 내 험담을 하느라 바쁘던데 그런 여자들 이름까지 외워야 해?”
“아니, 우리 예쁜 공주님이 기억할 필요는 없지.”
오로라는 모른다고 했지만, 조제프는 어느 가문의 부인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런데 포도주 사업은 무슨 얘기야?”
오로라가 순진하게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빠의 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교 모임에서 소외됐던 것이 상처로 남아 질문해 봤다.
“우리 공주님은 그런 복잡한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딸아이에게만큼은 다정한 아버지였던 조제프가 오로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널 조롱했던 부인들이 곧 네 발밑에 기게 될 일만 남았으니까.”
“정말?”
“그래.”
조제프에게는 이번 투자로 크게 한탕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퀸 상단에서 포도주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가 뒤늦게 퍼졌다.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당연히 너도 나도 포도주 사업에 투자하려고 돈다발을 흔들었다.
당장 이 사업의 가치는 조제프가 투자했을 때에 비해 다섯 배가 뛰었다.
‘퀸 상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열 배. 아니, 열 배는 무슨. 스무 배까지도 뛰겠지.’
황제에게 뇌물을 바치고, 무릎을 꿇었다.
자신을 영 탐탁지 않게 보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몇 번 더 드나들면 아무리 황제라 해도 마음을 돌릴 터.
돈 앞에서 장사 없다고, 그 노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교적 저점 구간에 투자해 성공한 조제프는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제프에게 날아온 소식은 장밋빛도, 황금빛도 아니었다.
그냥 벌레였지.
***
수많은 인부들이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하트 공작저를 찾아왔다.
그들은 똑같이 생긴 나무 상자를 한 아름 내려놓았는데,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이내 정체를 깨닫고 반색했다.
심지어 사랑스러운 작은 마님께서 저택의 사용인 모두에게 전하는 선물이라고 했다.
작은 마님이 주는 건 동화 한 닢짜리라도 눈물을 콸콸 흘리며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동화 한 닢을 훨씬 상회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성별을 불문하고 크게 기뻐할 만한 선물이었다.
“역시 작은 마님이셔!”
“어떡해.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우시니. 공자님께서는 작은 마님과 결혼한 걸 평생 축복으로 생각해야 해!”
“들어보니까 작은 마님이 공자님 얼굴에 홀딱 반해서 결혼했다던데. 공자님께서는 평생 그 얼굴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응, 응. 맞아, 맞아.
집사와 하녀, 하인 그리고 기사들에게 선물이 전달될 때마다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저택이 한창 축제 분위기일 때.
남에게 원체 무관심한 카라얀 또한 헉슬리를 통해 뒤늦게 이 소식을 듣게 됐다.
“이게 뭔데?”
“사과주입니다. 작은 마님께서 일인당 한 병씩 나눠주셨죠.”
헉슬리가 사과주를 꼭 안았다.
“옛날에는 평민들이나 마시는 거라면서 무시를 많이 당했는데, 요즘 포도 농사가 난리 나지 않았습니까.”
“…….”
“필록세라? 그런 병균 때문에 포도가 싹 다 죽어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사과주는 없어서 못 구한다고요.”
헉슬리가 루미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한 채 열정적으로 말했다.
정확히는 사과주를 마시게 돼서 기쁜 거지만.
헉슬리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카라얀이 말했다.
“저택 사람들 모두에게 줬다고?”
“네.”
“내 거는?”
“네?”
“내 거는 없냐고.”
순간 헉슬리는 할 말을 잃었다.
저택에서 지내는 사람들 모두가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딱 두 사람.
제외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루키우스와 카라얀이었다.
“그……. 저같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주신 것이니 그럴 수 있죠. 공자님께는 평소에 애정을 많이 주시니 된 것 아닙니까!”
“애정이라…….”
카라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망했다.
헉슬리는 자신이 잘못된 주제를 언급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카라얀을 달랬다.
“싸우신 겁니까? 그럴 수도 있죠. 원래 그때는 다 그런 겁니다.”
하지만 헉슬리의 위로는 카라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루미나에게로 달려가듯 걸어갔다.
벌컥-.
문을 여니 루미나가 책상에 사과주 한 병을 세워둔 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무척 열중해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그녀를 보며 카라얀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한테는 왜 아무것도 안 줘?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노크하듯,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제야 기척을 느낀 루미나가 그를 올려다봤다.
“또 몰래 마시려고?”
“아뇨! 제 게 아니에요.”
‘퀸’이라는 로고가 찍힌 사과주에는 보라색 리본이 예쁘게 묶여 있었다.
병의 크기나 디자인이 헉슬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카라얀은 루미나가 열심히 쓰고 있던 편지를 힐끔 보았다.
절대 일부러 훔쳐본 건 아니었다.
그저 익숙한 글자가 눈에 띈 것뿐이지.
[아라벨 황녀님께.]
편지지의 맨 위쪽에 앙증맞은 필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라벨 거야?”
“네. 요즘 황녀님께서 바쁘시잖아요. 힘내라는 의미도 있고, 생각해보니 생일날 따로 선물을 드리지 않은 거 있죠.”
“생일이 언젠데. 몇 달 지났잖아.”
“겸사겸사죠.”
아라벨은 마르셀과 황위를 두고 다투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런 그녀를 응원한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의미는 좋은 선물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황녀까지 포도주 대신 사과주를 마시게 되면 귀족들도 거부감을 덜겠지.’
아라벨은 루미나에게 제법 호의적인 편이었다.
선물 받은 사과주를 버리지 않고 꼭 마시리라.
그러면 사과주 판매에도 도움이 되겠지.
모든 계산을 마친 고도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면 일종의 친목 도모였기 때문에 카라얀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넌 아라벨이 황제가 됐으면 좋겠어?”
“음.”
아라벨이 좋은 황제감인 것 같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내가 대처를 잘해서 그렇지, 그동안 황녀님께 당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그럼에도 아라벨을 응원하는 이유는 마르셀 또한 훌륭한 군주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부녀랑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가 얼마나 좋은 황제가 되겠어.’
사적인 일이니 군주로서의 자질과 별개로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불륜은 엄연한 범죄였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배신이었고.
‘마르셀 황자가 황제가 돼서 얼마나 훌륭한 치세를 펼치는지 경험해 봤으면 평가는 또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죽을 당시에 마르셀 황자는 겨우 황태자가 됐었지.’
마르셀, 엘리엇, 아라벨.
셋 중 완벽한 차기 군주감은 없었다.
하지만.
“미안해.”
“…….”
“예전에…… 내가 널 일부러 괴롭힌 거.”
루미나는 아라벨의 진심이 담긴 사과를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레기온이 황제가 되면 레기온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루미나는 셋 중 어떤 사람이 황제가 돼야 좋은지 알지 못했다.
겪어보지 않은 미래였으니까.
어쩌면 셋 다 좋은 황제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아라벨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런데 카라얀 님. 혹시 저한테 용건 있으세요?”
“아, 아니.”
루미나의 미소를 멍하니 쳐다보던 카라얀이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다.
아라벨한테도 주는 선물.
나한테는 왜 안 주냐고 치졸하게 물어볼 수 없는 법이었다.
카라얀은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미나를 붙잡지 못했다.
“저는 따로 일이 있어서.”
편지와 사과주를 챙긴 루미나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녀에게 편지와 함께 사과주를 건네주고 외출 준비를 했다.
사과주를 선물 받은 하인들이 들뜬 목소리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필록세라’라는 단어가 들렸다.
필록세라.
포도나무 뿌리에서 기생하는 벌레의 이름이었다.
‘이 벌레 때문에 제국의 모든 포도 농사가 쫄딱 망해버리지.’
필록세라는 포도주 산업의 재앙이었으며 이 때문에 한동안 포도주 산업이 암흑기를 맞이했다.
루미나가 죽기 전까지도 필록세라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나가다 들은 얘기로는 이 벌레가 포도보다는 장미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때문에 벌레가 생기면 장미부터 피해를 입어 잎 색이 바뀐다고.
실제로 포도밭 주변에 장미를 둔 퀸 상단만이 포도나무를 살릴 수 있었다.
‘장미가 완전한 해결책이 돼 주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이번 사태로 퀸 상단이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는 것.
루미나가 불쑥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 자신이 없다.”
“작은 마님. 무슨 자신이 그렇게 없으세요?”
깜짝 놀란 하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게…….”
머뭇거리는 척하던 루미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망할 자신이 없네.”
***
“아빠, 이게 무슨 일이야.”
오로라가 불안에 떨며 말했다.
항상 화려하게 입고 다니던 그녀는 현재 장신구 하나 찾을 수 없는 단출한 차림새였다.
“나 무서워.”
부녀는 현재 골목에 숨어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오로라가 자꾸 조제프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쉿!”
조제프가 역정을 내듯 대꾸했다.
한 번도 제게 목소리를 높인 적 없는 아빠였다. 깜짝 놀란 오로라가 “아, 알겠어.”라고 하며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오로라를 달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채권자들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으니까.
‘이게 현실일 리 없어.’
조제프는 현실을 부정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승승장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 만에 필록세라라는 벌레가 창궐해 포도주 사업이 쫄딱 망해버렸다.
황제에게 뇌물을 바치느라 돈 빌릴 구석이 있으면 전부 끌어다 써서 돌려막기조차 불가능했다.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건 한순간이었다.
워낙 거금인 탓에 쉽게 갚을 수도 없건만 다들 당장 갚으라고 난리였다.
결국 압박을 못 이긴 조제프는 오로라를 데리고 도망쳤다.
끈질기게 자신을 찾아내려 하는 채권자를 피해 달리다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찾지 못하게 골목에서 쭈그려 앉아 있으니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질끈 눈을 감았는데.
“와, 숙부님 아니에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적의가 없는 터라 마음 한편으로 안심한 조제프가 살며시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역광 탓에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은 제 누이를 쏙 닮은 밀빛 머리칼을 본 순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루미나!”
루미나가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조제프와 오로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