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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27)화 (127/152)

조제프는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맞이한 것처럼 루미나의 이름을 외쳤다.

천사를 만난다 해도 이보다 기쁘지 않으리라.

이제껏 연락을 취하면 무시로 일관하던 그 루미나가 제 앞에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루미나. 잘 지냈니?”

조제프가 알기로 자신이 돈을 빌린 사람들과 루미나는 조금의 접점조차 없었다.

돈 문제로 루미나가 자신을 채권자 앞으로 끌고 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네, 숙부님.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저는 잘 지냈는데, 숙부님께서는…….”

지금 조제프와 오로라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루미나는 뒷말을 잇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루미나. 이런 으슥한 곳까지는 웬일이냐.”

“지나가는 길에 숙부님이 보이길래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따라왔네요. 그런데 언제부터 제도에 계셨나요?”

“조금 됐지.”

얘기가 나온 김에 조제프가 그동안의 의문을 황급히 말했다.

“네가 혼인한 후에 꾸준히 연락을 했는데 한 번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더구나.”

“정말요?”

루미나가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몰랐어요. 어떡해. 아버님이 중간에서 손을 쓰셨나 봐요.”

‘아버님, 죄송해요! 잠깐 악역 좀 하세요!’

루미나가 속으로 루키우스는 듣지 못할 사죄를 하는 동안 조제프는 살짝 찜찜한 마음을 억눌렀다.

제 편지를 못 받은 것은 하트 공작의 입김이라 쳐도, 루미나가 자발적으로 연락한 적 또한 없었다.

게다가 루미나는 상상도 못 할 또라이 짓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했다.

조제프가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루미나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죄송해요.”

“……!”

루미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옛날에 그런 식으로 숙부님을 보낸 이후에 후회를 많이 했어요.”

눈을 내리깐 루미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사실 지금도 이혼을 생각 중이거든요.”

“공작님과 사이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공작님도, 공자님도 레기온이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죠. 게다가…….”

“게다가?”

루미나가 눈물을 훔치며 듣는 귀가 없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제 목숨을 노리는 것 같아요. 아니, 이미 노리고 있어요.”

루미나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루키우스의 전적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조제프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만큼 루미나가 겁에 질려 있기도 했다.

“어릴 적에 숙부님을 따랐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했어요.”

“…….”

“그래서 숙부님을 보자마자 호위 기사들까지 따돌리면서 온 거예요.”

“그래. 지금이라도 현명한 선택을 하려는 거면 됐다.”

조제프는 루미나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

어릴 적이야 멋모르고 치기 어린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후회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제 앞에 나타난 루미나는 구명줄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너를 도와줄 상황이 되지 못하는구나.”

“네? 숙부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게 말이다…….”

조제프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얘기를 끝마친 그는 루미나가 자신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말하길 기다렸다.

“제가 숙부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시!

신은 있었다.

조제프는 적어도 행운의 여신이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다.

인생이 시궁창에 박히는 줄 알았더니 딱 때맞춰서 저를 도와주겠다는 루미나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저를 따라오세요.”

조제프는 순순히 루미나를 따라갔다.

그러나 루미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여기는.”

조제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

“루미나, 이러는 게 맞는 거냐?”

“네, 그럼요.”

언제 울었냐는 듯 루미나가 미소 지었다.

“합법으로 운영하는 곳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하지만…….”

“숙부님께서 빚을 갚아야 한다면서요. 듣자 하니 한두 푼도 아니던데 이곳만큼 한탕 하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어요.”

루미나가 조제프와 오로라를 데리고 온 곳은 바로 도박장이었다.

“나는 네가 날 도와줄 줄 알았는데.”

조제프는 루미나에게 지금 거금을 그냥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루미나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혼인한 몸이잖아요. 사재는 모두 품위 유지비용으로 나가는 데다 랑슈스 가문의 돈은 이제 엔디미온의 것이에요.”

“엔디미온을 설득하는 건 어떠냐.”

“엔디미온은 혈연이었던 테레사 고모님이 힘들 때도 냉담하게 반응했던 아이인걸요. 설득한다고 해서 넘어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랬었지.”

“그렇다고 제가 아버님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이제껏 조제프를 쫓아냈던 루키우스였다.

선뜻 거금을 내어 줄 리 없었다.

“일단 제가 지원해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이 정도예요.”

루미나가 수표에 숫자를 적었다.

큰돈이라면 큰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빚을 진 조제프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금액이 아니었다.

조제프의 못마땅한 표정을 읽은 루미나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편히 지낼 거처를 제공하고, 신변을 보호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신변 보호는 몇 달이 한계일 거예요.”

“…….”

“제가 모든 빚을 갚아드릴 수 없으니 임시방편인 거죠.”

“루미나. 나는 자신이 없구나.”

“어떤 자신이요?”

“도박이라고 하면 흔히들 잃기만 한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좀…….”

“왜 잃을 생각을 하세요? 저기 보세요. 지금도 돈을 딴 사람들이 있잖아요.”

루미나가 고개를 돌려서 도박장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선택 한 번으로 일희일비하고 있었다.

“행운의 여신이 숙부님을 향해 웃고 있을 거예요.”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아무리 합법이라 해도 도박은 도박이다 보니 껄끄러움이 남아 있는 듯했다.

조제프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돈은…….”

“빚이 많으시니 부담 되겠죠. 갚으라고 말하지 않을게요. 온전한 숙부님의 돈이에요.”

조제프는 여전히 떨떠름했지만 갚지 않아도 될 돈이라고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

그런 생각으로 게임에 참여했다.

결과는 좋았다.

가볍게 돈을 딴 것이다.

배팅했던 돈이 단번에 다섯 배로 늘어났다.

“루미나! 네 말대로 행운의 여신이 날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구나!”

흥분한 조제프가 열성적으로 말했다.

루미나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다 그렇지.’

루미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돈을 잃지 않고 딴다.

초심자의 운이다.

그리고 그 맛을 잊지 못하면 이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네 말대로 금방 한탕 하고 빚을 갚을 수 있겠어. 우리 공주님도 잠깐만 기다리렴! 이 아빠가 또 돈을 따고 올 테니까.”

조제프가 다음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가고, 오로라는 도박에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심심했는지 한참이 지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까?”

“금방 끝날 거야.”

거짓말이었다.

루미나는 조제프가 곧잘 했던 친절한 사람인 척을 했다.

“아, 소개가 늦었네. 나는 루미나야. 루미나 폰 하트.”

“오로라 멜칸이야. 나는 사촌이 있다는 것도 오늘 알았어.”

“그럴 수 있지.”

“있잖아. 사실 널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빠가 너무 무서워 보였거든. 그런데 이곳에 온 뒤로 웃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조제프의 미소를 보고 오로라는 조금 안심이 된 듯했다.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그리고 저기 봐. 저기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나한테 반했나 봐. 네가 봐도 그렇지?”

“으응, 그러네.”

이런 얘기도 하고.

“루미나. 너는 살면서 너무 많은 남자들이 날 좋아하는 탓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있어?”

“…….”

“없구나.”

이런 얘기도 하면서 말이다.

“남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르셀 전하와의 일은 안타깝게 됐어. 혼인 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된 거잖아.”

“아아, 그거.”

오로라가 다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딱히 아깝지도 않아. 마르셀 전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거든.”

“……그렇구나.”

루미나는 오로라가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차라리 무산된 게 잘된 일일 수도 있어.”

“왜?”

“마르셀 전하께서 날 좋아한다고 하지만 부인들의 등쌀이 심하거든.”

“부인들? 황후 폐하께서는 오래전에 작고하셨잖아.”

그리고 황후를 뜻하는 거면 ‘부인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터.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 귀부인들의 모임에 초대받았는데, 분위기가 되게 심상치 않았거든.”

“…….”

“내가 봤을 때 다들 전하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 같아. 그래서 전하가 사랑하는 날 시기한 거지!”

“그렇고 그런 사이?”

“사귀었던 사이 말이야!”

오로라가 듣는 귀를 의식한 건지 다소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모임 이름이 뭐야?”

“튜베로즈? 그런 이름이었어.”

로웨인 부인과 마르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루미나는 짚이는 게 있었다.

‘이거 잘만 하면 누워서 마들렌 먹기만큼 쉽게 일이 풀리겠는데?’

“아, 참. 비밀이야! 알겠지? 그 부인들이 아빠한테 돈 빌려줬다고 생색내는 거 있지. 이 얘기를 남한테 하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면서 말이야.”

“…….”

“일단 네가 아빠를 도와주고 있으니까 얘기해 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루미나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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