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나에게.
사과주는 잘 받았어. 생각보다 괜찮아서 100박스를 더 구매했지.
아, 착각하지 마.
네가 선물해 준 거라서 마음에 든 건 절대, 절대, 절대절대 아니니까!]
분명 편지에 음성지원 같은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활자를 통해서 아라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내 첫째 오라비도 관심을 보였지.
제 돈 주고 사 마시면 될 것이지, 괜히 내 근처를 얼쩡거린다니까?
같은 목표를 두고 경쟁을 하는 사이가 되니까 위기의식이라도 느꼈나 봐. 웃기지도 않아.
자꾸 견제하려고 드는데 어쩌면 이 편지도 첫째 놈이 몰래 읽으려고 들지 모르지.
하지만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렴.]
아라벨의 편지에는 선물한 사과주에 대한 감사가 반, 1황자인 마르셀에 대한 욕이 반이었다.
그녀가 마르셀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패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던 루미나는 결단을 내리고 펜을 들었다.
[황녀님. 혹시 그거 아세요?]
편지를 쓰는 루미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
제도 중심에 위치한 한 카페.
음료 잔을 쥔 채로 오로라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자꾸 불러내서. 하지만 내가 제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너밖에 없거든.”
“아니야, 편하게 얘기해도 돼.”
맞은편에 앉은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우리는 사촌이잖아.”
조제프가 도박장에서 상주한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 오로라는 그 성격을 죽이지 못하고 사교 모임이라면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었다.
오로라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는 루미나는 그녀가 모든 모임에서 거부당했다는 것 또한 알았다.
‘파산 직전인 데다 황자 전하와의 혼인을 진행하다가 황제 폐하한테 제대로 찍혔으니 다들 기피할 만하지.’
심지어 오로라의 성격이 싹싹한 편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 그녀를 만나주는 사람은 루미나가 유일했다.
“오늘도 일이 있었거든.”
“어떤 일?”
“아빠가 나한테 언성을 높였어.”
오로라가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아빠, 이제 돌아가자.”
“…….”
“아빠!”
“참을성 없게 굴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라! 곧 있으면 널 호강시켜 줄 수 있으니까!”
요즘 조제프는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도박에 빠졌다.
초반에만 이익을 보고 점점 잃는 돈이 많아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 갖고 있던 돈을 몇 배로 불렸던 그 짜릿한 순간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창 도박을 하다가 돈이 바닥나면 루미나에게 연락했다.
그러면 루미나는 조제프에게 딱 도박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쥐여줬다.
‘그 돈을 빚 갚는 데 썼다면 좋았을 텐데.’
도박의 위험성이었다.
사람한테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것.
“내가 말을 시켜서 망했다면서 막…….”
오로라가 울적해했다.
“아빠가 나한테 진짜로 화내는 건 처음 봤어.”
오로라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루미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악마나 마찬가지건만, 딸인 오로라한테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였으니까.
“네가 아빠한테 그만두라고 말하면 안 돼? 그곳을 소개해 준 사람도 너잖아.”
“오로라.”
가만히 오로라의 얘기를 듣던 루미나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숙부님께서는 숙부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거야. 요즘 집안 상황이 어렵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으응, 그렇지. 그렇긴 한데.”
“너한테 마땅한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나도 지금 상황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당장만 해도 내 선에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을 숙부님께 최대한 지원하고 있잖아.”
“응, 알고 있지.”
오로라는 루미나를 전적으로 믿었다.
모두가 그들을 외면할 때 루미나만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제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오로라, 혹시 그 뒤로 또 튜베로즈라는 모임의 초대장이 네게 왔니?”
“아니. 대신 지난번에 받은 초대장을 겨우 찾을 수 있었어. 여기.”
오로라가 초대장을 건넸다.
그러면서 은밀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응, 내가 최대한 손써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나만 믿어.”
최근 오로라는 튜베로즈 모임에서 본 부인들을 알려줬다.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니 루미나가 귀부인들의 초상화를 보여주면 기억나는 얼굴을 알려주는 식이었다.
“그 사람들이 나한테 엄청난 모욕감을 줬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복수해야 해!”
자금줄을 잡고 협박하는 데다 명망 있는 귀부인이 한둘도 아닌 여럿이었다.
오로라는 돌아올 응징이 두려워서라도 분한 마음을 꾹꾹 눌러야 했다.
그런 와중에 루미나가 알아서 처리해 준다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서 나오자 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루미나를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대화는 끝났어?”
“네, 카라얀 님.”
루미나를 데리러 온 카라얀이었다.
후다닥-.
그런데 카라얀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째서인지 오로라가 루미나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루미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오로라?”
“루미나. 그, 둘이서만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응? 그래? 죄송해요, 카라얀 님. 제 사촌이 할 얘기가 남았다고 하네요. 잠시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래.”
오로라한테 루미나를 빼앗긴 카라얀이 살짝 못마땅한 눈빛으로 오로라를 쏘아봤다.
흠칫 몸을 떤 오로라는 루미나를 다소 외진 골목으로 끌고 가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남편 말이야.”
“카라얀 님 말하는 거지?”
“응, 그분이 자꾸 나한테 치근덕거리는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루미나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오로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꾸 나를 쳐다보잖아.”
카라얀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거다.
오로라한테 루미나를 빼앗긴 것 같아서 노려봤을 뿐이니까.
“쳐다볼 수는 있는 거잖아.”
“아니, 그냥 보는 거랑 다른 의미의 시선이야. 루미나. 너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지? 연애 경험이 많으면 다 알게 돼 있어.”
“…….”
“원래 이런 얘기는 잘 하지 않으려고 해. 하지만 너와 사이가 어색해지는 건 싫어서 말이야. 너는 내 사촌이고 또 도움을 많이 주는데 이런 일로 틀어지면 곤란하잖아.”
“……그렇지. 그러면 너는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최대한 네 남편이 나와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겠지.”
오로라는 카라얀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다.
둘 사이에 어떤 징조도 없었는데.
루미나는 그 모습을 보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인 조제프와 함께 몰락해도 미안하지 않을 테니까.
***
오로라는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도박장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문에 아버지인 조제프와 함께 있지 않고 되도록 또래 영애들과 함께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모임을 가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렸다.
‘나는 빚을 갚을 방법을 다른 방식으로 찾고 있는 거야.’
이런 자기합리화와 함께.
또래 영애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다녔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그녀는 마침 공원에 나와서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영애들을 발견했다.
“여기서 뵙네요! 지난번에 인사를 나눴는데…….”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오로라를 알아본 영애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오로라가 다급하게 외쳤다.
“여, 영애들이 모르는 얘기가 있어요!”
“모르는 얘기요?”
“하트 공작가와 관련된 얘기예요.”
하트 공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하나둘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회를 잡은 오로라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공자비와 사촌이잖아요.”
오로라는 당당하게 루미나를 팔았다.
하트 공작가라면 워낙 바깥에 나도는 얘기가 없는 탓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영애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로라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줬다.
오로라는 갖고 있는 패를 보이는 순간 제 자리가 사라질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자꾸 다른 얘기를 했다.
한 영애가 참다못해 오로라를 재촉했다.
“하트 공작가와 관련된 얘기는 무엇이죠?”
“이건 비밀인데…….”
꿀꺽.
다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오로라를 쳐다봤다.
“사실 하트 공자님께서 저를 좋아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기대가 팍 식어버렸다.
“제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
오로라가 한사코 부정했다.
어째서 하트 공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오로라의 얘기를 듣는 영애들 사이에는 마침 에블린과 레아가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둘은 작게 속닥거렸다.
“지금 저게 무슨 소리야?”
“루미나 님한테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이거…….
에블린과 레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심각한 사안인 것 같지?’
***
카라얀이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은 은밀하고도 빠르게 퍼졌다.
당연히 루미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또한 루키우스의 귀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