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접한 루키우스는 조용히 루미나를 불렀다.
“내가 교육한 적은 없다만 내 아들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 인물은 아니다.”
“…….”
“게다가 뒷조사를 해보니 상대와 접점이 없더구나. 너희들의 일이니 내버려두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어조가 음산했다.
“당장 처리해야…….”
“자, 잠깐만요!”
루미나가 다급히 루키우스의 말을 끊었다.
“지목당한 상대는 제 사촌인 오로라. 맞죠?”
“그래.”
“그렇다면 아버님께선 이 일을 모르는 척해 주셨으면 해요.”
“어째서?”
루키우스는 영 못마땅해했다.
만약 루미나의 사촌이 아니었다면 의견을 묻지도 않고 쓱싹해 버렸을 거다.
“헛소문이니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게다가 두 사람의 접점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그러니 모른 척해 주세요.”
“하지만 이런 소문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불미스러운 일이다. 네게 불명예가 되는데 정말로 가만히 있길 원하는 거냐?”
“네.”
굳이 루키우스가 손쓸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들을 잡을 덫은 완벽히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속내를 숨긴 루미나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루미나의 초롱초롱한 눈과 마주한 루키우스가 한숨처럼 뒷말을 중얼거렸다.
“내 며느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착하군. 너같이 순진한 애를 누가 하트 공자비라고 생각할지.”
루미나의 검은 속내를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루미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카라얀 님은 이 소문을 모르세요. 저도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고요.”
“알겠다. 카라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 시키겠다.”
척하면 척 알아듣는 루키우스는 루미나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
카라얀이 오로라와 불륜을 저지르는 중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루미나에게도, 루키우스에게도 들렸다.
그 말은 다른 사람도 충분히 접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루미나!”
루미나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라벨이 거친 콧김을 뿜어대며 다가왔다.
원칙대로라면 그녀는 접견실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얼마나 급한 건지 본궁 앞까지 나와 루미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의 별인 아라벨 황녀님을…….”
“들었어. 그 자식의 불륜 상대가 네 사촌이라며.”
차기 황제가 될 준비를 하며 소문에 민감해진 아라벨 또한 그 헛소문을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소문을 접하자마자 공작저로 찾아오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막느라 진땀을 뺐지.’
그녀가 저택에서 난리를 치면 카라얀의 귀에도 이 얘기가 들어갈 테니 필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루미나는 아라벨을 직접 만나기 위해 입궁했다.
“잘못된 소문이에요.”
“잘못? 에블린과 레아가 내게 와서 직접 그 얘기를 들었다고 했어! 네 사촌, 어찌나 신이 났는지 가는 모임마다 비밀이라고 하면서 매번 그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
“정말요?”
루미나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속없어 보였나 보다.
아라벨이 새침하게 흘겨봤다.
“넌 무슨 애가 자꾸 생긴 것처럼 구니. 그 사촌을 만날 일이 생기면 뺨이라도 때려.”
“네. 그럴게요.”
루미나가 선뜻 긍정했다.
하지만 아라벨은 믿지 않는 듯했다.
한때 그녀의 전속 시녀와 머리채 잡고 싸운 전적도 있건만.
루키우스도, 아라벨도 자꾸 루미나를 마냥 순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애의 머리채를 더 오래 잡아당겼어야 했는데.”
“머리채요?”
“흐흥, 그런 게 있어.”
아라벨이 슬쩍 루미나의 시선을 피했다.
“걔 머리가 잡기 좋게 생겼잖니. 너 때문은 아니고, 그냥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던 거야.”
그런 얘기를 나누며 루미나와 아라벨이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맞은편이 소란스러웠다.
고개를 돌린 루미나는 남성 귀족들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40, 50대쯤 되는 중년의 귀족들로 그들의 중심에는 마르셀이 있었다.
“으.”
그들을 보자마자 아라벨이 질색하며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측 귀족이 아라벨을 먼저 아는 척했다.
“아라벨 황녀님 아니십니까. 요즘 교우 활동도 하시고,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한가하신가 봅니다.”
“친목 또한 황제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지.”
“허허. 황녀님의 나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라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편 귀족이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 취급했기 때문이다.
마르셀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귀족들은 1황자파였다.
이미 정치적인 유착 관계가 형성된 시점에서 아라벨이 황위 쟁탈전에 끼어드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같잖은 시비를 걸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아라벨이 잘 알고 있었다.
“자네들과 오라비가 하는 건 국가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일이고, 나는 사적인 친목이다? 참으로 재미있군.”
아라벨이 살벌하게 그들을 쳐다봤다.
기세에 눌린 귀족들이 움찔했다.
“굳이 신분의 급을 따진다면 자네들보다 내 옆에 있는 이 한 명이 더 대단한 인물이 아니던가. 하트 공작가의 사람이니 말이야.”
“…….”
“그런데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말인가?”
루미나가 사교 활동을 잘 하지 않은 탓에 곧바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라벨의 성년식은 가면무도회로 진행됐고.
하트 공작가를 입에 담으니 그제야 하나둘씩 아는 척을 했다.
그 와중에 루미나를 알아본 마르셀은 줄곧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루미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반듯한 자세로 인사했다.
“제국의 별을 뵙겠습니다. 루미나 폰 하트입니다.”
그 소개를 듣고 마르셀은 넋이 나갔다.
“하트 공자비라고?”
그러니까 자신이 첫눈에 반한 여성이 약혼도 아닌 결혼을 했다고? 그것도 이미 오래전에?
“네, 맞습니다. 황자 전하.”
확인 사살 당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던 아라벨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말했지. 내 거라고.”
아라벨이 당당하게 루미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퍽 얄미웠지만 마르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 귀족들 또한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아라벨이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당연하게도 옆구리에는 루미나를 낀 채였다.
“하트 공자비였다니. 대외적인 활동을 잘 하지 않아서 공자비의 얼굴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아라벨과 루미나가 사라지자 중년의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숙덕거렸다.
“그 하트 공작가에서 용케 잘 지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여인이 레기온들 사이에서 잘 지낸다니.
심지어 기가 센 아라벨이 옆에 있어서 루미나의 순한 외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 봤자 최근 하트 공자가 다른 여자와 외도한다는 소문이 돌지 않습니까.”
“외도라니. 어떻게 그런 일을.”
“레기온은 사랑을 모른다더니 순 거짓말이었군요.”
외도는 범법 사유였다.
명확한 증거만 있다면 이혼은 물론 거액의 위자료까지도 뜯어낼 수 있었다.
귀족들은 당사자 앞에서는 못 할 얘기를 저들끼리 늘어놓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황자 전하?”
마르셀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하트 공자가…… 외도 중이라고?”
“네, 제가 아내한테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얘기가 제법 퍼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멍하던 마르셀의 눈빛이 달라졌다.
***
“오늘 대화는 제법 유익했어. 이 사안은 내가 아버지께도 말씀드릴게.”
“네, 황녀님.”
“내가 준 것은 챙겼지? 절대 몸에서 떼지 말고. 아,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는 네 사촌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도 갖고 오렴.”
“그건 조금…….”
“안 돼? 왜 안 돼? 머리채 잡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요.
아라벨이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웃고 만 루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노력 말고 행동으로 보답해. 그러면 어서 가보렴.”
아라벨과 헤어진 루미나는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런데 잘 가던 마차가 문득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아직 황궁이었다.
루미나가 창문 밖을 내다보려고 하니 문이 벌컥 열렸다.
“얘기 좀 하지.”
“황자 전하?”
마르셀이 있었다.
“전하께서 무슨 일로…….”
“그대와 당장 할 말이 있어.”
강압적인 요구였다.
사적인 얘기를 나눌 예정이었던 터라 호위도 데려오지 않은 탓에 막아줄 기사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차에서 내린 루미나는 마부에게 눈짓했다.
마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트 공자비.”
그걸 보지 못한 마르셀이 루미나를 끌고 간 곳은 으슥한 정원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용건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라벨의 성년식 날 만난 사람, 공자비가 맞지?”
루미나가 입을 열려고 하자 마르셀이 황급히 말을 끊었다.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 하지 마. 어두웠지만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저는 그날 그 무엇도 들은 적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루미나가 철벽을 쳤다.
마르셀은 절대 굽히지 않은 루미나의 모습을 샅샅이 훑어봤다.
그날 밤, 로웨인 부인과 자신의 밀담을 들은 사람은 두 명.
오로라와 루미나였다.
그런데 오로라와 달리 루미나는 제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은밀하게 소문을 흘린 것도 아니었다.
마르셀은 그녀의 그런 우직한 모습마저 마음에 들었다.
“나와 결혼하지.”
“……네?”
루미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당함이 잔뜩 담긴 눈빛이었다.
“소문을 듣지 못했나? 하트 공자는 그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하고 있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살짝 입을 뗀 루미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충격이 큰가 보군. 하지만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질 만큼 아주 대놓고 즐기는 모양이던데.”
“…….”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의 남편과 이혼하고 나와 결혼하는 건 어떤가. 레기온들 사이에서 치이며 살아갈 바에 황후가 되는 편이 나을 테지.”
“어느 분께서 황태자가 되실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마 아라벨이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마르셀이 피식 웃었다.
“그 제멋대로인 떼쟁이는 평생 어린아이처럼 살 거야. 꼭 그런 성격이 아니더라도 황제가 될 일은 평생 없을 테지.”
“어째서 그리 확신하시죠?”
“공자비도 봤을 테지. 징그럽고 천박한 쥐의 모습을. 본인이 강력한 레기온라고? 웃기는 소리지.”
“…….”
“가족끼리만 본모습을 알고 있으니 그간 그 애가 레기온을 들먹일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혼쭐이 났었어.”
마르셀이 경멸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그 모습을 알게 됐으니 웃음을 참을 필요도 없겠군.”
“…….”
“어쨌든 아라벨이 황제가 될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나와 혼인을 진행하도록 하지.”
“저는 이미 결혼한 몸입니다. 이혼할 마음 또한 없고요.”
“아, 혹시 미성년자 때 혼인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이 경우 상대가 외도를 해도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이혼이 힘들긴 하지.”
마르셀이 충분히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몇 년 남았을 테지. 하지만 그대라면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어.”
“…….”
“그동안 서로 알아가는 의미에서 맞바람이라도 피우는 건 어떤가?”
“네?”
루미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 마르셀 혼자서 이해하고, 납득하고 난리가 났다.
마르셀의 목소리에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은 상대가 기혼녀였는데도 이제껏 연애에 실패한 적 없었다.
심지어 남편이 이미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이긴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그대의 남편과 달리 난 철저하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튜베로즈라고 알고 있나?”
“튜베로즈요?”
루미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나와 연애를 즐겼던 귀부인들의 모임이지. 멤버의 숫자가 제법 되는데도 이제껏 들킨 적 없지.”
“…….”
“그대만 해도 이번에 처음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루미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마르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생각해 봐. 득이 되면 되었지, 전혀 나쁘지 않을 거야. 당장 그대의 남편만 해도 즐길 걸 다 즐기고 있는데 혼자만 정절을 지키는 게 억울하지 않은가?”
“황자님. 저는…….”
루미나가 대답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퍼억-.
마르셀의 뒤편에서 무언가 날아와 그대로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윽! 뭐, 뭐야?!”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마르셀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더는 못 들어주겠네.”
“아, 아라벨?”
여기 있어선 안 될 동생을 발견한 마르셀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냐고?”
아라벨이 큰 보폭으로 마르셀과 가까워졌다.
“맞는 말을 하니 응해 줬을 뿐이지.”
“뭐? 맞는 말?”
아라벨이 마르셀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구두 한 짝을 주웠다.
그리고 그걸 높게 들며 말했다.
“처맞는 말.”
아라벨은 뾰족한 구두 굽으로 마르셀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아프긴 엄청 아팠는지 마르셀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라벨, 네 본모습이 쥐라고 해도 쥐새끼처럼 엿듣는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폭력적인 행동은……!”
마르셀이 제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아라벨을 도발하려고 했다.
흉흉한 표정을 짓던 아라벨은 진정하려는 듯 크게 숨을 내뱉더니 침착하게 루미나를 쳐다봤다.
“루미나. 오라버니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이 작자가 처맞는 말을 하는 동안 그걸 했겠지?”
“그럼요. 황녀님.”
조용히 있던 루미나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냈다.
마도공학의 산물인 녹음기였다.
그것을 켜자…….
[가족끼리만 본모습을 알고 있으니 그간 그 애가 레기온을 들먹일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혼쭐이 났었어.]
[그동안 서로 알아가는 의미에서 맞바람이라도 피우는 건 어떤가?]
마르셀의 목소리가 어떤 잡음도 섞이지 않은 채로 생생히 재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