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기에서 제가 했던 발언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흘러나오자 마르셀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대체 이게 무슨……!”
하얗게 질린 마르셀의 얼굴이 퍽 우스웠던 터라 아라벨이 피식 웃었다.
“첫눈에 반한 상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반응이 너무 궁금하지 뭐야. 저장해두고 심심할 때마다 들으려고 루미나에게 녹음기를 선물했지. 그런데 그 순간이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이야.”
소형 녹음기는 비싼 데다 많은 음성을 저장할 수 없었다. 평범한 가게에선 팔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소형 녹음기를 구매하기 힘들뿐더러 들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혈육의 흑역사를 평생 간직하고 싶어 하는 아라벨이 곁에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제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눈치챈 마르셀이 빠른 어조로 말했다.
“하트 공자비. 그거 이리 줘.”
“오라버니. 지금 우리 찹쌀빵한테 협박하는 거야?”
“협박? 난 부드러운 어조로 권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녹음은 과한 처사야!”
달칵-.
루미나가 대답 대신 녹음기를 켰다.
[튜베로즈라고 알고 있나?]
달칵-.
[나와 연애를 즐겼던 귀부인들의 모임이지.]
마르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책이었다.
모든 상황이 제 편을 들고 있다고 착각하여 저지른 실책.
평소라면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테지만 하트 공자가 외도를 저지른다는 소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통 상대가 외도를 저지른다는 걸 알면 오기가 생겨 제안을 승낙하고는 했다.
객관적으로 자신은 매력적인 남자였으니까.
스스로의 매력을 과하게 믿었던 마르셀에게 아라벨이 경멸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쓰레기 자식.”
“…….”
“그러게 누가 유부녀한테 찝쩍거리래?”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유부녀한테 찝쩍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야?”
“하트 공자비, 설마…….”
순간 마르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가정 하나가 있었다. 그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루미나를 돌아봤다.
“아라벨한테 얘기한 건가? 그날 밤의 얘기를?”
대답은 루미나가 아닌 아라벨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얘기? 본인 입으로 줄줄 불어놓고서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라벨은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마르셀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내 성년식 이후부터 루미나를 찾았었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라벨이 루미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루미나는 아까와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전하.”
루미나는 그날 밤, 자신이 들었던 마르셀과 로웨인 부인의 밀담을 누설한 적 없었다.
아라벨에게 편지로 알린 소식도 마르셀이 찾았던 여자가 자신일 것 같다는 얘기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1황자가 알아서 제 무덤을 판 격이지.’
루미나는 말실수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라벨 황녀의 명령을 따르기만 했지.
그게 대외적으로 비칠 모습이었다.
“자, 잠깐!”
당황한 마르셀이 루미나에게서 녹음기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아라벨이 든든한 방패처럼 그를 가로막았다.
루미나에게 뻗어진 손을 갈고리처럼 낚아채 강하게 힘을 줬다.
“어디서 그 더러운 손을 대려고 하고 있어.”
“악! 아라벨,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고 나, 이고 나.”
아라벨이 얄미운 발음으로 마르셀의 말을 따라 했다. 마르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라벨!”
“쉬룬뒈.”
“아악!”
아라벨이 마르셀의 손을 잡은 채로 마구 흔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이는 행동과 달리 마르셀의 고통에 찬 비명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너 같은 쓰레기가 나와 같은 피를 이은 혈육이라니. 격 떨어져, 정말.”
“소, 손 끊어질 것 같다고!”
“끊어지라고 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음껏 마르셀을 괴롭히던 아라벨이 문득 루미나를 돌아봤다.
“아, 이건 녹음하면 안 돼.”
아라벨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되겠다고 한 이후부터 아버지께서 레기온은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된다는 걸 유독 강조하잖아.”
“…….”
“내가 바보인가. 교양 없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그럼요. 저는 살면서 황녀님처럼 교양이 넘치시는 분을 본 적이 없는걸요.”
루미나가 순진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
쾅-!
황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아라벨처럼 금이 가지 않았지만 그의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고얀 놈! 지금 무슨 망발을 지껄였는지 알기나 해?!”
한쪽 손에 붕대를 감은 마르셀이 고개를 숙이며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트 공작이 들고일어난 걸 겨우 돌려보냈다. 그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처벌을 내릴 테니 잠깐 기간을 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면서 말이다.”
“아버지. 말실수를 한 것뿐입니다.”
“말실수? 그동안 네가 방만하게 몸을 쓰고 다닌 건 말로 할 수 있는 실수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점점 더 언성을 높이던 황제가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셀. 나도 웬만하면 원만하게 이 일을 덮고 싶다.”
“아버지.”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너를 지지하던 귀족들조차도 네게 등을 돌린 상황이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말 모르겠느냐?”
마르셀을 지지하던 세력은 순식간에 와해됐다.
자신의 부인이 마르셀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전처럼 그를 지지할 수 없었다.
원수가 되면 됐지,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상황인 거다.
“네가 한두 명과 사고를 쳤다면 난감은 했겠지. 그래, 난감했을 테지만 내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익명의 제보자를 통해 튜베로즈 모임의 명단을 입수할 수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귀부인들은 외도 사실을 부정했다. 더불어 모임의 존재마저도.
“마르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 하다못해 들키지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
“아버지. 그런 모임이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오직 제 입을 통해서만 나온 얘기입니다.”
그가 이제껏 괜히 들키지 않은 게 아니었다.
외도했다는 증거를 절대 남기지 않았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끝까지 우기면 됐다.
“너무 당황해서 말실수를 했다고 일관적으로 주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저만 믿어주시면 됩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어도 이제껏 황제에게 마르셀은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은 그렇게 밀어붙이도록 하자꾸나.”
하지만.
“저 여자가 제 얼굴이 그냥저냥 볼만하다고 했어요!”
튜베로즈 모임의 초대장이 증거로 제출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또한 오로라가 자신이 당한 모욕을 적극적으로 진술하면서 모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원래라면 하트 공자비한테 수작을 부린 것만 사과하고, 그 외에는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었다.
심증은 있지만 명확한 물증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밀고 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증거가 있다면 상황은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르셀과 귀부인들이 유착 관계에 있는 것 같다는 정황이 쏟아졌다.
그동안 튜베로즈 귀부인들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고 있던 이들이 나선 것이다.
“아버지. 하마터면 귀부인들의 손에 이 나라가 좌지우지될 뻔했어요.”
아라벨이 황제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 갓난아기도 알 것 같은데 이대로 오라버니를 내버려두실 건가요?”
“……마르셀 황자를 폐위하겠다.”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공표했다.
“또한 폐위당한 마르셀 폰 렘브라나는 무기한 구금형에 처한다.”
“…….”
“추가적인 처벌은 천천히 논의하도록 하겠다.”
하트 공작이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낀 황제는 어떻게든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며 시간을 벌 수밖에 없었다.
***
루미나는 체스판을 내려다봤다.
체스의 기물들이 대부분 쓰러져 있었다.
‘마르셀 황자가 폐위됐으니 이대로라면 황녀님이 황위를 잇겠지.’
마르셀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처치했지만 아라벨의 앞길은 마냥 평탄하다 할 수 없었다.
아라벨의 평판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레기온의 모습이 쥐였으니 그녀를 비웃는 무리도 필시 존재할 터.
‘하지만 이건 황녀님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 황제의 관을 쓰는 건 내가 아닌 황녀님이니까.’
루미나는 아라벨의 책사가 아니었다.
그저 장차 좋은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폐위당한 마르셀은 복수 대상이 아니었고.
루미나는 조제프와 오로라를 떠올렸다.
이미 거미줄을 촘촘하게 쳐두었으며 목표물은 그 줄에 걸려 있었다.
도망치려고 할수록 더욱 강하게 얽힐 것이다.
검지로 하얀 킹과 퀸을 밀어버린 루미나는 그것이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체스 기물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자 창밖 풍경이 오롯이 시야에 잡혔다.
계절감을 느낀 루미나는 슬슬 실감했다.
그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이혼.”
루미나가 성인이 되면 계약은 종료된다.
‘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계약을 물러도 상관없다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됐다.
진심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란 루미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고민이 깊은 탓에 기척을 느끼지 못했나 보다. 방금 들어왔는지 카라얀이 서 있었다.
“너와 나를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요.”
루미나가 얼결에 긍정했다.
그러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카라얀은 자세한 계약 내용을 몰랐지만, 언젠가 이혼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한 번쯤은 해야 할 얘기인 것이다.
“약조했던 기간이 끝나가는 데다 억지로 밀어붙인 결혼이었으니 이제 이혼을…….”
슬슬 준비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손을 짚은 후 허리를 숙여서 루미나와 바짝 얼굴을 맞붙인 채로 사납게 말했다.
“너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걸 알잖아. 그런데 이혼?”
“…….”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