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가 없었다면 카라얀은 지금 이 자리에서 숨을 쉬고, 얼굴을 맞대며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거다.
점차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을 터.
그 사실을 고려한 루미나는 카라얀이 말하는 미친다는 표현을 폭주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괜찮잖아요. 카라얀 님은 굳이 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실제로 비가 내리는 날, 그는 인간의 모습을 멀쩡하게 유지했다.
그걸로 증명해낸 거다.
하지만 조곤조곤한 루미나의 목소리를 듣던 카라얀은 인상을 구겼다.
그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오직 폭주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써 루미나를 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대학살 날 자신을 구해 준 여인을 투영해서 본 적도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카라얀에게 루미나는 흐린 날, 비가 온 뒤 볼 수 있는 무지개처럼 찬란한 존재가 돼 있었다.
그러니 이혼을 전제로 결혼했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이혼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미나는 카라얀을 좋아한다.
없으면 안 될 만큼.
또한 카라얀도 루미나를 사랑한다.
그러니 자신이 먼저 이혼을 언급하지 않는 이상 당연히 ‘이혼’의 ‘이’ 자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 나 좋아하잖아.”
항상 당당하던 카라얀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미나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던 그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싫어진 거야?”
루미나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카라얀의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망상이 차올랐다.
“혹시 그 헛소문 때문에 그래?”
지금 카라얀은 자신이 오로라와 외도했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언급하고 있었다.
루키우스와 루미나가 최선을 다해 입막음을 했지만, 그 일로 마르셀이 폐위까지 당하면서 카라얀도 소식을 접하게 됐다.
당시 새파랗게 질린 카라얀은 곧바로 루미나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은 채 말했었다.
“내 눈에는 너만 보이는걸. 그런데 내가 다른 여자한테 마음을 줄 리 없잖아?”
카라얀이 결백하다는 건 그 누구보다 루미나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무릎을 꿇을 필요 없다고 그를 달래면서 대충 넘어갔다.
그 후로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맞바람 제안을 했던 마르셀을 최대한 잔혹하게 처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는 건 루미나는 모르는 일이지만.
부자가 유일하게 뜻이 맞았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난 한눈판 적 없어.”
“네, 잘 알고 있죠. 저번에 했던 얘기잖아요.”
카라얀은 루미나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라면 하지 않을 얘기를 기어코 입에 담았다.
“대신 질투한 적은 있어.”
“네? 질투요?”
갑자기 질투?
루미나가 어리둥절하게 카라얀을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만…….”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그의 귀가 빨개졌다.
레기온들은 인간성이 없으며 사랑을 모른다고들 한다. 하지만 루미나의 앞에 설 때면 달랐다.
카라얀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차마 제 입으로 하기 부끄러운 얘기였다.
하지만 루미나가 진짜로 제 곁을 떠날까 봐 오롯한 진심을 드러냈다.
“사과주 안 줬잖아.”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코앞에서 한 말이라 목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들릴 수밖에 없었다.
“뭐예요, 그게.”
잠깐 그 말의 의미를 되짚느라 침묵하던 루미나가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
참 사소하고 귀여운 질투였다.
이제껏 루미나가 봐 온 세상에서는 질투도, 집착도 추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그런 감정을 멀리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카라얀이 제게 보여주는 모든 감정은 꼭 제비꽃 설탕절임 같았다.
질투마저도 달고, 예쁘게 느껴졌다.
루미나는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느껴질까?
“이상하긴 했죠. 카라얀 님도 저를 바로 알아봤거든요.”
“왜 이상해? 사랑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 순간, 언젠가 아라벨과 했던 대화가 문득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거다.
“카라얀 님은…….”
“…….”
“저를 사랑하세요?”
평소 카라얀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넌 그걸 말해야 아냐면서 윽박지르듯이 언성을 높일 가능성이 지대했다.
루미나는 그리 짐작하며 이어질 카라얀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로의 호흡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만한 거리였기에 그의 표정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귀와 얼굴뿐만 아니라 목까지 잉크가 번지듯 붉어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곧이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수많은 미사여구는 없었지만,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목소리의 떨림 또한.
이혼하지 않고 평생 저와 살고 싶으세요?
이 질문도 하고 싶었지만 루미나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질문까지 하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돌아올 대답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떡해요.”
“왜, 왜?”
그의 달콤한 감정이 전염되는 듯했다. 루미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처럼 자신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제 내가 울 만큼 싫어?”
루미나가 울고 있다고 착각한 카라얀이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마저 좋았다.
루미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꾹꾹 눌러왔던 그를 향한 감정 중에서 집착과 순수한 사랑의 비중을 따지자면 사랑이 더 크다는 걸.
그리고 집착이 마냥 기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는 걸.
“카라얀 님.”
얼굴을 감싸던 손을 내린 루미나는 빠르게 제 눈높이에 맞게 허리를 숙이는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거울처럼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은 눈가가 붉었다.
아니, 눈가뿐만 아니라 뺨에도 열기가 가득했다.
어머니를 쏙 닮은 외모건만 어머니처럼 악독하다거나 징그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방금 뜬 무지개처럼 찬란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고 카라얀이 넋이 나간 그 순간-.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인 루미나가 그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
“젠장!”
조제프가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감쌌다.
그는 도박장에서 현금 대신으로 쓰이는 칩을 완전히 잃고 빈털터리가 됐다.
지금 같은 상황에 놓인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일일이 세보지 않았다.
얻기는커녕 잃기만 했으니 짜증이 솟구쳤지만 괜찮았다.
루미나가 돈을 줄 테니까.
“숙부님. 제가 숙부님께 돈을 드리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하지만 루미나를 만났을 때 돌아온 건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왜, 왜? 어째서?!”
“아버님께서 숙부님과 만나는 걸 언짢아하세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이 오로라와 외도 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 돌았잖아요.”
“…….”
“그 탓에 제가 숙부님과 접촉했다는 얘기가 돌면 제게 좋지 않은 상황이에요.”
“고작 그걸로?”
“고작이라니요. 남들이 보면 제가 남편의 외도를 응원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잖아요.”
루미나는 조제프를 빠르게 훑어봤다.
며칠 씻지 않아 기름이 흐르는 머리. 꾀죄죄한 행색. 붉은 핏줄이 튀어나온 흰자.
무엇보다 초점이 미묘하게 어긋난 눈빛은 그를 더욱 미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숙부님을 도와드리고 싶죠. 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요. 이제는 무리예요.”
마지막으로 돈을 건네준 루미나가 뒤돌아서려고 할 때.
“조금만!”
조제프가 루미나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지원해다오.”
루미나는 조제프 몰래 미소를 지었다.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사라진 미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안타까운 표정을 한 루미나가 조제프를 쳐다봤다.
“네가 몰라서 그렇다. 요즘 기세가 좋아. 이번에는 내가 기필코 큰돈을 딸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이번에 돈을 따면 되잖아요.”
“고작 이걸로 어떻게…….”
“이곳의 규칙은 간단하잖아요. 이기면 돈이 몇 배든 늘어날 수 있어요.”
“…….”
“기세가 좋다고 말씀하셨죠? 행운의 여신이 숙부님의 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조제프는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그에게 큰돈을 빌려준 귀부인들이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 남편의 명의였기에 그의 빚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여전히 갚아야 할 돈은 많았고, 지금 이 순간도 이자가 불어나고 있었다.
이전에 쌓인 이자라도 갚아야 하건만 미루고, 또 미루다 한 푼도 상환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래. 알겠다.”
“행운을 빌어요.”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루미나를 협박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조제프는 마지막으로 한탕 하기 위해 칩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칩을 전부 걸었다.
기적이 제게 와 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젠장, 젠장, 젠장!”
기적이 존재할 리 없었다.
조제프는 마지막 칩마저 잃었다.
남은 건 도박장에 오기 전보다 몇 배는 불어난 빚뿐이었다.
조제프가 한창 게임이 진행 중인 다른 테이블을 초조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처음 보는 노인이 다가왔다.
“이보게. 혹시 이곳에 자주 와서 자네를 기다리던 여자애. 딸인가?”
“보라색 머리를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노인이 웃었다.
“그러면 내게 딸을 주는 건 어떤가? 물론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이 칩을 주지.”
노인이 칩이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를 흔들며 제안했다.
현금도 아닌 도박장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칩이었다.
정말 빚을 갚을 마음이 있다면 칩이 아닌 현금을 달라고 해야 옳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귀한 딸을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난 노인에게 넘길 리도 없었다.
‘하지만 더는 루미나, 그 계집이 돈을 주지 않는다고 했지.’
심지어 그 원인은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딸이었다.
그 애가 방만하게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순간 욱해버린 조제프는 몽롱한 시선으로 칩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쳐다봤다.
눈 더미처럼 불어난 빚을 갚고 싶어서 저것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도박을 계속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그 경계가 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