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33)화 (133/152)

“네?”

박사에 대해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영 뚱딴지같았다.

2황자인 엘리엇이라니.

두 인물 사이의 접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루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사와 2황자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감시하고 있다.”

“하지만 박사는 노인이라고 하셨잖아요. 2황자님께서는 그 노인과 전혀 닮지 않았는걸요.”

“오랫동안 브랜든으로 연구와 실험을 반복했으니 혹시 모르는 일이지.”

“…….”

“흑마법은 그만큼 위험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힘이다.”

루미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토록 위험한 인물이 이제껏 유약한 사람인 척하며 근처에 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보다 노인인 박사가 브랜든의 힘으로 엘리엇이 됐다는 건 실질적으로 그가 진짜 엘리엇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닌가?

“아버님께서는 박사가 지금 엘리엇 전하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루미나. 2황자가 네게 금지된 서고를 자주 출입했다고 말했다지.”

“네.”

“큰 사고를 겪어 다리를 절게 된 아들이 아무리 불쌍해도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

“황제에게 직접 물어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오더군. 언뜻 봤을 땐 아들에게 너그러운 아버지 같았지만, 미묘하게 자연스럽지 않은 반응이었지.”

“그렇다는 건…….”

“최면이라도 건 것이겠지.”

루키우스는 박사를 향한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려고 애썼다.

“게다가 이제는 쓰지 않는 언어까지 능숙하게 읽을 줄 알고 있다면 박사일 가능성이 높다.”

“…….”

“이전까지 엘리엇 황자가 학구열이 높다는 얘기도,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도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본인이 똑똑한 걸 숨겼을 수도 있잖아요.”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째서? 제 다리를 그 꼴로 만든 첫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피식 웃었다.

“그토록 철저한 인물이 네 앞에서는 빈틈을 보였다는 것도 문제지. 루미나, 내가 한 말 잊지 않았겠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박사는 레기온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걸.

“하지만 제 동생은 평범한 인간인데 황자님께서 저보다도 좋아하는 눈치였어요.”

“네 동생이 아카데미 수석이었지. 월등히 좋은 성적이었으니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 너한테 하는 것과 달리 학문적인 대화만 나눴을 것 같은데, 아닌가?”

“……맞아요.”

루미나는 그간 엘리엇이 모두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짚어보면 유독 호의를 보인 인물은 자신과 아라벨 그리고 카라얀이었다.

셋의 공통점은-.

‘레기온이지.’

“꼭 동일인물이 아니더라도 박사의 수족일 가능성 또한 높으니 웬만하면 접촉을 피해라.”

“…….”

“하필 황족이어서 명확한 증거를 잡지 않는 이상 잡아들이기가 힘들군.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이 손으로…….”

쨍그랑-.

순간 힘 조절을 못 한 탓에 루키우스가 쥐고 있던 유리잔을 깨뜨렸다.

큰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과 사과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괜찮나?”

루키우스는 가장 먼저 루미나를 살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루미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괜찮아요. 아버님이 더 걱정인걸요.”

“이런 걸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기껏 네가 선물한 사과주인데. 아깝게 됐군.”

쯧.

혀를 찬 루키우스가 널브러진 유리 파편을 대충 손으로 쓸고서는 축축하게 젖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선글라스에도 사과주가 튄 탓에 잠깐 벗어야 했다.

파충류처럼 세로 동공이 선명하게 새겨진 루키우스의 맨눈을 보게 된 루미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버님.”

“왜 그러지? 불편하나?”

내 맨눈을 보게 돼서.

뒷말이 싹둑 잘린 문장을 알아들은 루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금지된 서고에서 마물이 사람이 되는 내용의 동화책을 봤거든요.”

인간의 것이 아닌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올랐다.

“당시 황자님께서는 동화에 담긴 내용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내용이 진짜일까요?”

사람의 근원은 정말로 마물이었던 것일까.

그러면 레기온은 조금 다를 뿐이지 이상한 존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라는 사람은 잔혹해. 징그러울 정도로 미쳐버린 사람이야. 하지만 괜히 박사라고 불리는 게 아닌지 아는 것이 많은 느낌이었지.’

그렇다면 그가 믿고 있는 듯한 동화의 설정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네가 본 동화책은 나 또한 확인했다. 그리고 흑마법에 손을 대면서도 알 수 있었지.”

“…….”

“인간이 마물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걸.”

동화책은 역시 사실을 기반으로 그려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버님의 눈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잖아요.”

외눈박이가 사는 세상에서는 두눈박이가 돌연변이 취급받는다.

만약 우리 모두가 괴물이었다면 괴물의 증표를 드러낸 남자가 괴물이라고 불리는 건 부당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루키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혼란을 야기할 거다. 자신의 조상이 추악한 마물이라는 걸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낫다. 괜히 허튼짓을 하려는 인간들도 나올 테고. 이득이 될 만한 점이 없지.”

“아버님께서는 남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시네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하는 루키우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치게 된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일어나볼게요.”

루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많이 남았지만, 애초에 선물용이었지 둘이서 한 병을 비우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루키우스가 마침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날이라고 하면 그들의 계약 기간을 뜻했다.

“생각은 바뀌었나?”

“으음.”

루미나가 일부러 모호하게 반응했다.

“그게……. 음, 혹시 바로 대답을 드려야 하는 일이었나요?”

“……아니. 그 어떤 강요도 없으니 편할 때 말해라.”

루키우스가 살짝 힘없는 어조로 대꾸했다.

정말 미세한 차이였지만 그 변화를 알아챈 루미나가 몰래 웃었다.

“네. 정말로 돌아가 볼게요.”

“마음이 바뀌면 꼭 말해라.”

“네!”

누가 하트 공작을 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했던가.

당장만 해도 얼굴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데.

실제로 루미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당장 밝히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당일에 마음을 바꾸겠다고 하면 아버님께서 깜짝 놀라시겠지?’

눈에 띄는 표정 변화가 생길지도 몰랐다.

지금처럼 자신이나 올리비아 정도만 알아볼 만한 변화가 아닌 확연한 변화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루미나가 떠났다.

홀로 남은 루키우스는 제 몫의 잔을 새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새로운 유리잔에 옅은 금빛이 도는 사과주가 찰랑였다.

그 색깔을 보니 아이리스의 금빛 눈동자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이리스가 살아있을 시절. 그녀가 건네준 와인을 아무 생각 없이 마셨던 적이 있었다.

막상 마셔보니 당도가 없는 터라 인상을 찌푸리자 아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골리기 위해 그런 와인을 준비한 것이다.

“루크는 참 웃긴 사람이야. 맨날 이런 거나 마실 것처럼 생겨서는 실제로는 단 걸 좋아하잖아. 덩치랑 어울리지 않아.”

“그래서 싫나?”

“아니.”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리스는 미리 준비한 술병을 꺼내들었다.

그게 바로 칼바도스.

사과 브랜디였다.

왜 포도주가 아닌 사과주냐고 묻자 “루크는 어린애 입맛이잖아!”라고 외쳤다.

그때를 떠올리면 생경한 기분이 자신을 지배했다.

사과주처럼 달콤한 과거를 곱씹던 루키우스는 인간이 마물에서 비롯된 존재냐고 묻던 루미나의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모두가 마물이 될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그 진실한 모습을 억지로 일깨우지 않아서 모르는 것뿐이지.

“루크, 나는 네 불행을 사랑했어.”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와 함께.

대학살 날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에 루키우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당시의 경험이 눈앞에 그리듯 선명해졌다.

제 품에 안긴 채 시체처럼 축 늘어진 아이리스의 뺨에는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박사가 어떤 짓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었다.

그렇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마물과 인간이 섞인 듯한 레기온도 아닌, 그냥 마물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더는 네가 불행하지 않길 바라게 됐나 봐. 그자에게서 네 눈동자가 평범한 사람처럼 되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한 거 있지.”

고통이 번지는 그녀의 얼굴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왔다.

“아이리스. 더는 말하지 마.”

“죽여 줘.”

“아이리스.”

“부탁이야. 날 죽여 줘.”

아이리스가 애원했다.

제발 죽여 달라고.

“내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해 줘.”

잔혹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제게 잔인한 얘기를 하나만 하지 않았다.

“카라얀한테는 말하지 마. 자기 때문이라면서 평생 힘들어할 거야.”

처음부터 박사의 목표는 카라얀이었다.

그런데 카라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같이 납치된 것도 모자라 박사에게 당해버렸으니 큰 상처가 될 터.

“그러니까 나는 사고로 죽은 거야.”

“그러면 나는……. 네게 내 모든 것을 줘버린 나는……?”

아이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루키우스의 손을 잡아서 제 목에 갖다 댔다. 죽음을 종용한 것이다.

“루크. 나의 죽음이 네 마지막 불행이 되도록 해 줄래?”

벌써 십 년이 넘어가는 일이건만 이 손으로 직접 그녀의 목을 감쌌던 감촉이 마치 어제처럼 선명했다.

“아이리스.”

입 안을 맴도는 다디단 사과 향을 느끼면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곧 그놈을 찢어발길 수 있을 거다. 삶을 되돌려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게 빠를지, 아니면 찢어발긴 그놈의 영혼을 네 곁에 보내는 것이 빠를지. 기대가 되는군.”

선글라스를 쓰지 않아 오롯이 드러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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