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누님의 숙부인 조제프 멜칸이 실종된 지도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혹여나 그분이 나쁜 마음을 먹고 누님께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조용해서 다행인 한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누님과 아예 무관한 일이 아닌 만큼 다방면으로 소문을 취합해 봤습니다.
조제프 멜칸이 모든 희망을 잃고 도박에 빠졌을 때, 선의로 돈을 준 것 외에 누님이 엮인 일이 없더군요.
만약 필담이 아닌 면담이었다면 누님께서는 ‘그래도 혈연이니 조금만 도왔을 뿐’이라고 말씀하실 걸 압니다.
또한 그분이 행방불명된 데에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겠죠.
그런데 자꾸만 누님께서 이번 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아카데미 생활을 통해 갖은 소문을 접하며 제가 너무 음모론에 빠진 걸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선의가 항상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듯합니다.
아. 사족이 길었습니다.
누님과 헤어진 이후로도 저는 다방면으로 진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황실의 서고를 출입했음에도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으니 제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언젠가 교수님께서 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잠시 뒤로 미뤄두고 쉬운 문제부터 풀라고 말이죠.
한 가지 문제에 집중했을 때는 유연한 사고를 하기 힘듭니다.
때문에 잠깐 눈을 돌리고 나면 처음 문제를 마주했을 때 떠오르지 않던 풀이가 생각난다는 얘기죠.
저는 너무 한 가지 문제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누님께 털어놓은 그 순간부터 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죠.
세상에는 해답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비밀이 있는데, 이 일 또한 마찬가지인 거겠죠.
저도 잊으려고 합니다.
그간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하고, 누님께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엔디미온 올림.
추신. 하트 공자의 외도가 헛소문이라서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랑슈스는 언제나 누님을 환영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음…….”
엔디미온이 보낸 편지를 다 읽은 루미나가 침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숙부님의 일에 내가 손을 썼다는 걸 눈치챘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겠다는 거고.”
톡톡.
손가락으로 편지지를 두드리는 루미나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차 사고 날 겪었던 일을 파헤치려고 일부러 황실 서고까지 갔는데 소득이 없었으니. 내게 미안해진 거구나.”
서고 출입 이후로 시일이 제법 지났다.
그런데도 아무런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
엔디미온은 어쩌면 단순 환시일지도 모르는 일로 루미나까지 끌어들였으니 마음이 불편한 듯했다.
“엔디미온은 내가 곰발조차 되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을까?”
언뜻 봤을 때 엔디미온은 사전이 말을 하는 것처럼 딱딱하고 조숙한 동생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가 얼마나 속 깊은 아이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지금의 선택이 옳아.”
전생에서는 루미나가 죽음을 맞이한 그날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루미나는 어떤 목숨의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누군가의 꼭두각시처럼 사는 것도 아닌 자유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엔디미온의 반듯한 글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루미나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전생에서 레기온으로서 팔려갔을 때.
엔디미온이 자신을 구하러 와 줬던 그 순간.
당시 엔디미온이 자신을 구할 동기가 된 그 사건은 루미나 또한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마땅히 단서를 찾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네가 언약식을 한 별관.”
문득 언젠가 루키우스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우연이 아닐 거다.
그는 그곳에서 주로 흑마법과 관련된 연구를 한다고 했다.
“안 돼. 이상한 오해를 받을지 몰라.”
휙휙.
두 눈을 질끈 감은 루미나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니 엔디미온의 반듯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니 또 마음이 흔들렸다.
혹시 작은 단서라도 그곳에 있다면.
“아버님께서 먼저 눈감아준다고 했잖아.”
잠깐만이면 아무도 모를 거다.
‘아버님에게 설명하기에는 애매하지. 내가 겪은 일이 아니기도 하고, 정신 이상 문제로 몰고 갈 수도 있으니까.’
몇 번이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편지지를 다시 들여다보던 루미나가 결단을 내렸다.
바로-.
“바람처럼 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면 돼.”
아무도 몰래 별관으로 향한 것이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차가운 무언가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툭, 툭-.
깜짝 놀란 루미나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금방 확인하고 빨리 돌아가야겠어.”
잠깐 내릴 소나기인 듯, 금방 빗줄기가 거세졌다.
걸음을 재촉한 루미나는 고성 같은 흉흉함을 자랑하는 별관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언제라도 와도 괜찮다는 뜻인 건가. 그 얘기를 나눈 지 한참 지났는데도 문이 열려 있네.’
암묵적인 허락을 느낀 루미나는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뒤로하고 주변을 살폈다.
흑마법에 대해 제국어로 적힌 서적만 몇 권 훑어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만약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면 포기하는 거고.
몰래 왔기 때문일까.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숨을 죽인 채 이 층으로 올라간 루미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복도 끝쪽 문이 열려 있었다.
심지어 빛까지 새어 나왔다.
자신 외에 누군가 있는 것이다.
멈칫한 사이 문 틈새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공한 겁니까?”
올리비아의 목소리였다.
올리비아라면 충분히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루미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루키우스의 음성이었다.
“구조적으로는 잘못된 게 없다.”
“공작님. 기뻐해야 마땅할 상황에서 초를 치는 듯해 죄송하지만, 흑마법을 제대로 발동시키려면 엄청난 양의 에테르를 필요로 할 겁니다.”
“…….”
“한두 시간도 아닌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
“그리고 제가 예상하기로는 현존하는 마물을 모두 잡아서 마석을 뽑아낸다 해도…….”
“시간을 되돌려 아이리스를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루미나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그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연구를 마무리 지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내가 엿들을 얘기는 아니야.’
엔디미온을 위한 자료를 찾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루미나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렇다면 올리비아.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보지. 치유의 레기온이라면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것 같나?”
“……!”
루미나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안쪽에서는 무뚝뚝한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계속 새어나왔다.
“예전에 루미나가 뱉어낸 꽃에 대한 성분 분석은 마쳤다. 마석과 동일하더군. 심지어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성질은 카라얀의 것과 같았지.”
“…….”
“에테르를 흡수해서 재생산한 거다.”
“작은 마님의 능력은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 모습부터 능력까지. 무서울 만큼 전설과 일치한다는 것 또한요.”
“그래. 또한 전설에 따르면 치유의 레기온은 많은 에테르를 품고 있다지.”
“하지만 공작님.”
올리비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물도, 인간도 총량의 차이지만 모두 에테르를 갖고 있습니다. 에테르가 응집된 기관을 마석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마물과 인간이 다를 바 없죠.”
“갑자기 교사 노릇을 하는군.”
“제가 어째서 이런 얘기를 여섯 살짜리 아이도 아닌 공작님께 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테르를 얻을 수 있는 자원이자 마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석은 핵.
곧 심장이었다.
“이 흑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 작은 마님의 협조를 바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심장이 필요할 테니까.
쿵쾅쿵쾅.
루미나는 심장이 제 존재감을 뽐내듯 빠르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틀어막은 루미나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어떻게 별관을 나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본관이었다.
“내게 네 심장을 다오.”
끝내 밝히지 않았던 진실에 그가 다다랐다.
앞으로 할 일은 뻔했다.
‘심장을 가지려면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잖아.’
사별한 아내와 계약 관계로 들인 며느리.
둘 중 누가 더 중요할까.
굳이 저울질하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사납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흠뻑 맞은 루미나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누군가 어깨를 붙잡았다.
깜짝 놀란 루미나가 크게 헛숨을 들이키며 뒤를 돌아봤다.
“루미나?”
카라얀이었다.
흑마법에 관한 중요한 대화를 엿듣는 걸 눈치챈 루키우스가 뒤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네가 우산도 없이 들어오는 걸 봤어. 밖에서 뭘 했던 거야?”
“저, 저요? 그냥 조금 전까지는 날씨가 좋아서 나갔는데…….”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로 루미나가 가냘픈 목소리를 냈다.
다소 두서없는 그녀의 얘기는 평소와 달랐다.
루미나가 걱정된 카라얀은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 대 다정한 온기를 나눠줬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그러다 감기 걸려.”
카라얀이 그녀의 뺨을 감싼 채 손가락으로 물기를 닦아줬다.
그러나 여전히 추위에 떤 루미나는 하얗게 번지는 날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엔디미온에게 답장을 보내야 해요.”
“뭐?”
갑자기 엔디미온이라니?
당황한 카라얀이 되물었으나 루미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가까스로 뒷말을 쥐어 짜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