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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리는 흑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루미나의 심장이 필요하다.
이 사실을 루키우스가 눈치챘다.
루미나는 그간 공작가의 며느리로서 루키우스에게 잘 보였다.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백 점 만점에 만점짜리 며느리라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만점짜리 며느리라 해도 사별한 아내에 대한 애정만큼은 이길 수 없었다.
원치 않게 제 손으로 죽여 버린 사랑이라면 더더욱.
‘내 심장을 갈취해서 흑마법을 발동시켜 봤자 성공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한다면? 과연 아버님께서 믿을까?’
믿기는 할 거다.
미래에서 왔다는 얘기를 농담 삼아 했더니 브랜든이 바로 믿은 것처럼 루미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충분했다.
대신 문제가 있었다.
루미나가 시간을 역행했다는 것 자체가 흑마법이 반쯤은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완전한 실패가 아니었으니 이 얘기를 들은 후 그는 한 가지 사실에 도달할 수 있을 터.
‘내 심장이 필수 재료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겠지.’
진실을 밝히는 건 역효과만 부를 뿐이었다.
‘심지어 내 심장을 대체할 만한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노릴 거야.’
루미나는 이 계약의 끝이 자신의 죽음 외에 없다는 걸 빠르게 인정했다.
그간 안전한 울타리가 돼 줬던 루키우스가 앞으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사신이 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와, 어떡해. 서운해지려고 해.’
다들 깊게 잠든 늦은 밤.
정자세로 누운 루미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 삼켜야 했다.
처음부터 계약 관계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심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간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당시에 느꼈던 감정까지 자연스레 상기됐다.
따듯하고, 즐겁고, 다정한 그 모든 것이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시야를 가득 채운 이 천장마저 익숙해져 이제 자고 일어났을 때 보이는 풍경이 다르면 어색할 지경이었다.
‘떠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정말 이곳에 머무른다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마음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집일 뿐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스르륵 상체를 일으킨 루미나는 또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는 카라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팍이나 굳게 감은 눈을 통해 그가 깊이 잠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루미나는 그에게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바른 자세로 누울 수 있게 했다.
자는 도중이라 몸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몸체를 돌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차양처럼 드리운 검은 속눈썹.
오뚝한 콧대.
굳게 다물어진 탓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
비록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 탓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말았지만, 참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자였다.
한때 변덕스러웠다고 생각했던 성격은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카라얀만큼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루미나가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카라얀 님. 그거 아세요?”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제 목소리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카라얀 님을…….”
정말정말 좋아하고 있나 봐요.
그런데 어머님의 죽음이 당신에게 깊은 흉터로 남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당신을 위하지 않는 걸 보면…….
“그만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카라얀을 향한 루미나의 사랑은 고결하지 못했다.
그간 과욕이라며 삼키길 두려워했던 것치고 참 초라한 마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엔디미온마저 가족애였을 뿐인데 목숨을 바칠 생각으로 전생에서 저를 살리러 오지 않았던가.
만약 루미나가 엔디미온의 입장이 됐다면 절대 똑같이 행동하지 못했을 거다.
이제껏 제 몸을 함부로 대하긴 했어도 모두 목숨을 보전한다는 가정하에 행한 일이었으니까.
루미나는 복잡한 눈빛으로 카라얀을 바라봤다.
깨어나지 않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느릿한 손길로 정리해 주고서는 옆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루미나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쭉.
평소와 같은 태도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루미나가 수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수상쩍은 점 없이 평소처럼 지낸 건 루키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았군.”
“그건 계약을 어기는 행동이잖아요.”
약속했던 날이 되었다.
루미나가 카라얀을 치료해 주는 대신 루키우스는 하트 가의 이름으로 루미나를 지켜준다.
계약을 기반으로 한 이 공생은 오늘부로 종료였다.
계약의 끝인 것이다.
루미나는 맞은편에 선 루키우스를 직시한 채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계약은 지키라고 있는 거죠.”
“그래, 그렇지.”
짙은 선글라스를 쓴 루키우스가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말투로 긍정했다.
루미나는 빙긋 웃었다.
속으로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였다.
“너도 알다시피 당장 법적인 이혼이 불가능하지. 하지만 걱정 말거라. 별거를 하면 되니까. 약속했던 보수는 이혼하자마자 지급하도록 하마.”
그렇게 말하며 루키우스가 펜과 함께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이혼 서류였다.
“미리 사인을 해 놓도록 해라. 카라얀의 것은 내가 나중에 받아두마.”
루미나는 망설임 없이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고 루키우스에게 돌려줬다.
“원래 네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지만, 웬만해서는 요양을 명목으로 떨어져 있는 편을 추천하고 싶군.”
“그 편이 카라얀 님도 납득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갑자기 사이가 나빠졌다고 하면 남들이 보기에 이상할 테고 네 평판과도 이어질 테지.”
심장을 노리는 사람치고는 섬세한 대답이었다.
“이 혼인이 네 인생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당황해서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루미나의 앞에 서류가 내밀어졌다.
“그동안 네가 지낼 별장을 알아봤다. 만약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보내주마.”
서류를 받은 루미나는 대충 살펴보는 척을 하다가 말했다.
“천천히 살펴보고 결정을 내려도 괜찮은 거죠?”
“그래.”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목걸이를 해제하도록 하지.”
루키우스가 루미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손을 뻗었다.
목으로 향하는 거대한 검은 손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꼭 목을 조를 것처럼.
루미나는 일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실수했다는 걸 눈치채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라얀 님의 피어싱은요?”
살짝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내 표정을 보지 못했겠지. 보지 못했어야 해.’
그를 두려워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됐다.
평소 그가 어떤 언행을 해도 전혀 겁먹지 않았는데 갑자기 공포를 느끼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터.
‘내가 별채에서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도 금방 알아채겠지. 아버님께서는 눈치가 빠르니까.’
루미나가 표정을 갈무리하는 동안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쪽이 끊어지면 다른 한쪽은 효력이 없지. 네 목걸이를 해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 그런가요?”
다행히 수상쩍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목소리 톤이 아까와 똑같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미나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잠깐 실례하마.”
조금 전과 달리 양해를 구한 루키우스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 마력을 불어넣더니 쪽지 하나를 건네줬다.
“이걸 거꾸로 읽어라.”
언약식을 치렀을 때 외쳤던 문장이었다.
지시대로 거꾸로 말하자 그간 족쇄처럼 굳게 채워져 있던 목걸이가 너무나 쉽게 풀렸다.
허무할 정도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떠나 있을 텐데 그동안 카라얀 님이 납득할까요?”
“네가 더는 그 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납득할 수밖에 없겠지.”
“…….”
“이혼의 대부분 이유는 둘 중 한 명이 상대를 더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죠. 그렇네요.”
루미나가 살짝 멍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헤어진다.
그보다 더 명확한 사유가 있을까.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가 아니었기에 자꾸만 다른 이유를 찾으며 불안해했던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어긋나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었다.
“오늘 저녁에 당장 떠나고 싶은데, 오후 중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하녀를 통해 전달하면 바로 준비해 놓을 수 있도록 하마.”
“그리고…….”
“그리고?”
머뭇거리던 루미나가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루키우스와 눈을 마주친 채로 말했다.
“카라얀 님을 보고 싶지 않아요. 떠나기 전까지 만나지 않도록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음대로 해라. 계약은 끝났으니까.”
루미나는 생활 연기의 달인이었다.
악명 높은 루키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숨 쉬듯 연기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카라얀의 앞에서 사랑이 식었다는, 거짓 연기를 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끝내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