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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36)화 (136/152)

***

제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노티아라는 마을로 떠나겠다고 결정하자 모든 일이 빠르게 처리됐다.

먼저 입이 무겁고 손이 빠른 하녀들이 짐을 간단하게 꾸려주었다.

그리고 노티아로 떠나는 기차표가 루미나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대답을 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 모든 일이 끝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착착 진행되는 일 처리 속도에 루미나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표만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안 보이네.’

루키우스에게서 카라얀을 보지 않게 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놨기 때문일까.

갑자기 문이 쾅 열리면서 카라얀이 루미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대체 어디 가? 날 두고 어디 가는 건데?’라고 외칠 것만 같은데 주변은 적막하기만 했다.

한참이 지난 후, 루미나는 서랍에서 편지와 펜을 꺼냈다.

엔디미온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기에 새하얀 편지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잠깐 기차표를 내려놓은 루미나는 짧은 문장을 썼다.

문장을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편지지에 펜을 대기까지 머뭇거림이 길었다.

한참 방황하던 펜이 활로를 찾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것을 내려놓으니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루미나가 몸을 떨며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작은 마님! 시간이 됐습니다!”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응. 알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루미나는 하녀를 따라서 마차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마차를 타기 직전.

“작은 마님, 작은 마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애니가 루미나에게 황급히 달려왔다.

걸음을 멈춘 루미나는 작은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뒤를 돌아봤다.

“애니? 무슨 일이야?”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서 깜빡할 뻔했네요. 이것 받으세요.”

“……이게 뭔데?”

“작은 마님에게 온 소포예요. 신원이 불분명해서 저희가 미리 살펴봤는데 평범한 동화책이더라고요.”

“동화책?”

“네! 작은 마님이 머물 곳으로 다시 소포를 부치면 한참 걸리잖아요. 그래서 뛰어왔는데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루미나에게 동화책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혹시 아라벨 황녀가 장난을 친 것일까?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바로 소포를 확인하지 못했다.

당장 출발해야 기차 시간을 맞출 수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애니. 고마워.”

“네!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세요!”

“……응. 그럴게.”

혼란을 막기 위해 사용인들에게는 짧은 외출이라고 얘기한 듯했다.

그래서인지 마차에 실린 짐이 그리 대단치 않았다.

애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루미나가 한 손에는 소포를 든 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동승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미나가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익숙한 얼굴이 루미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버님께서는 동행하지 않으시나 봐.”

“네. 바쁘셔서 대신 제가 나왔어요. 혹시 섭섭하세요?”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루미나가 고개를 가로젓자 올리비아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마차가 출발했다.

올라비아는 루미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 사실을 눈치챘으면서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마차 밖, 스치는 풍경만 쳐다보고 있으니 한참이 지나서야 올리비아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작은 마님께서…….”

“올리비아. 나는 이제 작은 마님이 아니야.”

루미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올리비아의 말허리를 중간에 끊었다.

“……루미나 님께서 계약과 상관없이 계속 남아 있을 줄 알았어요.”

“돈이 엮인 일이었어.”

“네?”

올리비아가 당황했다.

하지만 루미나는 표정 한번 바꾸지 않고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부터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고. 이혼을 하게 되면 내게 거액을 준다고 약속했지. 그건 올리비아도 이미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죠. 하지만 세 분이 함께 있었을 때 정말 행복해 보였는걸요. 진짜 가족 같았어요.”

“…….”

“마치 제가 남편이나 애쉬와 있을 때처럼 말이에요.”

올리비아 또한 루키우스가 루미나의 심장을 원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참 감성적인 얘기였다.

‘내 선택으로 죽으라는 걸까.’

올리비아만이 유일한 인간이어서 응원을 했는데, 그녀도 결국 그 하트 공작의 수복이었다.

묘한 배신감을 느끼며 루미나가 말했다.

“올리비아, 나는 순수하고 고결한 이유로 혼인한 게 아니야.”

“…….”

“나한테는 가문의 힘이 필요했고, 공작님께는 카라얀 님을 위해 내가 필요했던 것뿐이지.”

“……네. 그랬었죠.”

더는 루미나를 설득하길 포기한 건지 올리비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 계약은 끝났는걸.”

“계약이 끝났다는 건 새로운 계약이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잖아요.”

루미나는 이번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 기차역에 도착했기에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간단한 짐을 챙기고, 플랫폼에 들어선 그들은 이제껏 마부석에 있던 유리와 합류했다.

유리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별장까지 호위로 따라갈 예정이었다.

“도착하면 하인이 루미나 님을 기다리는 있을 거예요.”

플랫폼에 들어서자 올리비아가 말했다.

노을 진 저녁의 플랫폼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보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만약 대기하던 하인과 길이 엇갈리더라도 유리 경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고요.”

“네. 노티아에 위치한 별장까지 가는 길은 미리 숙지해 뒀습니다. 맡겨만 주시면 됩니다.”

참 믿음직스러웠다.

루미나가 기차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꼭 여행 가는 딸을 배웅하는 엄마 같아 살짝 미소 지은 루미나가 따라서 손을 흔들어 줬다.

그렇게 루미나가 자취를 감추고, 기차가 떠날 때까지 올리비아는 자리를 지켰다.

***

카라얀은 주위를 쓱 둘러봤다.

넓은 연무장에서 두 다리로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연무장은 초토화됐고, 암월 기사들의 앓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러게 적당히 할 것이지.”

카라얀이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대답 대신 “으으.” 하는 소리만 돌아왔다.

오늘따라 기사들이 제게 달라붙는 탓에 하루 종일 검만 휘둘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옛날에 지옥 훈련을 맛본 터라 미치지 않는 이상 돌아가면서 전부 덤벼드는 일이 없는데.

막상 왜 그러냐고 물어도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습니다!’ 같은 허황된 대답만 돌아오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소드 마스터?

귀찮아서 더 따져 묻지 않고 피하려고 하니 기사들이 끈덕지게 대련을 청했다.

결국 늦은 밤이 됐다.

이만 정리하고 복도를 걷던 카라얀은 저보다 큰 검은 형체와 마주쳤다.

“카라얀.”

그의 아버지인 루키우스였다.

용건이 있는지 그는 카라얀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름을 불렀다.

“……뭡니까?”

오늘따라 평소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 잔뜩 생긴다는 생각을 하며 카라얀이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루키우스의 말은 정말 평소라면 듣지 못했을 얘기였다.

“오늘부터 루미나는 따로 지낼 거다.”

“무슨…….”

“이대로 지내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이혼 절차를 밟을 것이니 알아둬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당황한 카라얀이 반말을 썼다.

하지만 루키우스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덤덤했다.

“처음부터 황녀와의 혼담을 막기 위해 진행된 결혼이었지.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혼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너 또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카라얀이 반박하려고 했지만 루키우스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더구나.”

“…….”

“루미나가 너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때가 됐다고 하니 미련 없이 떠났다.”

뜨거웠던 카라얀의 이성이 루키우스의 얘기가 이어질수록 차가워졌다.

“그 애가 좋아서 시작했으니 마음이 식었다면 마무리 짓는 것이 옳지.”

카라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을 꽉 쥔 그의 모습은 패전자 같았다.

“그러면 나는?”

카라얀이 힘겨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멋대로 들이닥쳐서 내 마음을 실컷 들쑤셔놓고 떠나면 끝나는 일인 줄 알아?”

까득.

그가 이를 갈았다.

“안 되겠어.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어. 루미나는 어디로 갔어?”

“말해 줄 수 없다.”

“하루 이틀 함께한 것도 아니고 무려 육 년을 부부로 지냈어. 그런데 혼자 좋아하고 혼자 끝낸다고?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그래도 말해 줄 수 없다.”

“우리 사이의 일이야. 당신이 왜 참견하는 거야?!”

“오직 너희 둘만의 일이 아니게 됐으니까.”

카라얀이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따지려고 할 때였다.

“공작님, 공작님!”

올리비아가 급박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작은 마님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카라얀과 루키우스가 동시에 말했다.

올리비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유리 경이 음성 통신을 통해 전하길, 음료를 마시자마자 깊은 수면에 빠졌다고 합니다. 깨어났을 때는 작은 마님이 사라졌고요.”

“…….”

“정신을 차리자마자 환승역에서 내려 겨우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납치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어째서?”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유리 경에게 음료를 건넨 사람이 작은 마님이라고 합니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루키우스가 침착하게 명령했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다. 사람을 풀어서 수색해.”

“나도 가겠어.”

“카라얀.”

“막을 생각 하지 마. 그럴 거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니까.”

카라얀이 살벌한 눈빛으로 루키우스를 노려봤다.

주변인들의 오금이 저릴 만큼 사나운 분위기로 두 사람이 대치하던 중이었다.

“공작님! 작은 마님의 방을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

루미나가 언급되자 카라얀이 하녀에게로 성큼 다가가 쪽지를 앗아갔다.

성급한 손놀림으로 쪽지를 펼쳐본 카라얀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쪽지를 읽기 위해 카라얀의 옆으로 다가온 루키우스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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