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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37)화 (137/152)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정적 끝에 루키우스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 계획한 짓인지 궁금할 지경이야.”

루미나가 저택을 떠난 건 계약이 종료됐음을 뜻함과 동시에 카라얀에게서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루키우스의 비호를 받아서 편히 지내다가 때가 되면 합의 이혼을 진행하면 됐다.

그러면 법적으로도 하트 가문과 관계가 없는 남이 될 테고, 계약은 완벽히 끝.

그런데 이제 잘 먹고 잘 사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는 루미나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단 하나.

루키우스.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어째서 도망쳤는지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바로…….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알게 된 거다.

아이리스와 다시 만나기 위해 그녀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이유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작은 마님의 자필인지 확인해 볼까요?”

“그럴 필요 없어. 자필이야.”

카라얀이 쪽지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 단순히 흉내를 낸 건지 아니면 루미나가 직접 쓴 건지. 이건 직접 쓴 거야.”

그렇게 말하는 카라얀의 어조가 살짝 우울했다.

이 쪽지를 보니, 그가 붙잡는다 해도 결코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루미나의 마음을 확인사살 당한 듯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루미나의 흔적이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쪽지를 접어서 챙긴 카라얀이 시비를 거는 어조로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도 루미나의 행적을 알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네.”

혼자서만 루미나에 대한 정보를 쥐고 결코 풀지 않을 것처럼 얘기하더니 결국 그도 자신과 정보량이 같아졌다.

더는 우위를 점한 듯이 굴지 못하는 것이다.

‘루미나가 어디로 떠났는지 정확한 단서를 찾을 수 없게 됐지만 상관없어. 이 대륙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으면 돼.’

그녀는 쪽지 하나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라지면 자신이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동안 사람을 잘못 봤다.

몇 년 뒤 갑자기 나타나서 이혼을 하겠다고 해도 결코 승낙하지 않을 거다.

루미나의 마음은 끝났을지 몰라도 카라얀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카라얀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사람처럼 눈을 빛내니 루키우스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만큼 네가 싫었나 보구나. 네가 내게 행적을 물을 게 뻔하니 아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난 거겠지.”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러면 그 애가 왜 이런 쪽지까지 남기면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카라얀은 대답하지 못했다.

루미나가 떠난 이유가 오직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됐기에 다른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공작님!”

보다 못한 올리비아가 끼어들었다.

지금 루키우스가 하고 있는 건 명백한 이간질이었다.

“올리비아. 그 애의 행방을 찾기 위해 사람을 풀라고 명령했을 텐데.”

루키우스가 살기를 담아 경고하듯 말하자 올리비아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쪽지를 들고 온 하녀를 돌아봤다.

“일단 너는 기사들에게 루미나 님을 수색하라고 전하렴. 마지막으로 본 곳은 기차역이니까 참고하라고 하고.”

“네? 네. 알겠습니다.”

하녀가 빠르게 사라졌다.

“올리비아, 지금 뭐 하는 거지?”

“공작님의 명령을 처리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올리비아.”

“공작님이 어떤 일을 하든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만 방금 하신 말씀이 공자님께 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건 네가 인간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지. 감성적으로 행동하지 마라.”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만 얘기하는 겁니다. 루미나 님이 행적을 감춘 건 온전히 공자님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뭔가를 알고 있는 거야?”

카라얀이 다급하게 물었다.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어조였다.

올리비아는 그 모습이 참 안타깝다고 생각하며 진실을 말했다.

“공자님에 대한 마음이 식어서 떠났을 거라는 얘기를 하려면 루미나 님이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하셔야죠.”

“…….”

“그래야 냉정한 보고가 아니겠어요?”

“목숨의 위협을 느껴? 왜? 내가 레기온이라서? 아냐. 나는 절대 죽이지 않을 거야. 아버지처럼 그러지 않을 거라고.”

카라얀이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올리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버지의 앞에서 저런 말을 하게 되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른 채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 것도.

참 마음이 아팠다.

“공자님께서는 이성을 잃어도 루미나 님을 해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올리비아는 지금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거다.

카라얀이 루미나의 목숨을 노릴 리 없으면 남은 인물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어째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여실한 표정으로 카라얀이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덤덤했다.

언제나 그랬듯.

“널 위해서다.”

“날 위해서라고? 변명하지 마.”

카라얀의 끓는점은 낮았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매섭게 말했다.

“당신이 이제껏 날 위해서 한 게 뭐가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없애고, 방치한 것 외에 한 일이 있어?”

순간 루키우스가 멈칫했다.

“정말로 날 위했더라면 가장 먼저 내 의사를 물었어야지! 이럴 거면 차라리 오늘 결판을 내.”

카라얀이 거친 손길로 귀에 꽂힌 피어싱 하나를 빼냈다.

동시에 검은 마력이 연기처럼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내가 당신을 죽이면 더는 위협을 느끼지 않은 루미나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쓸데없는 잔정에 휘둘려서 셋이서 함께 살 꿈같은 망상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카라얀이 당장 루키우스의 목을 비틀 것처럼 살기를 뿜어댈 때였다.

그들에게로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몹시 다급한 표정을 한 하인이었다.

일반인은 해치지 않는다.

습관처럼 박혀 있는 행동거지인 터라 마력을 거둔 카라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살벌한 분위기를 느끼고 오들오들 몸을 떤 하인이 루키우스에게 다가갔다.

“고, 공작님. 황실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이 늦은 시각에?

갑작스러운 터라 카라얀 또한 잠시 경계를 풀었다.

“구금 중이던 전 1황자 마르셀이 엘리엇 황자를 인질 삼아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2황자를 인질로 삼았다고? 2황자가 납치한 게 아니라 납치를 당했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정을 유지하던 루키우스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카라얀을 돌아봤다.

“카라얀, 2황자와 루미나가 한자리에 있을 때 그가 루미나에게 어떻게 대했지?”

“갑자기 왜 그런…….”

“친절하게 대하던가?”

카라얀이 반항적인 눈빛만 쏘아댈 뿐, 선뜻 대답하지 않자 루키우스가 다그쳤다.

“그 애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

“남들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호의적이던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 적어도 내 눈에는.”

카라얀은 루미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엘리엇의 불순한 시선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젠장. 실수했군.”

루키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애를 발견하면 무엇보다 안전을 우선해야 한다. 웬만한 기사 몇 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테지.”

마르셀의 탈옥은 세상을 저주한 마르셀이 엘리엇을 인질 삼아 도주를 시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사건의 전말이 그게 아님을 바로 알아챘다.

박사.

그가 엘리엇이라는 유약하고 불쌍한 황자의 가면을 벗고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만약 루미나가 지정된 별장으로 이동했다면 박사로부터 보호하기 쉬웠을 거다.

하지만 당장 행적을 알 수 없으니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 버러지 같은 놈이 탈옥한 게 루미나와는 관계가 없잖아.”

“아니. 그는 루미나의 목숨을 노릴 거다. 그러기 위해 황궁을 떠난 게 분명하다.”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박사는 루미나를 찾으려 할 테니까.

그리고 그 심장을 갈취하려 하겠지.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찾기 위해 움직이려고 하는데 카라얀이 더 빨랐다.

“어디 가는 거지? 수색대와 이동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이 루미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잖아.”

당장은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위하는 듯했다.

하지만 카라얀이 봤을 때,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루미나의 죽음인 이상 똑같다고 느껴졌다.

“당신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스스로 해낼 거야.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지금 카라얀은 아이리스가 죽고, 루미나와 만나기 전의 모습과 같았다.

거칠고, 반항적이며 분노에 차 있는 눈빛이 루키우스를 꿰뚫을 듯 노려봤다.

아들의 분노를 받으면서도 루키우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로 흔들릴 거라면 처음부터 아이리스의 죽여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거다.

제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죽인 그 순간부터 그의 목표는 일관적이었다.

이 복수를 아들에게 대물림하지 않은 채 제 손으로 매듭짓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루미나의 목걸이는 그 애가 떠날 때 해제됐다. 너희의 언약식은 더는 어떤 효과도 없는 거다.”

그 말을 듣고 카라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카라얀.”

“…….”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루키우스가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를 했다.

하지만 카라얀은 대답하지 않고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짧게 쳐다보던 루키우스가 카라얀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당장 브랜든을 불러라.”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었다.

누가 먼저 루미나를 발견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엇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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