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38)화 (138/152)

“대장, 상황은 들었어.”

부름을 받은 브랜든이 루키우스 앞에 섰다.

“네가 나 몰래 그 애를 돕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대장. 그게 무슨 소리야.”

“브랜든. 지금 정보 하나하나가 소중한 상황이다. 그 애가 박사의 손에 들어가서 끔찍한 실험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협박 아닌 협박에 브랜든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당장은 루미나의 정확한 거취를 확인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얼마 전에 별장을 한 채 구해 달라고 했어.”

“별장?”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별장이라고 콕 집어서 말했었지. 그 외에 별다른 요구가 없어서 내가 직접 매입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아.”

브랜든은 당시의 대화를 되짚어봤다.

“제 목표가 소박하게 사는 거라서요. 가끔 놀러 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다.

그때부터 루미나는 완전히 도망칠 계획을 짜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브랜든이 루미나를 위해 매입한 별장은 남부 끝에 위치한 소도시, 르텐에 있었다.

오늘 루미나의 원래 도착지였던 노티아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인 것이다.

만약 노티아로 수색대를 보냈으면 동선을 낭비하게 됐을 거다.

그 치밀함에 감탄하기도 전에 루키우스는 먼저 기차 시간표를 확인했다.

“여기 있군.”

루미나가 노티아로 가는 기차를 탄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 르텐으로 출발한 기차가 있었다.

“당장 르텐으로 가도록 하지.”

***

“으, 피곤해.”

한편 계획했던 장소에 무사히 도착한 루미나는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따라붙는 사람도 없어 보였고. 당장은 잘 따돌린 것 같은데 앞으로가 문제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발 빠르게 돌아다녔다.

혹 유리가 중간에 깨서 자신의 부재를 알아챘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또 유리 말고도 루키우스가 따로 더 사람을 붙였을까 봐 주변을 살펴야 했다.

온갖 잡념을 함께 짊어지고 이동한 탓일까.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무거워졌다.

흐물흐물 늘어진 루미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욕심을 부리고 싶어도 못 하겠네.”

평생 쫓기는 몸이 될 예정이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 브랜든 몰래 퀸 상단의 비자금을 빼두길 잘한 듯했다.

앞으로 그 돈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다.

어릴 때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부터 탱자탱자 놀고먹으며 살아야지.

하도 과로해서 죽을 위기까지 처했는데 이 정도 나태한 노후 계획은 절대 과욕이 아니었다.

“그래. 처음부터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과욕이었던 거야. 욕심부리다가 이렇게 된 거라고. 바보 같은 나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묻은 루미나가 자책하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신변을 정리하고 국외로 나가야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언어조차 낯선 곳에 도착하면 아무도 날 찾지 못할 거야.”

“…….”

“그러려면 지금 쓰러져 있을 때가 아니야. 일단 짐부터 정리해야겠다!”

일부러 씩씩하게 외친 루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툭-.

무언가 침대에서 떨어져 고개를 숙이니 갈색 종이봉투가 보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봉투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낸 루미나는 당황했다.

“이건 금지된 서고에서 읽었던 동화책이잖아. 이게 왜 나한테로 온 거지?”

금서를 갖고 다니는 건 중죄였다.

비록 서고에서 직접 꺼낸 건 아니었지만,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손목이 뎅겅 잘릴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택을 떠나기 전에 나한테 온 소포였지.”

처음 봤을 땐 아라벨 황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라벨은 루미나가 금지된 서고에서 동화책을 읽었다는 걸 모를 거다.

엘리엇이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아니, 알려줬다고 해도 이상하잖아. 굳이 나한테 선물한다고?”

보낸 이가 아라벨이라는 건 추측일 뿐, 그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자신을 감옥으로 끌고 가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나 싶었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저자 미미르.

그 글씨가 똑똑히 읽힌 것이다.

“금서가 아니야. 아니, 금서로 지정될지는 몰라도 서고에서 본 그 책이 아니야.”

금서와 같은 표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오직 쓰인 언어만 달랐다.

제국어로 쓰여 있었다.

당황한 루미나가 같이 포장돼 있던 다른 책을 꺼냈다. 그것 또한 동화책이었다.

이번 동화책은 제목부터 낯설었다.

“<착한 왕자>…….”

그 밑에는 저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미미르.

금서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대체…….”

루미나가 혼란스러워하며 <착한 왕자>를 읽어보려고 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똑똑-.

엔디미온은 노크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명령하신 물건을 갖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곧이어 문이 열리고, 집사와 함께 장정들이 거대한 짐을 들고 들어왔다.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정확한 생김새를 알기가 어려웠다.

“저쪽에 놔 주시기 바랍니다.”

엔디미온의 정중한 명령에 따라 장정들이 ‘그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엔디미온은 ‘그것’ 앞으로 다가갔다.

느릿한 손길로 하얀 천을 걷어내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미나의 생모인 클로이 랑슈스의 초상화였다.

기다란 밀빛 머리칼과 어쩐지 날카롭게 느껴지는 분홍빛 눈동자.

미미하게 올린 입꼬리는 다정하다기보다는 꿍꿍이를 숨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현재의 루미나와 똑 닮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같은 얼굴, 다른 분위기.

아니,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건 어쩌면 생모에게 들은 험담 때문에 생긴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엔디미온은 초상화를 샅샅이 훑어봤다.

“누님께는 이제 포기하겠다고 말했지만…….”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아카데미 수석답게 막히는 문제가 있다면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세상에 답이 없는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미나가 엮이니 미안함이 먼저 들어서 마차 사고 날 있었던 일을 잊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편지를 썼다.

“역시. 초상화를 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네. 괜한 짓이었어.”

클로이의 초상화는 부모님의 손에서 처분되지 않고 저택의 창고 한구석에 보관돼 있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제 앞에 가져와 달라고 했던 건데.

결국 헛짓이었다.

마차 사고 날 목격한 사람이 클로이라는 믿음만 가중됐을 뿐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엔디미온이 초상화를 다시 치우라고 명령하려 했다.

그런데…….

쾅-!

거칠게 문이 열렸다.

“루미나는 어디 있어?”

엔디미온의 동공이 커졌다.

다짜고짜 쳐들어온 작자는 다름 아닌 카라얀이었다.

레기온이라서 예의를 배우다가 말았는지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고 들어오더니 의미 모를 말을 했다.

“네가 루미나를 숨겼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보니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린 게 아니라 진짜 부서졌다.

레기온의 무책임한 힘을 목격하게 된 엔디미온은 이게 짐승이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게 맞나 싶었다.

“오해라고. 전부 오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순순히 불어.”

지금도 봐라.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 의사소통이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이건 제 말을 듣지 않는 카라얀의 문제였다.

“누님께서는 공작저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사라졌어.”

“사라졌다니요? 누님이 납치라도 당한 겁니까?!”

“아니. 스스로 떠났어.”

흥분했던 엔디미온이 카라얀의 얘기를 듣자마자 침착해졌다.

현재까지의 대화로 추측해 보건대, 순하고 착한 누님께 이 짐승이 엄청난 잘못을 한 듯했다.

부부 싸움이 격해져서 누님이 충동적으로 집을 나온 듯한데 자신에게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게 됐다.

그와 별개로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은 어투로 카라얀에게 말했다.

“결혼 중 별거를 하는 일은 흔하다고, 통계학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조건만 보는 정략혼일 경우 그 수치가 월등히 높죠.”

“그래. 내 문제일 수도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알고 있으면 떠난 상대를 잡지 않는 게 옳습니다.”

“아니, 잡아야 해.”

“구질구질하군요.”

랑슈스 저택은 루미나의 친정이었다.

루미나에게 많은 은혜를 입은 엔디미온은 그녀에게 안식처 같은 존재가 돼 주고 싶었다.

때문에 속으로는 루미나를 따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겉으로는 카라얀에게 가차 없이 말했다.

가시 돋친 엔디미온의 대답으로 충분히 상처를 받을 수도 있건만 카라얀은 굴하지 않았다.

“루미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있어. 그들이 루미나를 죽이기 전에 찾아내야 지킬 수 있어.”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도 몰라. 확실한 건 지금 루미나가 위험하다는 거야.”

“…….”

“지난번에 루미나가 네게 편지를 보냈잖아. 분명 도와달라고 했을 테지. 그때 루미나가 어딘가로 떠난다거나 그런 얘기 하지 않았어?”

“편지로는 평소와 같이 일상적인 대화밖에 나누지 않았습니다.”

엔디미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루미나의 목숨이 달렸으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저는 누님을 숨긴 적 없습니다. 누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요.”

“짚이는 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엔디미온의 시선이 문득 클로이의 초상화에 닿았다.

그건 카라얀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님의 어머니입니다.”

엔디미온이 설명했다.

“놀라울 정도로 모녀가 많이 닮았죠.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고 하지만, 이토록 닮은 건 처음 보는 터라 저도 헷갈릴 정도입니다.”

“무슨 소리야. 전혀 다르잖아. 어떻게 헷갈릴 수 있…….”

순간 카라얀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클로이의 초상화에서 떠나지 않았다.

“뭡니까?”

“왜 그간 눈치채지 못했지?”

딱 봐도 루미나가 아닌데 어떻게 동일인물 취급할 수 있냐고 반박하려던 카라얀의 머릿속에 순간 스친 기억이 있었다.

대학살 날.

자신을 도와줬던 그 여자.

“우리는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카라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날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루미나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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