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오며 확신하게 됐다.
순간 카라얀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학살 날 자신을 도와줘서 한평생 찾던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니.
그간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초상화 속 인물은 누님의 생모 되는 분이라고…….”
“다시 말하지 않아도 돼. 네 말은 똑똑히 들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초상화를 보며 누님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카라얀은 다시 한번 클로이의 초상화를 샅샅이 훑어봤다.
루미나의 생모인 만큼 전체적으로 닮았다는 사실은 그조차도 인정하게 됐다.
같은 머리 색과 눈 색. 그리고 유순한 눈매와 둥근 인상 같은 것들이 같았다.
외적으로 특징적인 차이가 없으니 평범한 사람들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카라얀은 아니었다.
항상 보는 얼굴인데 멍청이가 아닌 이상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아니. 조금 전까지 그날 날 도와줬던 사람이 루미나인 걸 몰랐으니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불러야겠네.’
깨달음을 얻고 나니 누가 바보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뜻한 건 초상화가 아니야. 어릴 적에 만난 적 있어.”
“누님을 말입니까?”
엔디미온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지금의 루미나를.”
엔디미온의 눈빛이 점점 더 해괴하게 변했다.
제정신이 아닌 자를 마주했을 때 보낼 법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닮은 사람을 목격한 거겠죠.”
“아니, 루미나가 맞아.”
카라얀은 붉은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더는 루미나와 이어져 있지도 않건만 어쩐지 그녀가 느껴지는 듯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어떻게 누님이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좋아하니까.”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대꾸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보통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모두가 보통인 건 아니지. 흔히 레기온들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나는 루미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걸.”
카라얀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루미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였다.
엔디미온은 굳이 유도신문을 하지 않아도 그가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마차 사고 날 만난 사람도…….’
십 년이 넘는 시간을 거스른 자신의 누이.
그리고 사랑을 하는 레기온.
학문적으로 불가능한 일투성이였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상식이 자꾸만 부정하려고 하니 문득 엘리엇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진리처럼 맹신하고 있는 모든 관념을 지워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이 말이다.
“그보다 짚이는 곳이 진짜 없어? 인정하기는 싫지만 루미나는 널 총애하니까 떠나기 전에 귀띔했을 수도 있잖아.”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해 카라얀이 간절하게 말했다.
카라얀은 자신이 루키우스에 비해 가진 정보가 적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너무 늦게 루미나를 찾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이미 숨이 멎은 그녀를 발견하게 될까 봐.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정말로 누님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
엔디미온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대답은 마찬가지로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돌아왔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엔디미온은 그 진위를 가늠하듯, 카라얀의 금빛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짐승 같은 레기온에게 백기를 든 것이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누님께서 제게 도움을 구한 적은 없습니다. 공작저를 떠나고 싶다는 뜻도 내비친 적 없고요.”
“…….”
“오히려 평생 그곳에서 지낼 것처럼 얘기해서 이혼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됐죠.”
엔디미온은 아는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인내심을 갖고 얘기를 듣던 카라얀은 제대로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엔디미온과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루미나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텐데.
초조한 마음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하지만 누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도주를 계획했다면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뭔데?”
카라얀이 독촉하자 엔디미온이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느리군.”
기차를 탄 루키우스가 팔짱을 낀 채로 한마디 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의 속력만큼이나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르텐까지는 멀어서 아무리 레기온이라도 두 발로 달려가는 건 무리지. 그리고 말보다 기차가 빠르니까 이게 최선이잖아.”
브랜든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영 못마땅한 듯 입매를 일자로 굳힐 뿐이었다.
원래라면 이 새벽에 운행할 기차는 없었다.
그러나 인질이 된 엘리엇 황자를 구하러 가겠다는 의사를 황실에 밝히며 기차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루키우스가 개입하면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황제가 선뜻 인가를 내 준 것이다.
그러면서 결코 첫째 아들인 마르셀의 신상에 해를 가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황제는 루키우스가 마르셀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으로 움직였다고 지레짐작한 듯했다.
첫째 아들이 어쩌면 루키우스의 손에서 처참한 꼴이 될 수 있는데 지원을 해 준 건, 둘 다 잃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엘리엇의 정체가 정말로 박사라면 그의 목적은 루미나일 테지.’
그러니 루미나를 찾는 것이 곧 엘리엇도 찾는 길이었다.
황제의 추측은 모두 잘못됐지만, 어쨌든 엘리엇을 찾겠다는 말은 거짓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기차 안.
브랜든은 점점 르텐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대장, 정말 죽일 거야?”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루키우스는 기다란 다리를 꼰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루미나의 에테르를 이용해서 흑마법을 발동시킬 생각이라며.”
브랜든이 답답하다는 듯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리비한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아무리 우리 리비와 흑마법을 연구했다고 하지만, 나만 쏙 빼놓고 그런 중대사를 나누다니 말이야.”
“…….”
“게다가 루미나는 더 이상 우리와 남이 아니잖아. 그 애도 하트 가문의 사람이라고.”
“시간이 되돌아가면 죽음조차 무의미해지지.”
“대장.”
브랜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그를 불렀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아이리스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될 만큼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 애도 평범하게 살아갈 거다. 제 심장이 제물이 됐다는 것도 모르겠지.”
“만약 실패하면?”
“…….”
“그러면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는 거잖아.”
“실패하지 않을 거다.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
루키우스는 정말로 루미나를 죽일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되돌아갈 테니 죄책감조차 없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는 거야? 이건 카라얀에게 너무한 처사야. 선대 공작이 아이리스를 죽이려 들었다고 생각해 봐. 납득이 돼?”
“……성공하면 카라얀도 이해할 거다.”
“어차피 없는 일이 될 테니까?”
브랜든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착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한숨이었다.
“어떤 명령을 듣더라도 나는 대장을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거야.”
브랜든은 제 진심이 루키우스에게 닿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내게는 토끼 같은 아내와 곰돌이 같은 아들이 있어. 소중한 가족이지. 그런데 그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 바로 대장이야.”
“…….”
“그 지옥에서 날 구해준 순간부터 대장은 내게 첫 번째 가족이었어.”
“…….”
“만약 대장이 나한테 루미나를 죽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하겠지.”
“…….”
“하지만 마지막까지 재고해 줬으면 좋겠어. 가족을 위해 진정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지 말이야.”
브랜든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루키우스가 한참이 지난 후에 목소리를 냈다.
“올리비아도 반대하더군.”
“그렇다니까!”
열띤 웅변이 효과가 있는 걸까?
부부의 노력으로 철옹성 같은 루키우스의 마음을 녹인 게 아닐까 싶어서 브랜든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건 너희 중 누구도 상실을 겪어보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얘기다.”
끼이익-.
마침 기차가 멈춰 섰다.
브랜든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은 루키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감정은 인간만의 것이라며. 나한테 맨날 인간성 타령하더니 대장도 결국 인간인 거잖아.”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쉰 브랜든이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죽이지 않길 바라는 한편, 아내를 잃은 그의 마음이 이해가 돼서 착잡할 뿐이었다.
당장은 루미나가 퀸 메를로의 이름으로 매입한 별장의 길을 알려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여기야.”
루키우스와 브랜든이 아담한 규모의 별장 앞에 섰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이층집이었다.
늦은 시각인 만큼 불은 꺼져 있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담을 넘고, 문을 따서 기척을 내지 않은 채 들어갔다.
불법 주거 침입이었지만, 방문을 알아채고 루미나가 도망칠 상황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실내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가구도 필요한 것만 있어서 단출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2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문을 하나씩 열어봤다.
방의 개수가 많지 않았다.
덕분에 쉽게 집 주인용 침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없잖아.”
당연히 곤히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루미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2층 수색을 마치고, 보통 사용인들이 쓰는 1층으로 내려간 그들은 다시 차례대로 문을 열었다.
이쯤 되니 브랜든은 마음 한편으로 차라리 루미나가 이곳에 없길 바라게 됐다.
“숨소리가 들리는군.”
1층을 수색하던 중, 마지막 방 앞에 선 루키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랜든 또한 안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호흡을 들을 수 있었다.
짧은 도주를 마치고 루미나가 붙잡히는 건가.
박사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루미나를 찾는 게 맞지만, 루미나에게 루키우스는 결국 차악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같았으니까.
속으로 낭패라고 생각하며 브랜든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