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든이 문을 열자마자 루키우스는 문틈으로 빠르게 실내를 훑어봤다.
커튼을 쳤는지 실내는 빛 한 점 들지 않아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러나 레기온인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사람이 있음을 확인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 대장……!”
당장 루미나를 한 손으로 짜부라트릴 것처럼 험악한 기세인 터라 브랜든이 목소리를 낮춘 채 황급히 그를 불렀다.
하지만 루키우스를 막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새 침대 앞에 선 그가 멈칫했다.
“……아니군.”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당연히 루미나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브랜든이 깜짝 놀라 루키우스의 옆에 섰다.
그런데 정말로 루미나가 아니었다.
웬 빼빼 마른 노인이 곤히 자고 있었다.
“정말이네?”
당황한 브랜든이 큰 소리를 냈다.
“으음…….”
잠귀가 밝은지 노인이 깨어났다.
여느 마을에 있을 법한 흔한 인상의 노인과 마주한 브랜든은 곧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별장을 매입하면서 관리인을 직접 뽑았는데, 그때 제 손으로 뽑은 자였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눈을 떴더니 어둠 속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두 남자와 마주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사신입니까? 드디어 제가 죽을 날이 다 돼서…….”
두려움에 떠는 노인이 안타까웠던 브랜든은 그의 말허리를 중간에 끊고 넉살 좋은 어조로 최대한 활기차게 소개했다.
“메를로 양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외진 곳에 있는 터라 길을 헤매면서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네요.”
처음부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 협소한 변명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당장 쫓겨나도 이상할 것 없었건만 이상하게도 노인은 바로 납득했다.
“아. 메를로 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그분께서 언질을 주신 것과 비슷한 시각에 도착하셨군요.”
“……네?”
어벙한 소리를 낸 건 브랜든이었다.
메를로, 그러니까 루미나한테 이미 얘기를 들었다니?
늦은 시각에 침입한 불청객인데 이 또한 예상 범위 안이었다고?
“저는 이곳의 관리인입니다.”
본인을 소개한 노인이 협탁에 있던 안경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명색이 관리인인데 손님 앞에서 계속 누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메를로 님께서 자신을 찾는 손님이 있다면 이걸 전해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여기 넣어뒀는데.”
그는 협탁을 열어서 뒤적거렸다.
찾는 물건이 바로 나오지 않자 어색한 침묵을 메우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얘기했다.
“한밤중에 도둑처럼 찾아올 수 있으니 너무 놀라지 않아도 된다고 당부하시더군요.”
“그게 언제지?”
“일주일 전쯤이었습니다. 아, 여기 있군요. 메를로 님께서 손님들께 이걸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노인이 협탁에서 찾아낸 건 평범한 쪽지였다.
루키우스는 그것을 받아 곧바로 펼쳐봤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보던 브랜든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아저씨, 해고예요!]
루미나 특유의 귀여운 필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를 듣고 루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화책, <착한 왕자>를 등 뒤로 숨기고서 말했다.
“들어와.”
곧이어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다름이 아니라,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신경 써 준 덕에 편하게 쉬고 있어.”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카라얀과 비슷한 큰 키.
그렇지만 삐쩍 마른 탓에 허수아비 같은 체격.
소심한 성격을 드러내듯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는 엔디미온의 아카데미 동기인 호세였다.
루키우스가 자신의 심장을 노린다는 걸 알게 된 날, 루미나는 당장 엔디미온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핏 봤을 때는 엔디미온이 먼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 같았다.
그만큼 평범한 내용이었다.
중간에 엔디미온의 교우관계에 대한 걱정이 추가돼 있다는 것만 제외하고.
이에 엔디미온은 ‘호세’라는 인물과 아직까지도 교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루미나는 아무도 몰래 호세와 접촉했다.
‘내가 도망치면 가장 먼저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겠지. 섣불리 조력자를 두는 건 무모한 짓이야.’
그래서 엔디미온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루미나가 도망쳤을 때 일 순위 조사 대상이었으니까.
대신 엔디미온의 친구라면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니 조력자로 둬도 곧바로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연락해서 많이 당황했지? 사정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해서 답답했을 텐데 미안해.”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호세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흔쾌히 루미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너무 선선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함정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을 통해 그의 성정을 들은 바가 있었고, 일일이 따질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어서 결국 그의 도움을 받게 됐다.
“아뇨, 엔디미온은 제 친구니까요. 친구의 누님이 부탁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죠.”
“…….”
“엔디미온도 저를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엔디미온은 호세가 자존감이 낮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몇 번의 대화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루미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엔디미온이 속내를 겉으로 티 내는 성격은 아니잖아. 속으로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닐걸요. 사실 제가 빚을 진 적이 있거든요.”
“빚?”
돈이라도 빌린 건가?
루미나가 갸웃거리며 호세를 쳐다봤다.
“엔디미온이 처음 편입했을 때 엔디미온에게로 온 편지를 훔쳤어요.”
“아아, 그랬던 거구나.”
루미나는 동기간의 친목이라 쓰고 다툼이라고 읽는 일에 호세가 엮여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일이 있어서 엔디미온에게서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구나.
엔디미온이 워낙 말을 아끼다 보니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협박받아서 하게 된 일이었지만, 제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요. 사과를 했는데 엔디미온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
“오히려 강자에게 바짝 엎드리는 것도 한 가지 생존 방법이라며 존중한다고 했죠. 그때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음…….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물과 달리 사람은 수치를 느낄 줄 안대.”
루미나가 고개를 푹 숙인 호세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가 나쁜 짓을 했는데도 엔디미온이 너를 곁에 둔 건 그 때문일 거야. 넌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아라벨처럼 조금씩 바뀌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조제프처럼 바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 조제프처럼 바뀌지 못하니, 자신의 잘못을 알고 반성할 줄 아는 건 대단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끝내 나비가 되어 화려한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루미나가 다소 장난스러운 어조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친구 관계는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까 네 얘기만 하던데?”
“그건 제가 끈질기게 붙어 있어서 그럴 거예요.”
호세가 쑥스러워하며 허둥지둥 이야기의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말씀하신 물건을 모두 준비했는데 혹시 제가 빠뜨린 게 있나요?”
루미나는 브랜든 몰래 빼돌린 자금과 귀중품을 호세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해외 도피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해달라고 부탁했다.
귀중품은 차후 천천히 처분하라는 얘기를 덧붙이며.
‘귀중품은 추적이 가능해서 브랜든 아저씨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이제껏 조용한 걸 보니 호세를 조력자로 삼은 건 현명한 판단이었던 듯했다.
루미나는 동화책 탓에 아직 살펴보지 못한 짐을 힐끗 봤다.
“이제 막 확인하려고 했어. 몇 가지는 빼먹어도 상관없으니까 괜찮겠지.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낮이 밝자마자 바로 떠날게. 이런 힘든 부탁까지 들어줬는데 오래 폐를 끼칠 수 없지.”
“…….”
“그리고 엔디미온한테는…….”
하루아침에 누이가 실종되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엔디미온은 얼마나 황망하겠는가.
“며칠 뒤에 내가 너한테 신세 졌다는 생색 정도는 내도록 해. 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는 말고!”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이러면 내가 실종된 게 아니라 자진해서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되겠지.’
루미나는 엔디미온이 자신의 걱정을 덜 하길 바랐다.
상황이 이래서 직접 얘기해 주지는 못하지만.
“돌아오시는 거죠?”
“응?”
“엔디미온도 모르게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거잖아요.”
호세는 자존감이 낮은 거지 바보인 게 아니었다.
루미나가 요청한 물건들은 누가 봐도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는 사람이 구할 법한 것이었다.
일단 부탁하니 들어줬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이 괜한 짓을 하는 걸까 봐.
“아마도…….”
루미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호세를 안심시킬 거짓말을 할지, 아니면 진실을 말할지 고민했다.
짧은 고민 끝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결국 진심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엔디미온한테는 기다리지 말라고 해 줘. 이런 부탁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 너한테 빚이 될 만한 일이 늘어나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줬으니 하트 공작의 추궁은 피할 수 없을 터.
‘그리고 카라얀 님도 나를 찾을지 모르지.’
저 심약한 성격에 버텨낼 수 있을지 또한 걱정이었다.
“빚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엔디미온한테 미안한 짓을 했다고.”
홀몸도 아니고 하트 공자비인 루미나가 갑자기 아무도 몰래 해외로 도주한다는데 궁금한 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호세는 여전히 추궁하지 않았다.
“그런 엔디미온이 저를 친구로 받아들여 줬는데 친구의 누님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죠.”
아까보다 자신감이 붙은 말투였다. 훨씬 보기 좋았다.
“그러면 피곤하실 텐데 주무세요.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네요.”
시각이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은 호세가 후다닥 사라졌다.
홀로 남은 루미나도 대충 짐 정리를 하고 어서 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무언가 손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