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의 손에 짚인 건 동화책, <착한 왕자>였다.
“아, 맞아. 이걸 읽으려고 했지.”
호세가 예고 없이 찾아와 잠깐 미뤄뒀던 걸 그새 깜빡했다.
아닌 척해도 얼마나 정신이 없는 상태인지 인정하게 된 루미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시선은 동화책에 고정돼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다른 책도 아닌 번역된 금서와 함께 포장돼 있었으니 결코 일반적인 내용은 아닐 터.
“애니가 평범한 동화책이라고 얘기했던 걸 생각하면 사특한 주술이 걸려 있을 수도 있겠지.”
관련 분야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평범한 동화책처럼 보이는 주술 같은 것이 걸려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다른 동화책을 이미 읽었는데 이제 와서 이걸 읽지 않은 채 버리기도 애매하지.”
몇 번 머뭇거리던 루미나는 결심했다.
고민할 시간에 얼른 읽고 한숨 푹 자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동화책을 넘기는 손길이 단호했고, 빨랐다.
“옛날, 옛날에 총명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너무 똑똑한 나머지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이웃도 시시하게 여기게 됐죠.
어른이 된 아이는 어느 날 세계의 진실을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비참해졌습니다.
왜 나는 완벽하지 않은 거야?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완벽한 존재가 되기로. 미개한 제 혈육과 달리 진정한 존재로 거듭나기로.”
하지만 검은 괴물의 방해로 그는 모든 걸 잃고 말았어요.
엉엉.
슬픔에 잠긴 그는 왕자를 만났어요.
-어째서 우는 거니?
그가 말했어요.
검은 괴물에게 모든 걸 잃은 건 그인데 어째서인지 왕자가 울고 있었답니다.
-너는 혼자야?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게 됐어요.
-너는 외로워서 슬픈 거구나. 그렇다면 혼자가 되지 않게 만들어 줄게.
우걱우걱.
와드득, 와드득.
그렇게 왕자만이 남게 됐어요.
참 착한 왕자였죠.
이제 왕자가 된 그는 검은 괴물이 지키는 아름다운 나비를 얻기 위해 힘을 길렀어요.
세상에서 유일한 나비는 검은 괴물이 갖기엔 과분했죠. 검은 괴물은 나빴으니까요.
왕자는 생각했어요.
검은 괴물에게서 나비를 강탈해 박제하면 그 황홀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취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왕자의 꿈 또한 이룰 수 있겠죠.
“완벽한 존재로 거듭나는 꿈을…….”
동화책을 덮은 루미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동화 속 얘기가 진짜라면.”
하트 공작의 추측이 옳았다.
엘리엇은 곧 박사였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박사는 진짜 황자인 엘리엇의 겉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뒤쫓고 있겠지. 굳이 나한테 이걸 준 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야.”
박사 또한 치유의 레기온에 대해 알아본 것이다.
서고에서 꽃을 꺼내 보여준 건 일부러 떠보려고 했던 게 틀림없었다.
다들 루미나의 심장을 갖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루미나는 힘주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냥 잊자. 나를 죽일 사람들은 따돌리면 그만이야. 박사의 정체도 공작님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닌 거야.”
그리고 제 목숨을 노리는 하트 공작을 도와준다 한들 그가 감사해할까?
‘아니, 오히려 잘됐다 싶어서 심장부터 뽑아가겠지.’
제 목숨을 노리는 박사도, 하트 공작도 추적하지 못하는 해외로 도망치면 더 이상 상관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루빨리 이 나라를 떠나자. 그리고 처음 계획했던 대로 소박하게 사는 거야.”
그 외에는 온전히 삶을 영유할 방법이 없었다.
“친척들에게 복수도 했고, 엔디미온도 가문을 이어받았으니까 이제 내 마지막 꿈을 이룰 방법은 이것뿐이야.”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이것뿐이고.
루미나는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
쾅! 쾅쾅!
문이 부서지다 못해 집이 무너질 것만 같은 엄청난 소리를 듣고 한창 자고 있던 호세가 벌떡 일어났다.
“이, 이게 무슨…….”
지진이라도 난 걸까?
벌벌 떠는 호세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눈빛으로 가장 먼저 시계를 봤다.
10시 20분.
커튼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걸 보니 웬만한 귀족들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이른 오전이었다.
이 시각이면 찾아올 손님도 없었기에 의아해하던 와중이었다.
쾅-!
굉음을 듣고 호세가 후다닥 일어났다.
더 이상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아무리 들어도 이 소리는 문이 부서진 소리였기 때문이다.
‘가, 강도인가? 아침부터?’
제도 출신의 귀족이 아니었던 호세는 아카데미 졸업 후 자그마한 집을 구해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가족들과 달리 제도에 남길 택한 것이다.
집의 규모가 작아서 집사나 상주 하인을 굳이 들일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 이 집에 있는 사람은 저 혼자였다.
부스스한 머리나 잠옷 차림이라는 걸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무기부터 챙기려고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호세는 이불 속으로 숨으려고 했다.
그러나 익숙한 얼굴이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걸 보고 멈칫했다.
졸업식 날 얼굴을 봐서 아는 하트 공자인 카라얀과…….
“엔디미온?”
자신을 해칠 강도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호세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이른 시각에 죄송하지만 급한 일입니다. 혹시 누님께서 찾아왔습니까?”
“아, 아니?”
아직은 루미나와 비밀을 지켜야 할 때였다. 호세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하지만 곧바로 카라얀이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거짓말하지 마.”
굉장히 위협적이었던 터라 겁에 질린 호세가 뒷걸음질 쳤다.
엔디미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깡패도 아니고, 협박하지 마시죠.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하는 겁니다. 겁박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
“그리고 이곳에서 루미나의 냄새가 나.”
“역시 짐승이 맞군요.”
엔디미온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카라얀을 쳐다봤다.
아랑곳하지 않은 카라얀이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는 어조로 호세에게 말했다.
“냄새까지 맡았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루미나가 여기 왔어, 안 왔어? 네가 진실을 말해야 루미나가 살아.”
“네? 네?!”
“루미나를 죽이고 싶어?”
역시 생사를 들먹이는 것만큼 제대로 먹히는 협박이 없었다.
카라얀은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이 협박이라는 자각이 있었지만, 일일이 따질 여력이 없었다.
루미나가 떠난 건 어제저녁.
그러니까 벌써 12시간이 지난 셈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몰랐다.
“와, 왔어요!”
결국 루미나의 생사뿐만 아니라 본인의 목숨까지 위협받은 호세가 진실을 외쳤다.
“지금은 여기 없는 것 같은데, 언제 어디로 갔어?”
“새벽에 나간다고 했어요. 그리고 행선지는 정확히 제게 말해 주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은데…….”
“본론만. 빨리.”
“동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니스로 갈 것 같아요!”
“항구라면 배를 타고 떠날 생각인 건가?”
“그럴 것 같았어요. 새벽에 출발했으니 늦어도 오후 배를 타고 아예 제국을 떠나려는 게 아닐까요?”
루미나가 구해 달라고 한 물품을 바탕으로 호세가 합리적인 추측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카라얀은 그대로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다시 호세를 돌아봤다.
호세는 지은 죄도 없건만 뜨끔했다.
“혹시 그자가 널 찾아왔어?”
“네?”
“하트 공작 말이야.”
“아, 아뇨! 오늘 저를 찾아온 손님은 공자님이 처음이에요.”
호세가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최대한 언성을 높여 말했다.
누군가 따로 침입한 흔적이 없는 터라 카라얀은 납득했다.
“만약 그자가 널 찾아와서 추궁하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루미나는 온 적 없고, 내가 찾아왔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는 말만 한 거야.”
호세가 힐끗 엔디미온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카라얀은 호세가 영 미덥지 않았지만, 일단 확답을 받은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루미나를 직접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아직 늦지 않았어.”
만약 늦었다 해도 직접 바다를 헤엄쳐서 뒤따라가면 해결될 일이었다.
카라얀이 더 지체할 것 없이 떠나고, 엔디미온이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중이었다.
“엔디미온.”
호세가 엔디미온을 불렀다.
“사실 루미나 님께서 네게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했어.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봐.”
“누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호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듣고 엔디미온의 기분이 저조해진 듯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그런데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는 건 아닌 것 같았어.”
“…….”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거든.”
“……그랬군요.”
“그, 그런데 너는 따라가지 않는 거야?”
루미나를 찾기 위해 카라얀과 함께 떠나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자리를 지킬 생각입니다. 누님이 돌아왔을 때, 반겨줄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만, 기다릴 것이다.
엔디미온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라얀이라면 루미나를 무사히 지키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자신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젓는 일에 가능하다고 단호히 외치는 그를 보며 냉철한 이성이 모든 해답이 돼 주진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한편, 무려 세 남자에게 추격당하는 신세가 된 루미나가 무사히 마차에서 내렸다.
“감사해요.”
마부의 도움을 받아서 짐을 건네받은 루미나는 몸을 돌려 도시의 정경을 시야에 담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자극된 감각은 바로 후각이었다.
찬란한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소금기가 섞인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아직 바다도 보지 못했건만 루미나는 자신이 바다 근처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부의 끝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니스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