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다.”
바다를 낀 도시는 다양한 사람이 북적거려 활기가 넘쳤다.
길거리를 걷던 루미나는 바다 냄새와 낯선 향신료 냄새가 섞인 이곳만의 독특한 향을 맡게 됐다.
거기다 제국어뿐만 아니라 처음 듣는 외국어도 들려서 마치 외국에 온 듯한 기묘한 감상을 줬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던 루미나는 가장 먼저 근처에 있는, 모자를 파는 노점상으로 갔다.
후드를 벗고 밀짚모자를 쓰자 가게 주인이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아가씨에게 딱 어울리는구먼.”
“정말요?”
“그래, 그래. 참한 말씨나 하얀 얼굴을 보니 멀리서 왔나 보지?”
“네, 맞아요.”
“머리가 까매서 그런지 얼굴이 눈처럼 하얗게 보여서 후드를 벗자마자 깜짝 놀랐지 뭔가.”
“…….”
“예쁜 얼굴, 괜히 후드로 가리지 말고 그 모자를 쓰고 다니면 딱 좋겠구먼. 햇볕도 가리고 말이야.”
위장을 위해 검은색 가발을 쓴 루미나는 흔한 장사치의 공치사에 넘어간 척, 흔쾌히 돈을 꺼냈다.
노점상은 그동안 루미나가 하얀 얼굴을 태우기 싫어서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고 착각한 듯했다.
“많이 파세요.”
루미나가 밀짚모자를 사는 동안 비슷한 모자를 쓴 사람이 벌써 세 명이나 스쳐 지나갔다.
그만큼 흔한 밀짚모자를 쓴 루미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파에 섞였다.
그들의 일부가 된 듯,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도 기차를 탈 생각은 없었지만, 기차를 탔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항구로 가서 바다 건너의 외국으로 떠나는 저녁 배표를 구한 루미나가 중얼거렸다.
이곳으로 오며 루미나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건 바로 소문이었다.
혹시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언행은 조심했고, 귀는 항상 기민하게 열어뒀다.
덕분에 구금 중이던 마르셀이 탈옥했을 뿐만 아니라 엘리엇 황자를 납치했다는 소문을 일찍이 접하게 됐다.
마르셀의 탈옥은 도주 중인 루미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마르셀을 잡기 위해 모든 통행로에 보초가 서고, 기차 검문이 평소보다 더 철저해진 건 당연한 절차였으니까.
‘기차는 일부러 피했는데 이제 보니 잘한 일이었네. 괜히 빨리 가려고 욕심부리지 않길 잘했어.’
루미나는 자신이 기차역에서 사라졌으니 루키우스가 가장 먼저 기차를 조사할 거라고 예상했다.
‘보통은 비슷한 시각에 출발한 다른 기차 편을 타고 도주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 점을 노려서 도주를 계획할 때 이동수단으로 기차를 아예 배제했다.
만약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면 늦은 오전 배편을 타고 이미 제국을 떠났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상황을 봤을 땐 마차를 탄 게 옳은 선택이었다.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잡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조금 돌아가더라도 완전히 이 나라를 떠나는 것. 그리고 루키우스와 박사의 수색망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루미나의 목표였다.
‘그런데 정말로 마르셀이 탈옥한 걸까? 엘리엇은 마르셀에게 인질로 잡힌 거고?’
엘리엇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현시점에서 봤을 때,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박사인 엘리엇이 마르셀을 납치했으면 몰라도.
‘만약 모든 것이 박사의 음모라면 목표는 아마도…….’
루미나, 자신일 것이다.
직접 그린 게 분명한 동화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던가.
나비를 박제하겠다고.
“정말 난감하게 됐네.”
항구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도 행운이 뒷받침해준 것처럼 느껴졌다.
한때 아버님이라고 부르던 루키우스에게 잡혀서 심장이 뽑힌 채 죽든, 유약한 황자를 연기하던 박사라는 노인에게 잡혀서 박제된 채 죽든.
뭐든 최악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계약 같은 걸 제안하지 말 걸 그랬나.”
전생과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나이에 또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내가 없었으면 카라얀 님은 이미 죽었겠지.’
문득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진 카라얀이 떠올랐다.
휙휙-.
고개를 빠르게 저어 애써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운 루미나가 배표를 소중히 챙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메뉴는 홍합찜이에요! 방금 들어온 신선한 홍합이 있어요!”
“거기 아가씨, 갈매기한테 먹이를 주고 싶지 않수?”
다양한 호객꾼들이 루미나의 시선을 끌었다.
“갈매기 먹이요? 어떻게 주는 건데요?”
“이 과자를 들고 있으면 갈매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와 낚아채 가지. 한 봉지에 5쿠퍼인데 사 갈 텐가?”
“네! 한 봉지 주세요.”
루미나는 갈매기들에게 먹이도 주면서 쫓기는 사람치고 여유롭게 도시를 구경했다.
한 곳에 숨어 있는 것보다 차라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낯선 풍경, 낯선 언어, 낯선 음식.
다신 돌아오지 않을 도시의 정취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시간을 보내니 눈 깜짝할 새 출항할 시간이 다가왔다.
“바다는 노을이 지는 시각에도 예쁘네.”
해가 지는 시각.
푸른 바다는 하늘을 따라서 어느덧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도카니 서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계속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남아 있으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텐데도 미련이 자꾸만 루미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미리 가 있어야겠다.”
그러나 단호히 마음을 접은 루미나가 느릿한 걸음으로 선박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였다.
“……!”
누군가 루미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루미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머릿속에서 빨간 등이 빠르게 깜빡이면서 짧은 순간 온갖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자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까.
루미나가 품에 숨겼던 호신용품을 꺼내려고 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겨우 찾았다.”
루미나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반항하기를 포기한 루미나는 당혹감이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카라얀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숨을 살짝 거칠게 쉬면서 루미나를 힘주어 안았다.
“이미 배를 타고 떠나버렸을까 봐 조마조마했어. 다행이다. 아직 떠나지 않아서.”
“…….”
“널 붙잡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안심한 듯한 카라얀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루미나는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이거 놓아주세요.”
“루미나.”
“공작님께 듣지 못했어요? 저희는 사실상 이혼한 거예요.”
카라얀의 팔에 힘이 풀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루미나가 카라얀을 밀어냈다.
몸을 돌리니 눈에 띄게 풀이 죽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그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약속했던 기한이 끝난 데다 제가 더는 카라얀 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끝이라고요!”
“알고 있어.”
카라얀이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잘 때 네가 그랬지. 생각했던 것만큼 날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카라얀 님. 그거 아세요? 어쩌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카라얀 님을…….”
“…….”
“그만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역시 듣고 있었던 거다.
일부러 그 사이의 진심을 입 밖으로 털어놓지 않았던 루미나는 일부러 모진 말만 골라서 했다.
“그 얘기를 들었으면서 왜 저를 따라온 거예요? 제가 변덕스럽고 나쁜 사람인 걸 알았으니 학을 떼며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야죠.”
“…….”
“아, 혹시 배신감을 느껴서 저를 응징하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예요?”
“아니.”
카라얀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널 붙잡을 수밖에 없었어. 정말 곤란하게 됐거든.”
설마 카라얀이 루키우스와 한패가 된 걸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그가 어머니인 아이리스를 살리기 위한 계획에 동참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내가 널 너무 좋아하게 돼서 정말 곤란해.”
루미나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카라얀의 얼굴을 보게 됐다.
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꽂혔다.
“널 사랑하는 만큼 네가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어. 그래서 따라온 거야.”
“…….”
“그 사람도 네가 마음이 식어서 떠났다고 말했어.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을 통해 들은 얘기잖아. 너와 직접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
“내가 네게 잘못한 게 있다면 몇 번이나 빌고, 고칠 마음으로 널 따라온 거야.”
루미나는 허탈해졌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비와 한패가 됐을 거라고?
저 얼굴을 보고도 그런 의심이 들 리 없지 않은가.
누가 봐도 순수하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인데.
“맞아요, 마음이 식었어요. 제 입으로 들었으니 된 거죠?”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
숨 쉬듯 할 수 있었던 게 거짓말인데 이상하게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아니, 아직 안 됐어. 진심이 아니잖아.”
“카라얀 님은 바보예요? 이게 제 진심이에요! 싫은 데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
“그냥 제가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맨날 좋다고 따라다니다가 갑자기 질려서 버리겠다는 거니까.”
루미나는 카라얀과의 마음을 완전히 접기 위해 악역을 자처했다.
“지금 당신조차 찾지 못하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려는 게 보이지 않아요? 이게 현실이에요.”
“……언제부터? 언제부터 내게 질렸던 거야?”
“키스했을 때요.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더라고요.”
루미나는 가장 행복했던 날의 기억을 최악인 것처럼 포장했다.
어쩐지 눈물이 차오르려고 하는 터라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어요. 그러니까 정말로 저를 위한다면 붙잡지 마세요.”
자꾸만 루미나의 발목을 붙드는 미련의 근원은 카라얀이었다.
제비꽃 설탕 절임 같은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어서 걸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자가 널 죽이려고 해서 도망치는 거라면 날 이용해도 좋아.”
루키우스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걸 카라얀이 알고 있었다.
루미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약속했잖아. 너만은 내가 꼭 지켜줄 거라고.”
“…….”
“그러니까 이 나라를 떠나기로 이미 결심했다면 같이 가자.”
일부러 모진 말만 골라서 했는데도 희망을 잃지 않은 카라얀이 필사적으로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