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43)화 (143/152)

같이 도망치자는 카라얀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련이 남아 있던 루미나의 마음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친부를 죽이세요. 제가 그렇게 말하면 카라얀 님은 정말로 공작님을 죽이려고 들겠죠.”

“…….”

“뿐만 아니라 저를 지키려면 공작님과 맞설 수밖에 없으니 피를 봐야 하는 상황이 올 거예요.”

“상관없어. 애초에 남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야.”

“공작님이 만일 피치 못한 사정으로 어머님을 죽였다고 해도 아버지 취급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자가 어머니를 죽이는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어. 그런데 사정?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카라얀이 차갑게 반응했다.

“만약 사정이 있다 해도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선대 공작님께서는 현 공작님의 눈이 보기 싫어서 학대를 일삼았어요. 심지어 흑마법에 손을 대게 됐죠.”

루미나가 갑자기 선대 공작 얘기를 하자 카라얀이 당황했다.

하지만 루미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마물 같은 취급을 당했던 공작님은 끝내 선대 공작을 죽였어요. 이게 친부를 죽였다고, 악마 취급당하는 하트 공작의 진실이에요”

“…….”

“공작님께서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나요?”

“……아니.”

갈등의 골이 단순히 오해 때문이라면 루미나는 카라얀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지 않길 바랐다.

카라얀이 루키우스를 증오한다는 걸 알고, 루키우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카라얀에게 모진 요구를 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루미나, 본인이 부모의 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사랑하는 이까지 복수와 절망 그리고 공허 속에서 살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느 평범한 가족처럼 사랑을 받은 채 살았으면 했다.

그의 아버지인 루키우스는 표현이 서툴 뿐, 카라얀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으니 관계가 회복될 여지는 충분했다.

“공작님이 저를 죽이려 드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역시 그자 때문에 도망친 거였구나. 이유 같은 건 난 상관없어. 그자가 널 죽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아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라얀 님만큼은 그 이유를 알아야 해요.”

마음을 굳게 먹은 루미나가 카라얀을 직시했다.

“아이리스 님을 살리기 위해서예요. 당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 모든 걸 없던 일로 만들려고 저를 찾는 거라고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아뇨, 제 목숨만 있다면 가능해요. 실제로 공작님은 반쯤 성공했어요.”

“…….”

“아직도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그분을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냉혈한 레기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카라얀은 어째서 아버지가 ‘널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루미나의 목숨을 노렸는지 깨달았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면 날 받아줄 거야?”

“네?”

“어머니는 어머니고, 너는 너야. 네 얘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괘씸해지는걸.”

“…….”

“피치 못한 사정이 있다 해도 본인이 죽인 거잖아.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하면서 모든 일을 되돌리겠다고?”

카라얀이 씹어 삼키듯이 거친 어조로 외쳤다.

“너나 나한테 일방적인 희생과 이해를 강요하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자를 옹호할 수 있겠어?”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면 아이리스 님뿐만 아니라 저도 살아있을 거예요. 성공만 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죠.”

그날의 일이 평생 카라얀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기에 루미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저는 죽기 싫어서 도망쳤어요.”

“왜 그게 나쁜 선택인 것처럼 말해? 죽기 싫은 건 당연한 거잖아.”

“성공만 하면 죽음 또한 없던 일이 될 텐데도요?”

“네가 말했지. 반쯤 성공했다고. 그 말은 완벽하게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잖아.”

“…….”

“지금의 네가 죽는다는 건데 누가 기뻐하겠어. 그리고 너와 나 사이의 일을 없던 걸로 만드는 건 나도 원치 않아.”

되돌아가면 지난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다. 그런 건 싫었다.

“마음이 바뀌어서 언젠가 저를 원망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 이유 때문에 나한테 질렸니 뭐니 하면서 자꾸 밀어낸 거야?”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야 하는데 곧바로 거짓말이 나오지 못했다.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루미나의 대답은 충분했다.

“정말로 키스 탓에 마음이 식었다면 내가…….”

조금 전의 사나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쑥스러운 듯이 우물쭈물하던 카라얀이 외쳤다.

“열심히 공부할게……!”

훅 치고 들어오는 발언이라 루미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술만 벙긋거리자 그 사이 진정했는지 카라얀이 다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널 원망할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 때문이라면 명확하게 얘기해 줄게.”

“…….”

“내가 널 원망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루미나가 머뭇거렸다.

그걸 눈치챈 카라얀이 기세를 몰아 밀어붙였다.

“그리고 널 노리는 다른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 널 지켜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

“알고 있어요.”

카라얀은 지금 루미나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을 상대할 때 자신을 방패막이로 써도 상관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들을 아끼는 루키우스는 그렇다 쳐도, 한 번 카라얀을 납치한 전적이 있는 박사가 카라얀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나올지 루미나조차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필요 없어요.”

“루미나.”

“혼자서도 충분해요. 처음에 한 말을 벌써 잊은 거예요? 질렸다고 했잖아요. 질려서 떠나는 거라고.”

루미나는 이 선택이 옳은지 이제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를 끌어들이는 게 욕심처럼 느껴져 완전히 이 관계를 끊어내기로 했다.

평소 잘만 나오던 거짓말이 너무나 어색했다. 마치 남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만약 저를 아직 사랑한다면 더는 붙잡지 말고 오늘 만남은 없던 걸로 해 주세요.”

루미나는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루미나!”

뒤에서 그의 부름을 들었지만, 마치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돌아보면 안 돼.’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껏 나는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더는 안 돼.’

아슬아슬하게 승선 시간에 맞춘 루미나는 배표와 함께 가짜 신분증을 내밀었다.

짧은 검문 끝에 무사히 탑승한 루미나는 곧바로 승객실로 가지 않고 갑판으로 갔다.

태양이 바다에 잠기고 있는 시간이었다.

바다를 구경하러 나온 승객들로 북적거렸다.

난간을 붙잡은 채 육지를 내다본 루미나는 오도카니 서 있는 카라얀을 발견했다.

일부러 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그만이 보였다.

정이 떨어질 말만 골라서 했는데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힘으로 강제하면 억지로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건 자신이 남긴 마지막 말 때문일 거다.

‘아직 사랑한다면 붙잡지도 말고, 오늘 만남도 잊으라고 했지.’

그런 모진 말을 듣고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거다.

“출발합니다!”

분주한 선원들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선박이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뭍과 점점 멀어졌다.

카라얀 또한 점점 작아졌다.

루미나는 자신이 아무도 모르는 타지로 떠나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그리고 카라얀과의 관계도 이대로 끝인 것이다.

그동안 루미나가 바란 건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최소한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었다.

미니멀 라이프.

그 미래에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가정이 전혀 없었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담한 집에서 혼자서 자급자족하는 삶.

그게 루미나가 바라왔던 삶이었다.

‘오직 나 혼자서…….’

그 순간, 내내 쓰고 있던 밀짚모자가 바람에 떠밀려 벗겨지면서 힘없이 바다로 추락했다.

모자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헛수고였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어.”

루미나는 노을빛 파도에 쓸려가는 모자를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람을 따라 검은 머리칼이 흩어지고, 문득 눈물이 차올랐다.

눈을 깜빡이자 뚝뚝 흘러내린 눈물이 바다가 됐다. 모자 또한 바다의 일부가 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루미나는 깨달았다.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그르치는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다소 충동적으로 한 몸처럼 챙겨 온 가죽 가방을 바다로 던졌다.

풍덩-.

루미나의 돌발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돌발행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거, 거기 아가씨! 지금 무슨!”

누가 말리려고 했지만 루미나는 그 전에 난간을 넘었다.

풍덩-.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읍, 으윽…….”

바다에 빠진 루미나는 수영을 할 줄 몰라 허우적대야 했다.

바다에 빠지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으니 수영을 미리 배워뒀을 리 없었다.

검은 가발이 벗겨지고, 바닷물에 쫄딱 젖은 루미나는 미리 던져놓은 가방을 붙잡았다.

부표처럼 떠오른 가죽 가방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떠 있으려고 애쓰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미나!”

루미나가 바다로 몸을 던지자마자 카라얀은 그녀에게로 헤엄쳐 갔다.

그가 금세 가까워져 붙잡아준 덕에 루미나는 거칠게 숨을 게워낼 수 있었다.

“수영도 못하면서 왜 이런 거야?”

“좋아해서요.”

“……뭐?”

“카라얀 님을 정말정말 좋아해요.”

인간은 욕망을 거스르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질투가 혐오스러운 감정이 아니듯, 모든 욕망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너무 사랑해서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봇물이 터지듯 루미나가 꾹꾹 눌러왔던 진심을 내뱉었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저택을 떠났는데, 너무 무서운 거 있죠. 당장 돌아가고 싶었지만 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서 버텼어요.”

이기적인 선택인 걸 알면서 그가 같이 위험해지는 것이 싫어서 홀로 이 짐을 짊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다신 보지 않을 결심으로 배에 타니까 오히려…….”

루미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보고 싶다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졌어요.”

싫다는 말을 해도, 위험하다 해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이 남자에 대한 마음이 생각보다 깊었다.

홀로 살아갈 거라며 당차게 나왔는데 막상 미래를 그려보니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제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카라얀이 루미나를 사랑하는 만큼 루미나 또한 카라얀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질린 적 없어요. 처음 했을 때 되레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고…….”

루미나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루미나의 얘기를 듣던 카라얀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탓이었다.

루미나의 고개가 카라얀 쪽으로 당겨졌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져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온기가 교환됐다.

비록 첫 입맞춤은 상상했던 것처럼 사과 향이 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달콤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입맞춤은 짠맛이 났다.

루미나는 그를 꽉 붙잡은 채 그 맛을 음미했다.

황금빛 바다가 너울거렸다.

그곳에서 두 연인이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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