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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44)화 (144/152)

***

푸흐흐.

생쥐 꼴이 된 카라얀이 배실배실 웃었다. 그는 아까부터 미친 사람처럼 자꾸 웃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쫄딱 젖은 채 그의 옆에 있던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카라얀 님은 저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도 웃음이 나와요?”

“응, 네가 곁에 있잖아.”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그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루미나가 그를 따라서 웃었다.

황혼으로 물든 바다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스미는 시각.

당장 타고 갈 배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러야 했다.

그들은 가까운 여관으로 갔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이 많은 니스에서 하룻밤을 보낼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해가 떠 있는 오후 중에 이미 숙소를 잡을 만한 사람들은 모두 숙박계를 썼으니 말이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빈방이 없다는 대답만 듣고 나왔다.

돈이 있어도 방이 없는 건 없는 거였다.

니스에 이 한 몸 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슬슬 지쳐갈 때쯤 희소식이 들렸다.

“방이라면 한 곳 남긴 했는데…….”

“좋아요! 그곳으로 할게요!”

재고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씻지도 못하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얼른 씻고,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요. 일인실이거든요. 괜찮으시겠어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카라얀과 루미나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좁긴 한데 연인끼리면 어떻게든 지내긴 하더라고요. 아시다시피 방을 구하기가 힘들잖아요.”

“그 방으로 하지.”

먼저 결정을 내린 건 카라얀이었다.

당혹스럽긴 하지만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것보다야 나으니 괜찮다는 자신의 속내를 그 짧은 시간에 읽었나 싶었다.

“씻는 건 인당 5실버를 지불하시면 목욕탕을 사용하실 수 있고, 저녁 식사는 인당 7실버예요.”

“둘 다 목욕탕을 이용할게. 식사는 이 인분으로 문 앞에 놔 줬으면 하는데.”

팁까지 건네주니 여관 주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열쇠를 받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방만 확인하고 바로 씻으러 가도록 해요. 그런데 갈아입을 옷이 있으세요?”

호세가 좋은 가방을 구해다 준 듯했다. 안에 있는 물건이 젖지 않았다.

덕분에 옷가지를 지킨 루미나는 여유로웠다.

“오는 길에 옷가게가 있던데 잠깐 들러야겠네요. 문 닫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숙소가 생기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짐 가방을 대신 들어주던 카라얀이 불쑥 말했다.

“내가 밖에서 잘게.”

“네?”

“일인실이라고 했잖아. 좁을 테니까 덩치 큰 내가 밖에서 자는 게 맞지.”

“뭘 그렇게까지 해요.”

“…….”

“아까 설명하는 거 같이 들었잖아요. 두 명이서도 괜찮대요.”

루미나가 강하게 밀어붙이자 카라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백기를 들었다.

“그러면 옷 가게가 문을 닫을 수도 있으니까 카라얀 님은 먼저 가 있으세요.”

203호실.

문 앞에 선 루미나가 더는 짐 가방을 대신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얘기했다.

그런데 카라얀이 선뜻 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그…….”

루미나가 빤히 쳐다보자 카라얀이 무어라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루미나는 그가 왜 이러는지 알아챘다.

“도망 안 가요.”

“…….”

“출항한 배에서 뛰어내리는 미친 짓까지 했는데 여기서 도망치면 제가 바보인 거죠.”

“……금방 다녀올게.”

“네, 네.”

목욕탕까지는 따라갈 수 없는 터라 카라얀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먼저 방에 들어가서 대충 짐 정리를 하던 루미나가 중얼거렸다.

“괜히 헛짓하지 말고 처음부터 같이 배를 타고 갔으면 지금쯤 바다 한가운데였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됐으면 가는 도중에 카라얀을 떨쳐내려고 했을 것 같았다.

믿음에 대한 문제보다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문제였다.

무사히 떠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목욕탕에 가서 찝찝한 몸을 씻고 돌아왔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열리지 않았다.

‘응?’

203호실이 맞았다.

열쇠도 제대로 썼는데 무언가 막힌 것처럼 문을 밀 수 없었다.

달칵달칵-.

“……?”

달칵달칵달칵-.

애꿎은 문고리만 잡고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루미나는 얼떨결에 쓰러지듯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괜찮아?”

“네? 네.”

다행히 문 앞에 서 있던 카라얀이 받아준 덕에 넘어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루미나는 그가 문을 지키고 있던 탓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문 앞에서 뭐 한 거예요?”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한 걸까.

씻고 와서 깔끔한 카라얀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카라얀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침대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침대로 눈길을 옮긴 루미나는 의아해졌다. 평범한 침대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바닥에서 잘게.”

조금 작았을 뿐이지.

“어차피 하룻밤이고, 아침 일찍 떠날 건데 꾸겨서 자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공작가의 커다란 침대만 봤을 카라얀에게는 많이 작아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바닥에서 자는 건 밖에서 자는 것만큼 최악인 듯했다.

바닥 공간이 그렇게 넓은 편도 아니었고.

루미나는 카라얀을 설득해서 겨우 한 침대에서 자기로 합의를 봤다.

그동안 한 침대에서 잔 역사가 길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밤이 되고,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운 루미나는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잖아!’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처음에는 등을 맞댄 채 자려고 했다.

하지만 괜히 일인용 침대가 아닌지 그렇게 되면 카라얀이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결국 루미나는 카라얀의 품에 안긴 채로 자야 했다.

루미나의 다리만큼 굵은 근육질의 팔이 그녀를 감싸고, 다른 한 팔은 베개가 돼 줬다.

그의 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루미나는 최대한 숨을 죽였다.

새삼 그의 덩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등을 맡긴 자세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자세로 눕게 됐다면 절대 잠들지 못했을 거다.

‘지금도 잠들지 못하고 있지만.’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 모로 누운 카라얀은 그 자세가 퍽 불편할 텐데도 불평불만 한 번 늘어놓지 않았다.

루미나는 그런 그를 위해서라도 몇 번이나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자자, 빨리 자자. 내일 일찍 일어나서 이른 배편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지금 딴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

하지만 시도는 시도일 뿐, 이상하게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지금쯤 피곤해서 늘어져야 하는데 말이다.

사실 루미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라얀 또한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으나 꼭 봐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쿵, 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루미나의 것이 아니었다.

카라얀의 것이었다.

‘어떡해.’

합방한 기간이 길었다고 하나 기껏해야 손 몇 번 잡은 게 끝이었다.

루미나는 어째서 그동안 카라얀이 구석에서 새우잠을 잤는지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래야 잘 수 있었구나…….’

콧잔등이 찌푸려질 만큼 힘을 줘서 눈을 감은 루미나는 결국 잠들길 반쯤 포기했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카라얀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너무 꼼지락거리지 마.”

“네?”

“네가 자꾸……. 건드리잖아.”

건드려? 뭐를?

루미나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카라얀이 다소 구체적으로 설명해 줬다.

“다리 말이야.”

순간 루미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린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제 품에서 바스락거리다가 끝내 제게로 숨어버리는 루미나가 귀여웠던 터라 카라얀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동그란 머리통에 뽀뽀를 했다.

뽀뽀를 한 번 하고, 두 번 했는데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걸 자각하면서도 카라얀이 참지 못하고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또 키스해도 돼?”

지독히도 낮은 음성이었다.

놀란 루미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는 가슴팍에서 얼굴을 뗐다.

“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다소 성급하게 루미나의 입술을 덮쳤다.

바깥쪽에 자리를 잡은 루미나는 그와 거리를 벌리면 바닥으로 추락하게 돼 꼭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점차 거세져서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오래된 침대가 삐걱거렸다.

***

“……죽을 것 같아요.”

다음 날 아침, 루미나가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붙잡은 채 중얼거렸다.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는 루미나와 달리 카라얀은 생생했다.

심지어 다 죽어가는 자신과 달리 웃는 얼굴이라 얄미웠다.

“여기서 평생 살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루미나가 그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며 질색했다.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위험했다.

루미나는 되도록 자신을 추격하는 루키우스와 박사가 카라얀과 대치하는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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