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표는 구해 왔어요?”
“응, 아까 사환한테 부탁했지. 이른 오후쯤에 배편이 있다고 했어.”
루미나와 카라얀은 결국 이른 오후쯤에 떠나기로 했다.
‘새벽 배를 타고 떠나고 싶었는데.’
루미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일정이 밀려서 불안한데 카라얀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어제부터 자꾸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참 즐거워 보였다.
루미나는 아픈데 그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니 참 얄미워 뺨이라도 꼬집고 싶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보이지 않은 이유는 고통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그가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걸을 수 있겠어?”
“네……. 금방금방 나으니까 이것도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
루미나는 뒷말을 삼켰다.
외부의 상처면 몰라도 이런 내적 타격은 처음 입는 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오전 내내 카라얀이 극진히 간호했다. 식사를 직접 입에 넣어주는 건 물론이고, 온몸을 조물조물 주무르거나 두드려줬다.
그 덕분인지 루미나는 겨우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이번만큼은 배를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업어줄까?”
“호의는 감사하지만, 시선을 끌면 곤란해요. 그리고 충분히 걸을 수 있는걸요!”
침대에서 나와 씩씩하게 걷는 척하던 루미나는 허리 통증 탓에 금세 소심하게 걸어야 했다.
그 모습을 웃지 못한 채로 바라보던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내쳐졌다.
“항구까지는 금방이잖아요.”
결국 카라얀은 짐 가방만 들게 됐다.
여관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항구로 이동했다.
“그거 알아?”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서 루미나가 그를 올려다봤다.
“대학살 날, 어떤 여자가 날 구해줬다고 했잖아.”
“네, 알죠.”
선뜻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루미나는 절로 긴장하게 됐다.
‘설마…….’
그 여자를 닮아서 좋아하게 된 거라는, 마음 식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손끝이 식었다.
그런데 카라얀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예상과 사뭇 달랐다.
“그 사람이 너였어.”
루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하지 말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대학살은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카라얀 님이 만났다는 사람은 지금 제 나이쯤 아니에요?”
“맞아.”
“절대 저일 수 없어요.”
루미나가 단호히 말했다.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을뿐더러 시간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인데, 시간을 뛰어넘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너였어.”
어쩐지 단호한 구석이 있는 말투였다.
“나와 같은 까만색 가발을 쓴 너도 알아봤잖아. 그런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할 리 없어.”
환히 웃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루미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팡-!
이질적인 소음이 크게 났기 때문이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하늘에 불꽃이 수놓아졌다.
당황한 건 두 사람뿐만 아닌 듯했다. 주변에 있던 행인들이 웅성거렸다.
“어머, 어머.”
“한낮에 웬 불꽃놀이람.”
“들은 얘기 있어요?”
“그럴 리가. 뭐, 낮이라도 폭죽은 예쁘니 됐지.”
당혹스러운 한편, 나쁜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루미나와 카라얀도 잠깐 멈춰서 푸른 하늘에서 반짝이는 불꽃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어?’
루미나의 콧잔등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루미나는 곧바로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훑어봤다.
‘가루?’
불꽃이 터짐과 동시에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힘들 만큼 고운 가루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뻥 뚫린 길을 걷고 있었기에 의아했다.
루미나가 가루의 정체를 알기 위해 냄새를 맡으려던 순간-.
“꺅!”
근처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의 근원은 한 곳이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공포가 담긴 비명과 고통에 찬 신음이 퍼졌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루미나는 각각 다르게 생긴 마물을 발견했다.
아니, 그건 방금까지 인간이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람들이 마물이 되고 있었다.
“윽.”
그리고 그건 카라얀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그가 손을 치웠을 때는 흰자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또한 머리 위에는 늑대 같은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카라얀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날개.”
마물이 돼서 이성을 놓은 사람들. 혹은 아직 마물이 덜 된 상태에서 마물에게 습격을 받은 사람들.
그들이 뒤섞여 도시는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날개가…….”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루미나의 날개를 본 그는 황급히 그녀를 감쌌다.
“카라얀 님, 숨 참으세요!”
가루가 원인이라고 생각한 루미나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카라얀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루미나가 마물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루미나만이 오롯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능력, 쓰지 마.”
“하지만 제가 진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너도 조절하지 못하는데 무슨 소리야.”
“그건 제 능력이 저한테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카라얀 님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루미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트 공자비, 여기 있었구나.”
황급히 뒤돌아보니 엘리엇이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사람처럼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트 공자도 같이 있었군. 상황이 좋지 않으니 어서 대피하도록 하지. 이쪽으로 따라와.”
다소 강압적인 어투였다.
그는 정신이 없는 틈을 타 황급히 그들을 안내하려는 듯했다.
“황자님이 어째서 이곳에 계시나요?”
“마르셀에게서 도망쳤다가 자네들을 보게 됐네. 아, 소식을 들었을지 모르겠군. 마르셀이 나를 인질로 삼아 황궁을 탈출했었지.”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의 태연한 언변에 넘어가지 않았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어서 가지 않고. 이러다가 다 같이 마물한테 먹히고 말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마물처럼 변하는 이 상황에 어째서 황자님만 멀쩡한 걸까요?”
부드럽게 올라가 있던 엘리엇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모르는 척 따라와 줄 수는 없는 모양이군. 조용히 따라왔다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엘리엇은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 안에 있던 걸 뿌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고운 가루였다.
“카라얀 님!”
그와 동시에 카라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루미나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레기온들은 후각이 민감하니 더욱 치명적일 테지.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지 않나? 그건 자네가 본성을 억누르려고 하기 때문이야.”
엘리엇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카라얀을 내려다봤다.
식은땀을 흘린 카라얀은 이내 무릎으로조차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완전히 쓰러졌다.
“어째서 참는 거지? 어차피 이 도시에 남은 인간은 없지 않은가. 인간과 달리 마물을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
“…….”
“물론 옆에 있는 사람을 가장 먼저 죽이려 들겠지만.”
그들의 앞으로 다가간 엘리엇이 루미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루미나가 더럽다는 듯이 바로 쳐냈지만 그를 완전히 떨쳐내긴 역부족이었다.
“순순히 따라가면 이 사태도 끝이 나겠지. 그래도 버티고 있을 건가?”
엘리엇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한 루미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자한테서 도망쳐야 하는데 카라얀 님이 쓰러진 지금은 방법이 없어.’
붙잡힌 어깨가 아파 오는 걸 느끼며 루미나가 입을 열려는 그때.
“놔.”
어금니를 꽉 깨문 카라얀이 엘리엇의 발목을 붙잡았다.
“루미나를…….”
“걱정하지 말게. 공자 또한 함께 갈 테니까. 그러고 보니 공자는 참 재미있군. 내게로 데려오려 할 때마다 혼자가 아니니까. 예전에는 음, 어미와 함께였던가?”
“너.”
카라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릴 적 자신을 납치한 자가 눈앞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카라얀은 엘리엇의 발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러나 엘리엇은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카라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사이에서 루미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처음부터 목표는 저였잖아요. 그러니까 카라얀 님을 내버려두면…….”
“안 돼!”
카라얀이 말허리를 끊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하나뿐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됐다.
“그러면 순순히 따라갈게요. 약속했던 대로 이곳 사람들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거예요.”
“음.”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카라얀과 루미나를 훑어보던 엘리엇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약 성립이야.”
엘리엇이 손을 뻗었다.
루미나가 그 손을 잡자 그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
“일어났군.”
콧노래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루미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돌벽, 갖은 모양의 플라스크가 비치된 나무 책상, 흐릿하게 번지는 빛.
낯선 장소였다.
엘리엇의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기억이 뚝 끊겼던 루미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하트 공작이 내 연구실을 한 번 없애버린 전적이 있어서 다시 연구실을 세우느라 고생했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
“그런 이유 탓에 혹시 몰라서 재워 둔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런 말로 안심이 될 리 없었다. 루미나가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엘리엇 아니, 박사가 딴소리를 했다.
“동화책은 잘 받았나?”
박사는 동화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듯 빙긋 웃었다.
“아름다운 얘기지.”
“징그러워. 진짜 엘리엇 황자를 어떻게 한 거야.”
그의 미소가 가식처럼 느껴졌다. 젊고 연약한 모습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더더욱.
날카롭게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엘리엇의 그림자가 루미나 쪽으로 이동했다.
루미나의 앞까지 꾸물거리며 이동한 그것에서 이내 노인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레……기온.”
“박사?”
그 기괴한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란 루미나는 이내 얼굴을 알아봤다.
언제나 조심하라고 경고를 받았던 박사의 얼굴이었다.
“박사? 아, 하트 공작이나 브랜든은 날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더군. 비록 학위는 없지만 마음에 드는 호칭이야.”
날이 선 루미나와 달리 엘리엇은 말투에서부터 시종일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원래의 내 얼굴이지. 주름이 져서 네 말대로 징그러울지도 모르겠군.”
박사가 돌아오라는 듯이 손짓하자 노인의 얼굴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