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얼굴을…….”
그림자가 사람의 얼굴 형체를 한 것이 충격적이었던 터라 루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브랜든은 본인의 얼굴을 몰라서 진짜 얼굴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
루미나와 달리 박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신을 아는 건 중요한 거야. 뿌리를 잊는 순간 정체성이 흔들리니까. 그래서 나는 내 진짜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자에 담았지.”
“그렇다면 엘리엇 황자는 역시…….”
박사가 직접 쓴 동화책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엘리엇은 착한 황자였지. 너무 착한 아이여서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내가 완벽한 엘리엇으로 살았으니 그 애도 만족할 거야.”
타계한 황후는 단순히 아들이 다리를 다쳐서 존재를 부정한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것이다.
사고 이후 사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배 아파 낳은 제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지만, 박사의 연기는 완벽했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 미치광이 취급받다 삶을 마감하게 됐다.
박사는 엘리엇뿐만 아니라 황후의 삶까지 시궁창으로 처박은 것이다.
“루미나. 나의 사랑스러운 레기온. 새로운 연구실을 소개해 주도록 하지.”
엘리엇이 루미나를 일으켜 세웠다.
연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역겨웠지만, 루미나는 불쾌한 티를 냈을 뿐 반항하지 않았다.
‘확실히 박사는 레기온, 그것도 내게 호의적이야.’
그 점을 이용해서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순순히 박사를 따라갔다.
그는 더 이상 엘리엇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다리를 저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루미나와 함께 이동했다.
“원래는 수많은 레기온들이 내 밑에 있었지. 마찬가지로 하트 공작의 손에 죽어버렸지만. 그날을 대학살의 날이라고 부른다지.”
박사는 납치범치고는 루미나에게 퍽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텅텅 빈 철창을 스쳐 지나가며 꼭 안 해도 될 얘기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참 안타까워. 등록되지 않은 레기온들을 힘겹게 모았는데 한순간에 모두 죽어버렸으니까.”
“……어째서 레기온을 납치한 거야?”
“레기온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생명체니까. 그중 너는 다른 레기온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축복받은 존재지.”
질문과는 다른 대답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박사가 문득 멈춰 섰다.
루미나는 그를 따라서 철창 너머를 쳐다봤다.
“……마르셀 전하?”
마르셀이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하던 그가 루미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곧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하트 공자비?”
루미나를 알아본 마르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하트 공자비! 내가 아무리 폐위당했다고 하나 황가의 적통이지. 지금 날 도와주면 큰 보상을 해 주겠네!”
“…….”
“나와 함께 저 괴물을 처단하고 나가는 거야!”
마르셀을 도와준다고 해서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루미나가 선뜻 나서지 못하자 엘리엇이 철창문을 열고, 마르셀에게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마르셀이 버둥거렸다.
“엘리엇! 엘리엇!”
“…….”
“설마 옛날 일로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야? 마물을 마주쳐서 다리를 다친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지? 나 혼자 도망쳐서 그렇다고!”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덕분에 이 착한 소년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겁에 질린 마르셀의 귀에는 박사의 속삭임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박사가 검은 액체가 든 주사기를 들자 마르셀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엘리엇! 넌 내 동생도 아니야!”
“이제야 알았군.”
박사는 마르셀의 목에 주사기를 꽂았다.
곧이어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루미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이 정도면 반쯤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군.”
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마르셀의 얼굴에 검은 점액질이 생기면서 그는 생선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힘겹게 입을 빠끔거리며 말라갔다.
“우리는 모두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지. 그럼에도 인간성이 크기 때문에 인간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거고.”
엘리엇은 죽어가는 마르셀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어쩐지 혐오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약해. 마물은 강하지만 보다시피 지능이 없지.”
마르셀이 고통에 찬 울음 같은 소리를 미약하게 내며 끝까지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점점 숨소리는 작아지고, 발버둥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레기온은 어떻지? 완벽한 존재지. 근원적 존재인 마물의 강력함과 인간의 지능을 모두 지니고 있으니 말이야.”
마르셀의 숨이 멎었다.
박사는 고개를 돌려 루미나를 쳐다봤다.
“정말 사랑스러워.”
마르셀을 쳐다볼 때와 달리 그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완벽한 존재로 태어나지. 비록 나는 선택받지 못했지만, 너로 인해 이제 곧 완벽해질 거야.”
그것이 어째서 레기온을 납치했냐는 루미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박사. 그는 레기온이 되기 위해 레기온을 납치한 것이다.
“비록 루키우스, 그자 때문에 시기가 늦어졌지만…….”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루키우스를 향한 원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금세 갈무리한 그는 빙긋 웃으며 루미나에게 말했다.
“아, 혹시 그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고 싶나?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내가 치유의 레기온이니까?”
“그렇지. 치유라기보다 전이에 가깝지만, 전설에서는 치유라고 부르지. 아마 마물을 인간으로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일 거야.”
박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루미나는 나서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거라 예상했는지 박사는 죽은 마르셀을 지나쳐서 연구실을 계속 구경시켜 줬다.
자신의 아지트를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소원을 들어주는 애뮬릿이지.”
반짝이는 광물이었다. 보석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안에 흰 꽃이 있었다.
루미나가 토해냈던 것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애뮬릿.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몰라도 이 꽃까지 들어 있다면 진짜일 확률이 높겠지.’
박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을 둘러보는 동안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아예 어딘가로 나갈 수 있는 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내가 여기로 들어온 이상 문은 있을 거야. 다만 내가 찾을 수 없겠지.’
루미나가 애뮬릿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박사가 말했다.
“자네의 행적을 뒤쫓기 위해 가장 먼저 엔디미온 군에게로 찾아갔지. 그런데 입을 꾹 다물더군.”
루미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엔디미온을 어떻게 한 거야?”
“당장은 별일 없을 테지만, 또 모르지. 자네의 행동에 따라 달라질지도.”
카라얀에 이어 엔디미온까지.
자꾸만 소중한 사람으로 협박당하게 된 루미나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애뮬릿을 낚아챈 루미나가 박사에게서 도망치듯 달려갔다.
그리고 거리를 적당히 벌리고 외쳤다.
“나를 제도로 보내줘!”
그러자 애뮬릿이…….
“하하.”
반응하지 않았다.
“제법 귀여운 돌발행동이었어. 다만 흑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는군.”
시험지를 채점하는 교수 같은 발언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루미나는 빛 나비를 꺼내서 애뮬릿 위에 앉혔다.
그런데도 애뮬릿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시전자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이뤄주는 도구는 맞지만, 그런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 거야. 장난은 그만두고 돌려줘.”
“내가 왜?”
박사의 그림자가 예고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루미나의 손바닥에 있는 애뮬릿을 빼앗으려고 했다.
비록 소원은 이뤄주지 못했지만 어떤 효과가 있는 건 맞는 듯했다.
루미나는 애뮬릿을 빼앗기지 않도록 몸을 뒤로 빼면서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 과정에서 그림자가 손바닥을 스치고, 생채기가 생겨서 피가 났다.
“아무리 괘씸해도 다치게 하면 안 되지. 저 아이는 하나뿐인 박제품이 될 테니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일단 무작정 도망치려는 그 순간 빛이 퍼졌다.
애뮬릿에서 나는 빛이었다.
순식간에 빛이 주변을 삼킬 만큼 커지는 탓에 루미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여기는…….”
쏴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사의 연구실이 아닌 비가 내리는 야외. 하지만 원했던 것과 달리 제도의 풍경은 아니었다.
맞은편에 있던 박사 또한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진짜로 탈출한 건가?”
애뮬릿을 잡고 비는 건 마지막으로 구명줄을 잡는 심정으로 시도했던 터라 얼떨떨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애뮬릿을 꼭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쿵-!
심장이 떨어질 듯한 큰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루미나는 빗길을 달리던 마차가 절벽에서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엉망진창으로 절벽을 구른 마차가 반쯤 부서진 채 근처에 떨어졌다.
다급히 마차로 달려간 루미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럴 리 없어.’
마차의 깨진 유리창을 통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친부와 계모였다.
예전에 죽은 그들은 기억 속과 똑같은 모습으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환각인가?’
쏟아지는 빗물이 얼굴을 적셨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지만 죽은 듯한 그들의 모습은 변치 않았다.
“아야.”
뺨을 꼬집으니 아팠다. 루미나는 이것이 환각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빗소리에 묻힐 듯한 가녀린 신음이 들렸다.
“으으…….”
루미나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린 엔디미온이 마차에 깔려있었다.
그 순간 현실감이 훅 들었다.
따지고 보면 아예 정신만 시간을 역행한 적도 있는데 몸도 시간을 거스르는 게 안 될 리 없었다.
게다가 박사의 발명품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소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제도로 보내달라는 소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긴 해도, 애뮬릿은 루미나에게 반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루미나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과거로 되돌아온 거라면 엔디미온은 이때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이 도와준다고 했어.’
어린 엔디미온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엔디미온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도 정체를 알고자 했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멀리 떨어져서 마차를 지켜봤다.
하지만…….
‘왜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