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47)화 (147/152)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다.

루미나는 어린 엔디미온을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지만,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비도 오는 데다 인적이 드문 곳인데 도와줄 사람이 나타난다는 게 이상하긴 해.’

엔디미온의 가냘픈 숨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이 자꾸만 떠올랐다.

심지어 비가 내려서 빠르게 체온을 빼앗기고 있을 터.

‘지금 엔디미온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부모님과 함께 엔디미온이 죽은 세상에서 살게 되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드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루미나는 뛰쳐나가듯 엔디미온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차에 깔려서 옴짝달싹 못 하는 소년을 붙들었다. 온 힘을 짜낸 끝에 끌어낼 수 있었다.

“아…….”

정신을 잃고 있던 소년이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흐릿한 시선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괜찮아.”

당장 루미나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엔디미온이 제 얘기를 제대로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차갑게 식은 소년이 곧이어 다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엔디미온을 끌어안은 루미나는 능력을 썼다.

빛으로 만들어진 나비 한 마리가 엔디미온의 앙증맞은 콧잔등 위로 앉더니 사라졌다.

“다리도 치료하고 싶지만, 내게 할 일이 남았어. 이 다리로 널 살려줄게.”

찬 기운이 훅 끼쳤다.

엔디미온의 상처가 일부 넘어오면서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루미나는 얌전히 있을 수 없었다. 엔디미온을 살리고 싶다면 그래서도 안 됐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멀쩡한 다리로 숲을 헤치고, 포장된 도로가 나올 때까지 달렸다.

지리를 알지 못했기에 무작정 빗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숨이 벅차오르고, 하얀 입김이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듯했지만 루미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하늘도 알고 있는 것일까. 마침 지나가던 마차를 세울 수 있었다.

“저쪽에서 마차가 전복됐어요!”

“뭐? 마차가?!”

“어른들은 즉사한 것 같고, 어린애가 한 명 있는데 지금 당장 가면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선량한 마부는 루미나의 설명을 듣고 곧바로 엔디미온을 구하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같이 가지 않을 건가?”

“네, 저는…….”

루미나는 지금쯤 아무것도 모른 채 다락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 열두 살의 자신을 떠올렸다.

“지나가던 길이라서요.”

루미나가 미소 지었다.

마부는 그런 루미나를 걱정하는 듯했으나 마차 사고를 겪은 아이도 문제였다.

결국 마부는 루미나를 두고 그녀가 알려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홀로 남게 된 루미나는 금이 간 애뮬릿을 손바닥 위에 올린 채 내려다봤다.

애뮬릿이 느릿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경고를 하듯이.

“잘한 거겠지.”

루미나는 아까부터 자신의 몸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마부가 수상하게 여기기 전에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박사는 이 애뮬릿이 시전자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이뤄준다고 했다.

처음 루미나가 바란 건 제도로 가는 것.

‘단순히 순간이동을 시켜달라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의미겠지.’

대신 다른 방향으로 소원을 들어줬다.

엔디미온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

애뮬릿은 시간을 뛰어넘어 그 소원을 들어준 거다. 비록 현재의 엔디미온은 아니지만.

이제 애뮬릿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박사의 손아귀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그때 루미나의 머릿속에 카라얀이 했던 얘기가 스쳐지나갔다.

“대학살 날, 어떤 여자가 날 구해줬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너였어.”

“설마…….”

***

“항구 도시 전체가 마물 밭이 되다니. 살다 살다 이런 일은 또 처음 보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제스퍼가 마물의 사체를 발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평소 제도에 남아서 카라얀이 폭주할 때마다 도움을 줬던 레기온, 제스퍼는 오랫동안 카라얀이 폭주하지 않으며 평화로운 백수 생활을 영위했다.

그런데 항구 도시에 수많은 마물이 몰려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파견을 나왔더니 오랜만에 보는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바로 카라얀이었다.

외양을 보면 폭주를 한 듯한데, 정작 하는 행동은 폭주했을 때의 그것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날뛰어야 마땅한데 가만히 있지를 않나.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제스퍼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카라얀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내 말은 들리냐?”

“닥쳐.”

카라얀이 사납게 대꾸했다.

제스퍼가 영 못마땅한 듯 카라얀을 쳐다보고 있자니 거대한 검은 형체가 그들과 가까워졌다.

“카라얀.”

루키우스였다.

그의 뒤에는 브랜든도 있었다.

움찔한 제스퍼는 루키우스와 한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슬금슬금 사라졌다.

“결국 붙잡힌 건가?”

인간의 행색으로 돌아온 카라얀을 내려다보며 루키우스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데려갔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다면 말해라. 이젠 너도 알겠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몰라, 모른다고!”

“…….”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카라얀이 뒤늦게나마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루미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자에게 끌려갔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자꾸만 주저앉게 됐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다.”

“알겠어, 대장. 황자를 추적하는 기사들에게 연락해 놓을게.”

브랜든이 분주한 걸음으로 사라지고, 루키우스는 아들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이곳의 마물을 죽였나?”

“……아니.”

“잘했다.”

본인이 들은 얘기가 환청은 아닌지 의심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카라얀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루키우스의 멱살을 잡았다.

“잘했다고? 난 결국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한 머저리가 됐는데 잘했다고?”

일방적인 분풀이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라얀은 눈앞에 이 작자에게 분노를 느꼈다.

“루미나를 끌고 간 자가 예전에 날 납치한 자식이라며. 하지만 그 황자는 아직 젊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

“대체 나한테 뭘 숨기는 거야?”

루키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

루키우스가 움찔했다.

카라얀은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우리가 정말로 가족이라면 적어도 가족에 관한 얘기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일의 진실을 루미나에게 전해 들었어. 그때 얼마나 내가 바보 같다고 느껴졌는지…….”

“…….”

“말로만 날 위한다는 당신은 모르겠지.”

“카라얀.”

“나는 모든 기억을 잃고 어머니가 살아 있는 시간으로 돌아가길 바란 적 없어. 그건 전혀 날 위한 일이 아니라고.”

루키우스의 멱살을 잡은 카라얀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비참하게 고개를 숙인 아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루키우스는 그간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

루미나는 박사에게서 빼앗은 애뮬릿의 원리를 짧은 시간 동안 추측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자신의 에테르를 필요로 한다.

두 번째. 자신의 혈액을 필요로 한다.

세 번째. 바라는 시간대로 보내준다. 유효시간은 그다지 긴 것 같지 않다.

그 추측을 토대로 루미나는 다시 한번 애뮬릿을 발동시켰다.

마찬가지로 애뮬릿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와 눈을 감았다가 뜨니 더는 비가 쏟아지는 숲이 아니었다.

‘여기는.’

박사가 소개해 줬던 연구실과 똑같았다.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한 루미나가 황급히 몸을 숨길 곳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그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비어 있던 철창 안에 레기온들이 갇혀 있는 것이다.

박사가 그새 레기온들을 납치해 가둬 둔 것은 아닐 테니.

‘과거로 온 거야.’

루키우스가 박사의 연구실을 박살 내기 이전으로.

루미나는 당장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균열이 더 심해진 애뮬릿을 꽉 쥐었다.

박사가 망친 인생이라면 그가 만든 물건으로 인생을 복구하는 것이 합당한 일 아니겠는가.

루미나가 애뮬릿에 대고 바란 소원은 딱 한 가지였다.

카라얀이 행복해지는 것.

그녀는 지금부터 카라얀의 과거를 바꿀 생각이었다.

‘만약 공작부인께서 무사히 살아서 구출되면 공작님과 카라얀의 사이가 냉랭해질 일도 없겠지.’

또한 카라얀이 비가 오는 날마다 슬퍼할 일도 없을 거다.

루미나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꿨듯, 이 애뮬릿을 이용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살금살금-.

귀를 쫑긋 세운 루미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철창 안에 갇혀 있는 레기온들은 전부 기절한 것처럼 정신을 잃은 채였다.

따로 경비는 없었지만 혹시 몰라 긴장한 채로 가고 있는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은 내버려둬.”

루미나는 황급히 벽에 몸을 붙인 채 숨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

“어머니! 그건……!”

“내가 두 눈 뜨고 있는 한 내 아들한테 손대지 못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곧이어 철창문이 열리더니 여인이 괴한들의 손에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리스 폰 하트.

초상화 속 그녀였다.

괴한들을 막아서려던 루미나는 주먹만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레기온이지만 그녀에게 막강한 무력은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하트 모자를 구해내야만 했다.

아이리스가 끌려가고, 곧이어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루미나는 카라얀이 갇힌 철창 앞에 섰다.

“윽…….”

어린 카라얀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안타까운 한편 다른 마음도 들어 루미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작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카라얀이 너무 귀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