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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48)화 (148/152)

‘아, 참.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심각한 와중에!’

어린 카라얀을 쳐다보던 루미나는 정신을 차리고 철창을 열기 위해 열쇠부터 찾았다.

아까 아이리스를 끌고 가던 괴한들을 눈여겨본 덕에 열쇠 보관함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열쇠를 찾은 루미나가 무사히 철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느낀 카라얀이 고개를 힘없이 들었다.

“넌 뭐야?”

약 기운 탓인지 몸이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그가 내뿜는 살기만큼은 살벌했다.

몇 년 동안 제게 카라얀만 봐 와서 깜빡했는데, 그는 원래 싹둥바가지 없는 성격이었다.

루미나는 카라얀이 어릴 때부터 성질머리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여 큰일이었다.

“쉿.”

“뭐, 뭐야?!”

루미나는 혹 소리를 듣고 누군가 이곳으로 올까 봐 검지로 카라얀의 입술을 눌렀다.

당황한 카라얀이 허둥지둥했다.

“난 널 도와주러 왔어.”

“도와줘? 그럴 리가 없잖아.”

루미나가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납치됐는데 갑자기 누가 들어와서 도와주겠다니.

감사하기는커녕 불신이 샘솟고, 괴한들과 한패처럼 느껴질 만도 했다.

“도와줄 생각이 아니면 왜 도둑처럼 살금살금 돌아다니고 있겠어?”

루미나는 최대한 자신의 진심이 카라얀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그래서 그와 눈높이를 맞춘 채로 말했다.

“난 여기서 널 꺼내줄 거야. 그리고 같이 납치된 어머니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 줄게.”

“…….”

“꼭.”

루미나를 빤히 쳐다보던 카라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 대신 끌려갔어.”

“아까 어디로 가는지 봤어. 그런데…….”

카라얀의 무력을 이용하면 수월하게 탈출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카라얀은 한눈에 봐도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실상 루미나를 믿은 것도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미나의 시선에서 난처함을 읽은 어린 카라얀은 분노에 찬 듯했다.

“몸에 힘만 들어갔어도 이깟 철창 따위 처음부터 우그러뜨릴 수 있었을 거야!”

그러나 당장 쓸모없는 인력이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면 내가 그분을 구하고 올게. 그동안 아까처럼 아픈 척하고 있어.”

“난 아프지 않아.”

“그들이 의심하지 않아야 하니까 얘기하는 거야. 할 수 있지?”

확실히 제 나이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큰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였다.

젖살이 남아 있는 카라얀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철창을 닫은 루미나는 아이리스가 끌려갔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박사의 안내 덕분에 이곳 지리가 훤했다.

‘저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루미나는 아이리스를 끌고 간 괴한들을 피해 숨었다.

“돈만 많이 안 줬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딱 봐도 위험하잖아. 애를 납치했으니 이제 하라는 일만 대충 하고 손 터는 거야.”

“난 이 망할 지하에 온 지 몇 시간 됐다고 벌써 햇빛이 그리워졌어.”

몸을 숙인 루미나는 그들을 피해 돌아갔다.

만약 길을 알지 못하면 헤맸을 만큼 넓고, 복잡했다.

아이리스를 찾기 위해 안쪽의 기척을 기민하게 들어가며 조심스레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끼이이익-.

근처에 있던 문이 열렸다.

루미나가 몸을 숨기자, 늙은 남성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역시 미완성이야, 미완성. 그 어린 레기온의 힘이 있다면 완벽해질 수 있을까?”

그는 다소 거친 걸음으로 루미나와 반대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가 박사라는 걸 직감한 루미나는 그가 나왔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아이리스가 팔이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도와주려고 왔어요. 일단 이거부터 풀어드릴게요.”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던 아이리스가 루미나를 쳐다봤다.

“왜 나를……?”

“당신이 살아야 모두가 행복해지니까요.”

아이리스를 묶은 매듭이 잘 풀리지 않았다.

루미나가 성급히 손을 놀리고 있으니 아이리스가 힘없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 내 모습이 보이니?”

“당연히 보이죠.”

“아니, 내 얼굴 말이야.”

그제야 루미나는 아이리스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초상화 속,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은 익히 알던 것과 달랐다.

“설마.”

“그래, 이제 알겠니? 나는 이미 늦었어.”

아이리스의 이마에는 뿔이 돋아나 있었다. 그 모습이 물고기가 되던 마르셀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 또한 마르셀처럼 마물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십 년 전의 과거여서 박사가 주입한 약물의 효과가 떨어지는지 그 속도는 마르셀보다 느렸다. 그러나 천천히 인간의 모습을 벗어날 터였다.

“아뇨, 늦지 않았어요.”

하지만 루미나는 단호히 부정했다.

“사실 저는 미래에서 왔어요. 그곳에서 당신은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요. 아들이 결혼하는 모습도 보고 말이에요.”

현실이 아닌 루미나, 자신이 바라는 미래였다.

오늘 루미나가 과거를 바꾸면서 실제로 일어나길 바라는 미래.

“루크의 눈은.”

아이리스가 마른 입술로 느릿하게 발음했다. 루미나는 루크가 루키우스의 애칭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이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숨기지 않은 채로 다니니?”

“……네.”

“그래, 그렇구나.”

아이리스는 어느 정도 납득한 듯했다.

비현실적인 얘기였지만, 당장 본인만 해도 마물이 돼 가고 있으니 굳이 부정하지 않는 듯했다.

“됐어요!”

이내 아이리스를 속박했던 끈이 풀렸다. 루미나는 그녀와 함께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잠깐. 혹시 네 망토를 빌려줄 수 있을까?”

“네?”

“이런 모습을 아들한테 보일 수 없어서.”

“아, 네. 그렇게 하세요.”

루미나는 망토를 벗어 아이리스에게 건네줬다. 그녀는 자신의 뿔이 잘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눌러썼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서 카라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카라얀, 괜찮니?”

“어머니! 어머니는요?”

철창을 열자 어린 카라얀이 아이리스의 품에 안겼다. 감격스러운 모자의 재회였다.

“보다시피 엄마는 괜찮아. 별 일이 있기 전에 이분이 도와줬어.”

아이리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카라얀은 아이리스가 정말로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빼며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후드를 벗어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엄마가 춥다고 하니까 겉옷까지 빌려준 친절한 분이야. 그런데 출구는 알고 있는 거니? 어서 이곳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춥다는 핑계까지 대며 카라얀에게 얼굴 전체를 보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아이리스가 루미나를 돌아봤다.

“네, 아마 그곳이 맞을 거예요.”

아이리스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루미나는 이곳의 구조를 일일이 비교해 봤다.

새로 만든 박사의 연구실과 이곳이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어떤 문의 존재 여부였다.

루미나는 그곳이 출구라고 확신했다.

‘한번 없어진 연구실을 똑같이 재현해 놓을 만큼 강박증이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문 하나를 그냥 빼먹었을 리 없겠지.’

박사는 새로운 연구실을 일일이 소개하며 루미나에게 출구가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참 다행이었다. 덕분에 틀린 그림을 찾듯 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됐으니까.

세 사람은 출구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 징조가 느껴졌다.

쿵-!

‘무슨 소리지?’

쿵-!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쿠구궁-!

착각이 아니었다.

콰앙-!

지반이 흔들리면서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빗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정말로 천장이 무너진 듯했다.

루미나는 그 사태의 원인이 루키우스라는 걸 눈치챘다.

납치당한 아내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박사의 본거지를 찾아낸 것이다.

“젠장, 침입자다!”

“그 노인네가 말했던 버튼을 눌러!”

카라얀과 아이리스를 납치했던 용병들은 자신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거대한 검은 존재를 인식하고 혼비백산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한 명이 고용주의 지령대로 다급히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레기온들이 갇힌 철창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흰 가루가 쏟아졌다.

“뭐야,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잖…….”

용병은 그 뒷말을 할 수 없었다.

철창에서 나온 레기온이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으악! 살려줘! 악!”

용병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는 레기온들에게 붙잡혀 있는 틈을 타 세 사람은 탈출구로 갔다.

바로 루키우스에게 가는 방법도 있지만, 레기온들이 날뛰는 지금은 탈출구로 안전하게 나가는 편이 나았다.

“저기예요.”

출구가 맞는지 확인하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제발 출구이길 바라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구조물이 떨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리스와 루미나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그들보다 앞서 나가던 카라얀의 머리 위로.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뒤따라가던 루미나의 몸이 먼저 나갔다.

쿵!

“윽…….”

카라얀을 끌어안은 채 미끄러지듯 앞쪽으로 넘어진 루미나의 발끝에 거대한 구조물이 내려앉았다.

만약 저 아래 깔렸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거다.

“다치진 않았어?!”

루미나는 가장 먼저 카라얀의 얼굴을 살펴봤다.

다행히 상처 하나 없는 듯했다.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너!”

반면 카라얀은 못마땅한 듯했다. 놀람과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당장은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난 레기온이야. 네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굳이 날 구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어째서…….”

“아픈 건 레기온도 똑같잖아.”

자존심을 세우는 건 어릴 적이 더했다고 생각하며 루미나가 헤헤 웃었다.

안도감에서 나오는 미소였다.

“네가 다칠 수도 있었어. 아니,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네가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걸. 그보다 걸을 수 있지?”

루미나는 카라얀의 어깨를 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나가자. 아이리스 님께서는 괜찮으시죠?”

“그럼. 이 정도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단다. 그보다 너희 둘은…….”

깜짝 놀란 아이리스는 카라얀도, 루미나도 멀쩡한 걸 보고 안도했다.

“두 사람 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러면 손만 부탁할게.”

“네.”

아이리스가 루미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가로 막은 구조물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시 합류했다.

지하에 위치한 연구소는 루키우스의 습격과 이성을 잃은 레기온들의 난동으로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한시가 급했기에 그들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곧이어 세 사람 모두 무사히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길 바란 루미나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그곳에서 바람이 불어.”

카라얀의 중얼거림을 들은 루미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바람이 분다는 건 출구가 확실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다만 한 사람이 겨우 지나칠 수 있을 듯한 좁은 통로였다.

“어서 올라가요!”

루미나는 아이리스와 카라얀을 재촉했다. 아이리스가 먼저 루미나를 스쳐 지나갔다.

“넌 참 착한 거짓말쟁이구나.”

루미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었다. 멈칫한 루미나가 아이리스를 쳐다봤다.

“너처럼 친절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으니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겠어.”

‘아이리스 님은 내 정체를 눈치챘구나.’

그녀는 미래에서 왔다는 루미나의 얘기를 통해 많은 걸 유추한 듯했다.

자신의 죽음마저도.

쾅-!

이어서 카라얀이 문을 넘자 동시에 루미나의 눈앞에서 또 구조물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카라얀이 뒤를 돌아봤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먼저 가. 뒤따라갈게.”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와야 나갈 수 있다고!”

루미나는 직감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걸.

앞으로 카라얀에게 슬픈 일이 많이 생길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비록 과거를 바꾸지 못했지만, 루미나는 카라얀을 구하게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물 내음과 피비린내, 그리고 온갖 비명이 뒤섞인 공간에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속에서 루미나의 몸이 점차 흐릿해져갔다. 루미나는 깨지기 직전의 애뮬릿을 소중히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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