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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50)화 (150/152)

아라벨이 엘리엇을 데리고 사냥터로 떠났다는 얘기를 듣고 황제는 이마를 짚었다.

요즘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딸이 기어코 사고를 저지른 것이다.

사냥터는 엘리엇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를 겪은 이후 엘리엇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지 않았던가.

“꼭 사냥터로 가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던가?”

“황녀님께서 아플 때는 공기 좋은 곳으로 가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황제는 도통 아라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보게. 하트 공작. 어째서 엘리엇을 찾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찾아갈 거라면 얼른 황궁으로 복귀하라는 얘기를……. 하트 공작?”

방금까지 루키우스와 카라얀이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창 얘기하던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시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언제부터 없었나?”

“사냥터로 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허, 참. 행동이 그렇게나 빠르다니. 공작도 아직 젊어.”

머쓱해진 황제는 일부러 딴말을 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남은 두 자식들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

“오라버니. 내 말이 맞지?”

아라벨이 웃으며 엘리엇을 봤다.

다그닥, 다그닥-.

각자 말을 탄 채로 나무가 우거진 사냥터를 가로지르는 그들은 제법 평화로워 보였다.

“공기 좋은 곳에 있으니까 안색이 훨씬 낫잖아. 방에만 콕 박혀 있으면 오히려 마음의 병을 키우는 거야.”

“우리 벨이 예쁜 말을 하는구나.”

“그럼. 난 언제나 예쁜 말만 했어.”

당당하게 웃던 아라벨이 갑자기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엘리엇 쪽으로 던졌다.

히이잉-.

제게 날아오는 단도를 느낀 엘리엇이 황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멈춰 서게 된 엘리엇의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앞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났다.

“아라벨.”

엘리엇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라벨을 쳐다봤다. 그의 뺨에는 실금 같은 생채기가 생겨 피가 흘러내렸다.

“놀랐잖아.”

“마침 오라버니 쪽에 토끼가 있길래, 마음이 앞섰어. 미안해.”

엘리엇이 단도가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확히 심장을 맞아서 즉사한 토끼가 쓰러져 있었다.

“시작부터 토끼를 잡다니. 운이 좋은 것 같아.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하. 그러게 말이야.”

“오라버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음, 토끼는 작고 재빨라서 오히려 힘드려나? 오라버니한테는 곰이 걸맞을지도.”

“농담도 참. 벨, 난 이런 일 자체가 서툴러. 너처럼 기민하게 사냥감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알지. 오라버니는…….”

말끝을 흐리던 아라벨이 말에서 내렸다.

“사냥감을 수습해야겠어.”

아라벨을 따라 말에서 내린 엘리엇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토끼의 사체를 수습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토끼는 말에 엮어둔 주머니에, 단검은 품속으로 다시 챙긴 아라벨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대충 손을 닦다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오라버니. 내가 어릴 적에 선물한 손수건을 기억하지?”

“그럼.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걸.”

“……정말? 내가 너무 어릴 때 수를 놓아서 형편없잖아.”

“그래도 네가 준 거잖아.”

엘리엇, 아니, 박사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손수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엘리엇의 얼굴을 뺏고, 옷가지를 훔쳐 입고 나서 손수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리엇 폰 렘브라나.

지렁이처럼 엉망진창인 자수 덕분에 이 몸이 제국의 둘째 황자인 엘리엇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박사는 자신이 엘리엇이 됐던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줬다니 기쁘네. 그러면 지금 그 손수건은 어디 있어?”

“내 방에 있을 거야.”

“아, 그래?”

시큰둥하게 대꾸한 아라벨은 문득 엘리엇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헉, 아까 토끼를 잡을 때 다쳤나 봐! 피가 나잖아. 나한테 여분의 손수건이 있으니까 기다려 봐. 닦아줄게.”

손수건을 든 아라벨이 엘리엇의 앞에 섰다.

“내가 닦을 수 있어.”

“설마 나한테서 피 냄새가 나서 그러는 거야?”

“그럴 리가. 피가 묻어도 너는 내 동생 벨인데 어떻게 그런 모진 생각을 하겠어.”

엘리엇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서 있자 아라벨이 그의 품에 파고들듯이 몸을 바싹 붙였다.

“……벨?”

푹-.

그때였다. 아라벨이 토끼의 심장을 갈랐던 단도로 엘리엇의 심장을 찌른 것은.

아라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미건조한 얼굴로 엘리엇에게서 떨어졌다.

엘리엇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하며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모두가 엘리엇 오라버니는 겁쟁이라서 사냥을 싫어한다고 떠들었지.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저 상냥한 사람이었어.”

아라벨의 목소리가 점차 떨렸다.

“처음 보는 토끼가 사냥당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만큼 정이 많았지.”

“…….”

“나와 달리 한낱 미물의 생명마저 보살피는 오라버니를 정말 좋아했어.”

얘기를 이어가던 아라벨은 울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엘리엇을 내려다봤다.

“맞아, 나나 첫째 오라비와 다르게……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아라벨은 엘리엇의 뺨을 훔쳐 주려고 했던 손수건을 들었다.

엘리엇 폰 렘브라나.

어린 자신이 열심히 수를 놓았던 손수건. 당시 제 눈에도 별 볼 일 없어 보여서 선물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수건을 발견한 엘리엇은 자신에게 주는 거냐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벨,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자수를 본 적 없어. 내게 주는 것 맞지?”

하다못해 꽃 모양으로 꾸미기라도 했으면 덜 초라했을 텐데.

이름만 덩그러니 새겨진 손수건을 쥔 엘리엇은 세상을 가진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

그때 아라벨은 앞으로 엘리엇을 이해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레기온이 그토록 따뜻하고 상냥한 마음을 가질 리 없으니까.

“그런데 넌 누구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아라벨은 손수건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사냥당한 토끼를 보고도 웃어넘기다니. 이 손수건을 가질 자격이 없는 이였다.

천 조각이 엘리엇의 앞에 떨어졌다.

“……벨.”

조용히 아라벨의 얘기를 듣던 엘리엇의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내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아파, 너무 아파.”

가슴을 부여잡은 채 아프다는 말만 반복하는 엘리엇은 혈육에게 배신당한 이처럼 애처롭고 불쌍해 보였다.

‘흔들리면 안 돼. 지금 앞에 있는 남자는 오라버니가 아니야.’

아라벨은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린 마르셀은 지금과 같은 표정으로 애원하는 어린 엘리엇을 외면한 채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은 혐오하는 첫째 오라비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순 마음이 약해진 아라벨이 몸을 숙인 그 순간.

제 심장을 찌른 단도를 빼낸 엘리엇이 그것을 휘둘렀다. 눈치 빠른 아라벨이 뒷걸음질 쳤지만 그가 더 빨랐다.

“윽.”

다리에 깊은 부상을 입은 아라벨이 주저앉았다.

엘리엇이 그런 아라벨을 무정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로 아라벨을 죽이려 들었다.

살기를 느꼈음에도 아라벨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사특한 주술을 쓴 게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엘리엇이 아닌 걸 알고 있는데도, 엘리엇이길 바라는 마음 탓에 모질게 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라벨이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직전.

퍽-.

단단한 돌이 하나 날아와 엘리엇의 뒤통수를 때렸다.

“황녀님! 정신 차리세요!”

바로 루미나가 던진 짱돌이었다. 순간 엘리엇의 집중력이 흩어졌다.

“아, 루미나. 너도 이곳에 있었구나.”

루미나를 보자마자 환히 웃는 엘리엇의 모습은 기괴했다.

심장이 찔렸는데도 멀쩡히 살아 있는 그가 루미나를 향해 광기를 드러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린 아라벨이 힘겹게 일어나 엘리엇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루미나에게 달려가 낚아채듯 그녀를 안고 말 위에 올라탔다.

다리의 상처가 깊은 데다 무력한 루미나가 인질로 잡히면 아라벨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장을 꿰뚫어도 살아 있는 기괴한 존재니 일단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아라벨은 머리카락이 뺨을 때릴 만큼 빠르게 말을 몰았다.

“황녀님! 확인만 한다고 했잖아요!”

분명 박사의 정체만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아라벨이 그의 심장을 찌른 건 계획 밖의 일이었다.

“넌 평생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괴물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니? 난 아니야!”

비록 아프다며 눈물을 보이는 오라비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지만.

“일단 황궁으로 가요. 황실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 봐야죠.”

아라벨마저 엘리엇이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판도가 뒤바뀔지도 몰랐다.

‘심지어 심장이 뚫리고도 살아 있잖아.’

진짜 엘리엇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니 그들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도 있다.

본래 계획은 엉망진창이 됐다.

하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터라 루미나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동안, 박사는 말을 타고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직 미완성품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지.”

박사는 앰풀을 꺼냈다.

그것을 마시자 몸이 변했다.

인간의 근원인 마물의 모습으로.

완전한 레기온이 될 고지가 바로 코앞이었다.

조금 일찍 약을 투여한다 해서 문제가 되지 않을 터.

박사는 루미나를 잡기 위해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마물이 된다는 건 신체적 능력을 극한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금세 그들을 따라잡은 박사는 가장 먼저 말을 공격했다.

히이잉-.

말이 쓰러지고, 박사는 루미나를 감싸려는 아라벨을 잡아서 던졌다.

쾅-!

큰 소리가 나며 나무에 부딪힌 아라벨의 몸이 축 처졌다. 잠깐 기절한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정없이 바닥을 뒹군 루미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짐승의 다리에, 염소와 같은 얼굴이 된 박사를. 보랏빛이었던 그의 눈동자는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왜 아라벨을 치유하지 않는 거지? 혹시 아라벨에게는 능력을 쓸 가치조차 없는 건가?”

루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다리를 삐끗했는지 겨우 앉아 있는 게 한계였다.

슬금슬금 몸을 뒤로 내뺐다.

그러나 도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발견한 사람처럼 박사가 가소롭다는 시선으로 루미나를 쳐다봤다.

“능력을 써.”

루미나의 앞에 선 박사가 강요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능력을 써줄 생각은 없었다.

루미나가 가만히 있자 박사는 루미나의 턱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강제로 앰풀 안에 있는 액체를 먹였다.

“윽, 읍…….”

“몇 배는 강력할 텐데. 확실히 약효가 늦게 도는군.”

뱉어내려 했지만 끝내 목구멍을 지나가는 액체를 막아내지 못했다.

점차 숨이 가빠지면서 날개가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박사가 만든 약이 루미나의 힘을 강제로 개방시킨 것이다.

“정말……. 아름답군.”

박사가 황홀한 듯 루미나를 쳐다봤다.

이윽고 그가 루미나의 심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루미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당황한 박사의 목소리만 들렸을 뿐.

황급히 눈을 뜨자…….

“……카라얀 님?”

박사를 밀쳐낸 카라얀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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