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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151)화 (151/152)

어째서 카라얀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루미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박사를 밀쳐낸 카라얀이 그와 대치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박사의 그림자에서 나온 검은 형체가 루미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루미나!”

카라얀이 루미나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박사에게 막혀버렸다.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 또한 박제하여 저 아름다운 나비의 옆에 전시할 테니.”

깊은 어둠이 루미나 주변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그곳에서 뿌리처럼 뻗어져 나온 어둠의 일부가 루미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루미나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심, 장…….”

어설프게 ‘심장’을 발음한 그림자가 루미나의 가슴을 꿰뚫으려는 그 순간.

루미나의 주변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나비가 모여들어 그림자를 몰아내려고 했다.

작은 빛으로 구성된 나비 한두 마리는 그림자에 먹히듯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나비들이 떼를 지어 뭉치자 빛이 강렬해지며 오히려 사라지는 건 그림자 쪽이 됐다.

‘죽기 싫어. 아니, 죽어도 저 미친 늙은이한테 내 목숨이 이용당하는 건 싫어.’

등불처럼 빛이 환해졌다.

그 빛을 이기지 못한 그림자가 옅어지며 루미나는 속박됐던 손이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몸 상태가 이러니 더는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뻐기는 건 미련한 짓이야.’

루미나는 당장 두 다리로 도망치지 못했다. 박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지금, 지금 같은 몸 상태는 카라얀의 짐만 될 터.

루미나는 아라벨을 치료해서 전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루미나가 아라벨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돌린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꿈틀거리더니 다시 한번 루미나의 심장을 강탈하기 위해 뻗어졌다.

“……!”

몸을 돌리고 있던 루미나가 이 사실을 눈치챘을 땐 이미 한 박자 늦은 뒤였다.

빛으로 만들어진 나비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늦었다.

무력하게 그림자에게 당하기 직전, 루미나를 감싸 안은 자가 있었다.

그 순간 익숙한 체취가 훅 풍겼다.

피비린내와 뒤섞인 그만의 체취를 맡은 루미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내가 널 지켜준다고 했잖아.”

쿨럭.

카라얀이 피를 토하는 동안 그림자가 그의 가슴을 관통한 뿌리 같은 형체를 느릿하게 빼냈다.

그리고 카라얀을 밀어내고 또다시 루미나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제껏 네가 날 지켜주기만 했지. 드디어 내가 널…….”

검은 오러를 방출한 카라얀이 그림자를 저지하고, 루미나를 안아 든 채로 그것과 멀어졌다.

“쯧.”

그림자가 루미나의 심장을 갈취한다는 흥분에 못 이겨 잠깐 한눈을 팔았던 박사는 혀를 찼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카라얀이 루미나를 감쌀 줄이야. 또 루미나 대신 카라얀이 치명상을 입을 줄이야.

루미나만큼은 아니어도 카라얀 또한 나름 귀한 축에 속하는 실험체였다.

그를 가져서 나쁠 건 없는 터라 절로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나왔다.

“살아있는 채로 갖고 싶었는데. 안타깝게 됐어.”

루미나의 앞에서 그림자는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치명상을 입은 카라얀이 겨우 버티고 있으니 이제 직접 루미나의 심장을 뽑아내면 됐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바람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 박사가 그들에게 다가가던 그때였다.

“…….”

살기를 느낀 박사가 뒷걸음질 쳤다. 그가 몸을 뒤로 빼자마자 붉은 검기가 스쳐 지나갔다.

방금까지 있던 곳의 땅이 깊게 파인 걸 확인한 박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같이 가자고 얘기해도 무시하고 나를 앞지르고 가더니. 결국 이 꼴이군.”

“하트 공작.”

하트 공작이 있었다.

연구소를 파괴한 검은 괴물.

박사는 일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까득 이를 갈다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오랜만이군. 내 연구실을 박살 낸 이후로 벌써 십 년이 지났으니 말이야.”

“우리가.”

눈 깜짝할 새 박사의 앞으로 간 루키우스가 그를 베어내려고 했다.

비록 박사가 재빠르게 도망친 탓에 상처는 입히지 못했지만.

“한가롭게 인사를 할 사이였던가?”

“…….”

“그 얼굴로 이제껏 잘도 숨어 있었군. 이제 이 해묵은 원한을 청산하도록 하지.”

루키우스의 검이 매섭게 박사를 공격했다.

한편 루키우스의 등장으로 루미나와 카라얀은 박사의 관심에서 벗어나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무릎을 꿇고 쓰러진 카라얀이 루미나를 놓아줬다.

루미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카라얀을 마주 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아.”

“제발. 말하지 마세요.”

카라얀의 상처가 심각했다.

항상 당당했던 그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기침을 하는데 괜찮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옷이 피투성이였다.

다급히 출혈을 막아보려 했지만, 상처가 큰 탓에 여의치 않았다.

색색.

가냘픈 숨을 내뱉으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애썼다.

“이 정도 상처는……. 침 바르면 나아. 지금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

“……그러니까 능력은 쓰지 마. 내 허락 없이 쓰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싫어요.”

“루미나.”

루미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자신이 받을 고통 탓에 머뭇거리는 사이 카라얀의 생명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루미나는 피투성이가 된 제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일순 사고가 정지되는 듯했다.

“제 심장을 당신께 선사하면 될까요?”

전생의 기억을 통해 루미나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상대의 죽음과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루미나의 능력은 상대의 상처를 그대로 자신에게 옮기는 것.

그림자가 제 심장을 노렸으니 카라얀 또한 심장에 큰 타격을 입었을 거다.

그 상처가 제 것이 된다면…….

희망은 있었다.

그러지 말라는 카라얀의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루미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거 아세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카라얀 님을…….”

“루미나.”

“정말정말 좋아하고 있나 봐요.”

루미나가 활짝 웃었다.

카라얀이 무지개를 닮았다고 생각한 그 미소였다.

카라얀은 루미나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하얀 빛으로 된 나비들이 모여들었다.

루미나는 카라얀과 이마를 맞댔다. 자신의 숨이 카라얀의 숨이 될 수 있기를.

그토록 두려웠던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됐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억울하지도 않았고.

제 삶이 사랑하는 이의 삶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행동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 남자라면 모든 것이 괜찮았다.

“안 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박사가 처절하게 외쳤다.

“그건 내 거야!”

“지금 어딜 한눈팔고 있는 거지?”

하얀 빛이 루미나와 카라얀을 감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성을 잃은 박사가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루키우스가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다리를 베어냈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었건만 루미나에게 정신이 팔린 박사가 지지대를 잃은 것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심장을……. 그녀의 심장만 있으면…….”

아직 그는 완벽해지지 못했다.

저 힘이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박사는 기능을 잃은 다리 대신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루미나에게 기어갔다.

콱-.

“네 마음대로 될 것 같나.”

그런 박사의 손등에 검을 박은 루키우스가 더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박사의 추악한 모습을 내려다봤다.

“넌 살아도 마물로 살 것이고, 죽어도 마물로 죽을 거다.”

“아니. 난 마물이 아니야! 레기온이 될 거라고!”

들끓는 듯한 외침이었다.

그것을 무시한 루키우스는 절규하는 박사의 몸을 발로 대충 뒤집었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던 가슴 쪽 상처가 보였다.

아라벨이 정확히 심장을 찌른 탓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즉사해야 했다.

귀를 기울이니 작지만 심장의 고동이 들렸다. 하지만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었다.

결국 영생할 것만 같았던 박사도 심장이 멎으면 죽고야 마는 생명체였던 것이다.

루키우스는 싸늘한 조소를 날렸다.

“마물이 된 게 그토록 싫은가? 그러면 영원한 절망과 고통 속에 살게 해 주지.”

그리고 인간도 아닌 마물로 죽이는 거다. 박사의 까만 눈동자에 좌절이 깃들었다.

박사의 약점을 제대로 잡은 루키우스는 그를 짓밟았다. 한참이 지나니 그 또한 생명체긴 한 듯, 정신을 잃었다.

루키우스는 카라얀과 루미나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사가 부나방처럼 쫓았던 환한 빛은 이미 멎었다.

대신 피투성이의 카라얀이 루미나를 끌어안은 채로 울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차마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과거 자신과 아이리스의 마지막이 겹쳐 보였기에.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전혀.

***

까맣고, 커다란 관을 짊어진 인부들이 묘지로 이동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슬픈 눈빛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한 날에 두 사람의 장례를 치르다니.”

“참 안타깝게 됐죠.”

저마다 한마디씩 하게 됐다.

그중 이 장례식을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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