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두 사람 다 시신조차 없는 장례식이잖아요. 황제 폐하의 마음이 얼마나 안 좋을지……. 자식 있는 사람으로서 상상조차 가지 않네요.”
“자식을 하나만 잃어도 가슴이 찢어지는데. 한 번에 둘이면 어떻겠어요.”
인부들이 짊어지고 이동하는 관에는 시체가 없었다.
일부러 빈 관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지.
“마르셀 님께서는 들짐승 탓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했죠? 그런데 엘리엇 전하는 대체 왜…….”
“마물이 전하를 습격했대요. 듣기로는 아라벨 황녀님과 하트 부자마저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황녀님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하트 공작마저요?”
사람들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네. 이건 제가 아는 사람이 알려준 얘기인데 고전했다고 해요. 마침 그곳에 있던 하트 공자비도…….”
최대한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건만 문득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행렬에 참여한 아라벨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헉.”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다.
혈육의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슬픔마저 느껴지지 않는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그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라벨은 금방 그들에게서 눈길을 옮겼다.
하지만 한두 사람을 쳐다봤다고 해서 수백 명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황자님께서는 참 사냥터와 악연이 깊은 분인 것 같네요.”
“사냥터는 폐쇄했대요.”
“그리고 이번 일은 아라벨 황녀님께서 꾸민 짓이 아니냐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청각이 월등히 뛰어난 아라벨은 그 모든 속닥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말소리가 듣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벨은 필사적으로 들리지 않는 척했다.
오늘은 오라버니의 장례식이었으니까.
긴 행렬은 렘브라나 황가의 공동묘지에 다다랐다.
황제는 참담함을 숨기지 못한 채 미리 파둔 구멍 안으로 텅 빈 관을 매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체 없는 관으로나마 이곳에 묻히게 되는 건 엘리엇뿐이었다.
마르셀은 추문으로 파면됐기에 황가의 공동묘지에 묻힐 자격이 없었다.
불명예를 짊어진 그는 귀족도 아닌 평민들의 공동묘지에 빈 관만 묻힐 예정이었다. 장례식 또한 엘리엇과 달리 조촐하게 진행될 터.
만약 죽은 마르셀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치욕스러워 또 한 번 죽으려고 했을 거다.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엘리엇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루키우스가 조용히 아라벨의 옆에 섰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본 채로 아라벨이 입을 열었다.
“그자는 당신이 처리할 거죠?”
“네 몫도 남겨주길 바라나?”
“아뇨. 제 몫은 끝났어요.”
아라벨이 딱 잘라서 대꾸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 추악한 노인네의 심장을 찌른 그 순간 끝난 것이다.
“루미나는…….”
“…….”
“저한테 정체만 알아보자고 했어요. 그자를 건드린 건 제 독단적인 행동이에요.”
“그렇겠지. 치밀한 아이인데 널 앞세워 그자를 처치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짰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다.”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싶어서 아라벨은 순간 발끈했다.
“두고 봐요. 당신을 이기는 최고의 레기온이 될 테니까.”
“기대하지.”
관이 파묻히고, 곧이어 묘비가 세워졌다.
엘리엇 폰 렘브라나.
22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하고 만 렘브라나 황실의 젊은이를 추모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흰 장미가 묘비에 놓였다.
차례가 오자 묘비 앞으로 간 아라벨이 손수건으로 감싼 흰 장미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소년에게]
손수건에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자수가 하얀 장미와 함께 놓여 있었다.
장례식을 마무리한 뒤, 그녀는 옆에 놓인 황후의 묘비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께서는 저도 원망했겠죠.”
그녀의 얘기를 믿지 않은 가족들이 미웠을 거다.
그리고 미치지 않았던 사람이 진짜 미쳐가는 건 한순간이었겠지.
아라벨의 시선이 문득 조용히 왔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하트 공작의 뒷모습을 좇았다.
“어머니, 저는 누구도 저를 무시하지 못하는 최고의 레기온이 될 거예요. 그 대단하다는 하트 공작보다 더 위대한 레기온이.”
루미나에게 엘리엇, 아니, 제 오라비의 거죽을 쓴 늙은이에 대한 진실을 들었던 아라벨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서 지금 제 모습을 누구도 비웃지 못하게 할 거예요.”
“…….”
“그리고 다신 어머니와 같은 일이 없도록 귀를 기울일게요.”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당신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될 수 있도록.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보며 아라벨이 다짐했다.
***
꽃다발을 든 엔디미온은 하트 공작저 앞에 섰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넓은 저택을 가로지르던 엔디미온이 입을 열었다.
“누님은 괜찮습니까?”
“그게…….”
집사가 대답하기 전.
그들은 방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으학, 학학!”
루미나의 헐떡이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당황한 엔디미온이 집사를 지나쳐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 있는 루미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카라얀이 올라타 있었다.
“한 번만 더 무모한 짓을 하려고 하면 이럴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
“흐하학! 하, 하지만 그땐 방법이…….”
“네가 죽는 게 방법이야?”
“아, 안 죽었, 흐하학! 잖아요!”
하나하나 따져보면 먼저 목숨을 바쳐 뛰어든 사람은 카라얀이었다.
순간 억울한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지만, 약하게 제 옆구리를 간질거리는 손길을 받고 억울함이 쏙 들어갔다.
깃털로 발바닥을 간질이는 듯한 그런 강도였다.
결국 루미나는 두 팔을 길게 뻗었다.
“하, 항복, 항복!”
“…….”
“으힉, 완전 항……! 콜록.”
너무 웃다 보니 기침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배가 너무 아파서 눈살을 찌푸리자 당황한 카라얀이 표정을 굳히고 황급히 루미나를 살폈다.
“많이 아파? 아니, 당연히 아프겠지.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올…….”
“아,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상처가 터진 건 아닌 터라 루미나가 다급히 카라얀을 붙잡았다.
몸을 돌리려던 카라얀이 그 힘에 당겨지며 루미나와 지나치게 밀착됐다.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려던 순간…….
“누님! 괜찮습니까?!”
엔디미온이 후다닥 달려왔다.
“어? 어? 엔디미온, 언제 온 거야? 당연히 괜찮지!”
너무 웃어서 광대가 당기긴 했지만.
루미나는 엔디미온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픈 광대를 당기며 방긋 웃었다.
그러나 다소 창백한 루미나의 낯빛을 본 엔디미온의 분노가 자연스럽게 카라얀에게로 향했다.
“지금 환자한테 무슨 짓입니까! 누님이 환자라는 자각은 있는 겁니까?”
“……힘 조절했어.”
“배에 구멍이 뚫린 사람을 간지럽히는 건 어느 누가 할 짓입니까?”
박사를 잡은 이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루미나는 빠르게 회복했다.
그녀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심장이 뚫린 줄 알았던 카라얀이 미묘하게 그 밑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는 정확히 루미나의 심장을 노렸으나 신장 차이 탓에 카라얀은 심장을 비껴간 위치에 상처를 입었다.
덕분에 치명상이긴 했어도 두 사람 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구멍이 뚫린 건 뚫린 거라 루미나는 한동안 요양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안 되겠습니다. 누님, 지금 당장 랑슈스로 가시죠.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공작가의 간호 방식은 누님의 건강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뭐? 지금 짐승이라고 했어?”
“그러면 뭡니까?”
루미나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조차 오늘따라 참 평화롭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박사가 엔디미온을 건드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엔디미온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카라얀과 엔디미온이 다투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커다랗고 검은 형체가 그들을 방문했다.
“손님이 와 있었군.”
바로 루키우스였다.
“장례식이 끝났나 봐? 따로 상복을 입을 필요는 없었겠……습니다.”
루미나를 되찾은 이후로 카라얀은 루키우스에게 다시 존대를 했다.
아직 반항하는 마음이 남았는지 살짝 어설프긴 했지만.
“일단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누님. 랑슈스가 언제나 누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
“이번 일은 이해는 했지만, 굉장히 섭섭했습니다.”
“으응, 알겠어.”
루미나는 엔디미온에게 루키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평소 얌전하고 고지식한 제 동생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때문에 사소하게 다퉈서 집을 나갔는데 어떤 미친놈이 쫓아왔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댔다.
똑똑한 엔디미온은 미심쩍은 점을 발견한 듯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렇게 엔디미온이 가고, 루키우스가 입을 열었다.
“루미나. 단 둘이 할 얘기가 있다.”
“제 앞에서 얘기하시죠.”
카라얀이 루키우스를 경계했다.
결코 루미나의 심장을 빼앗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긴 했지만, 완벽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루키우스가 카라얀의 앞에서 용건을 꺼냈다.
“카라얀은 대학살 날 도와준 여자가 너라고 주장하더구나.”
“맞아요.”
“뭐? 저번에는 모른다고 했잖아.”
“으음, 그땐 몰랐는데 곧 알게 되더라고요. 카라얀 님과 헤어지고 많은 일이 있었죠.”
루미나가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한 듯했다.
“그녀와 어떤 얘기를 나눴지?”
“공작부인께서는 박사의 약물을 맞아서 마물과 가까운 상태가 되고 있었죠. 그런데도 끝까지 공작님을 걱정했어요.”
루미나의 얘기를 듣고 카라얀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마물과 가까운 상태가 됐다니.
당시 끌려간 어머니에게 별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낙관하진 않았다.
다만 그런 식으로 이용당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하니까 공작님의 눈을 가장 먼저 묻더라고요. 공작님이 더는 눈을 숨기지 않은 채 살아가는지 물었어요.”
“……넌 뭐라고 대답했지?”
“거짓말을 했어요.”
루키우스는 침묵했다.
체감상 긴 침묵 끝에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날 원망했을 텐데. 어째서 내 아내와 아들을 도우려고 한 거지?”
“원망보다는…….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구나 싶었어요. 그렇다고 좋은 감정인 건 아니었으니 공작님의 말씀이 옳네요.”
“…….”
“그런데 공작님을 위한 게 아니었어요.”
루미나의 시선이 카라얀에게 닿았다.
카라얀이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하는 것.
그 마음 하나로 애뮬릿에 대고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저는 실패했고, 그 애뮬릿은 깨졌어요. 더는 돌아가지 못해요.”
“혹시 이렇게 생긴 것이었나?”
루키우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루미나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애뮬릿이었다.
그 안에 루미나가 뱉어낸 꽃이 있는 것마저 똑같았다.
깜짝 놀란 루미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라얀은 루키우스가 혹 마음을 바꿔 먹고 수상한 짓을 할까 봐 경계했다.
경계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은 루키우스는…….
파삭-.
한 손으로 애뮬릿을 깨부쉈다.
“어째서…….”
힘겹게 완성했을 텐데?
왜 미련이 남을 짓을 하는 거지?
루미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리스도, 나도 하나뿐인 자식까지 복수의 굴레를 쓰길 바라지 않았지. 내 선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정말로 저를 위한 게 맞느냐는 카라얀의 물음을 외면하고 외면한 끝에 나온 결과가 지금이었다.
“전부 나의 오만이었다.”
브랜든이 카라얀의 상실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모든 걸 되돌리면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카라얀을 위해 기꺼이 심장을 내어주는 루미나를 지켜본 그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애뮬릿, 제 심장이 있으면 정말로 작동했을 거예요.”
“확신하는군.”
“제가 그 애뮬릿 덕에 미래에서 왔으니까요. 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면 어릴 때로 돌아간 거죠.”
루미나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의미에서 진실을 밝혔다.
그런데 루미나의 예상과 달리 루키우스는 이상한 걸 궁금해했다.
“미래의 나는 어떻게 네 심장을 얻었지?”
미래에서 왔다는 얘기도 밝혔는데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루미나가 선뜻 설명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제 심장을 가져갔어요.”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네?”
“네가 레기온인 게 밝혀진 채로 팔려 갔으니 널 사려고 했던 사람은 박사였을 테지.”
“…….”
“박사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나는 그를 뒤쫓았을 테고. 그러니 우연이 아니다.”
루키우스는 손 아래로 흩어지며 반짝이는 애뮬릿 조각을 쳐다봤다.
“내가 아닌 에너지를 제공한 너의 염원을 들어준 것 같군. 처음부터 나는 헛된 환상을 쫓고 있던 거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리게 됐다.
“이만 아이리스를 놓아줘야겠지.”
헛된 망상은 이만 떨칠 때였다. 그러지 않으면 그토록 혐오했던 박사와 다를 바 없었다.
“음.”
곰곰이 앞뒤 사정을 따져보던 루미나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마차 사고 날 루미나가 엔디미온을 살려줬기에, 엔디미온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서 목숨을 바쳐 루미나를 구했다.
은혜를 갚기 위해.
그리고 루미나가 처음 하트 공작을 찾아갔을 때 무사히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건, 카라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미나를 알아본 카라얀이 다가와 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조제프에게 잡혔을 거다.
덕분에 거래가 성사되고, 루미나와 카라얀은 재회할 수 있었다.
‘누가 먼저 도와줬다고 할 수 있을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묻는 듯한 딜레마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모든 선한 행동이 쌓여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아, 저는 이만 랑슈스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아까 엔디미온을 따라갈 걸 그랬네요.”
“무슨 소리지?”
“갑자기 왜?!”
루미나의 돌발 발언에 펄쩍 뛴 두 남자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루미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혼 서류에 이미 사인했으니까요.”
“빌어먹을. 어디 갈 생각 하지 말고 있어 봐.”
카라얀이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씩씩거리면서 도로 들어왔다.
“그 서류 어디 뒀어?!”
그렇게 루키우스와 함께 사라진 카라얀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혼 서류를 쥔 채였다.
“여기 봐. 난 사인하지 않았어.”
본인의 서명란을 루미나에게 확인시켜 준 카라얀은 그대로 서류를 박박 찢었다.
그것도 모자라 종잇조각을 불태워 아예 재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무효야.”
과격한 카라얀의 방식을 잠자코 지켜보던 루키우스가 이어서 말했다.
“약속했던 대금은 지급하도록 하마. 다만 네가 남았으면 좋겠구나.”
루미나는 흔적도 남지 않은 이혼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혼 서류가 자연현상으로 찢기고 태워졌으니 제 서명은 무효가 됐을 테죠. 하, 이러면 어쩔 수 없네요.”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던 루미나가 씨익 웃었다.
“약속했던 위자료나 보수는 필요 없어요.”
예전의 루미나였다면 ‘너 미쳤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을 법한 선택이었다.
굴러 들어오는 돈을 걷어차겠다니.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렸냐면서 욕을 퍼부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루미나는 돈 때문에 그들의 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좋아서 이곳에 남는 거니까요.”
루미나는 미래를 그려봤다.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지.
“정말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외친 루미나가 활짝 미소 지었다. 비가 온 뒤 갠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무지개 같은 미소였다.
<악당들의 최애는 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