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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작전명, <아르문트 길들이기 (2/145)

2화. 작전명, <아르문트 길들이기>2021.03.07.

16549563898407.jpg‘어쩌다…….’

로제타는 대형견처럼 치대오는 아르문트의 커다란 몸을 꾸역꾸역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어찌나 붙어오는지 아무리 밀어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결국 그를 떼어내는 것을 포기한 로제타는 우두커니 서서 창밖 어느 먼 곳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16549563898407.jpg‘어쩌다 이렇게 됐지.’

처음부터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로제타는 눈을 감고 천천히 과거를 회상했다. 기억 속 장면들이 그녀의 눈앞에 차르르 펼쳐지는 듯했다.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들이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섯 번째 생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순간까지. 그래, 이 이상한 관계는 로제타가 황태자 궁에 입궁한 바로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

16549563898417.jpg“감히 고개를 들어 전하와 눈을 마주치지 말게.”

16549563898407.jpg“네.”

16549563898417.jpg“예민한 분이시니 쓸데없는 말도 하지 말고, 깔끔하게 소개만 해야 하네.”

16549563898407.jpg“네.”

16549563898417.jpg“얌전히 내 곁에만 서 있어야 해. 알겠나?”

16549563898407.jpg“알겠습니다.”

로제타는 부드럽게 웃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법 신뢰가 가는 목소리였으나, 하녀장 마리아는 영 미덥지 못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훑었다.

16549563898417.jpg“……복장이 이게 뭔가?”

내 복장이 왜? 로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의 단정한 치마, 아침부터 예쁘게 각을 잡아 다린 셔츠, 적당히 편한 단화. 그녀가 보기에는 깔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로제타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자 마리아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16549563898417.jpg“아직 하녀복은 안 받았다고 해도, 전하를 뵈러 가는 자린데. 옷이 그것밖에 없었나?”

16549563898407.jpg“예. 죄송합니다.”

로제타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차, 대답이 너무 기사 같았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마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빈정대고자 옷이 없냐 물었더니 정말 없다는 것도 놀라웠고, 느닷없이 헤헤 웃는 모습은 더욱이 황당했다.

16549563898417.jpg‘뭔 귀족 영애가 하녀에 자원했대서 긴장했더니, 웬 바보가 들어왔잖아?’

입은 옷은 딱 봐도 질이 좋지 않았고, 걸친 액세서리도 하나 없었다. 게다가 흘끗 본 손바닥은 궂은일 제법 해본 사람처럼 거칠었다. 귀족이 아니라 잡부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이다. 얼굴은 제법 반반했으나 레이디다운 기품과 우아함은 없었다. 메이필드 남작가 출신이라 했나. 그다지 유명한 가문은 아니라 아는 바는 많지 않았으나, 대충 꼴을 보니 사정이 퍽 좋지 않은 모양이다. 딸을 시녀도 아니고 하녀가 되도록 둔 걸 보면 뻔하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긴 했지만, 저 바보 같은 얼굴을 보니 의심할 마음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시시 사그라들었다.

16549563898417.jpg“……됐네. 전하께 인사 올리러 가지.”

16549563898407.jpg“넵.”

로제타는 웃음을 헤실헤실 흘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마리아가 자신을 멍청이로 보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 시선이 기꺼웠다.

16549563898407.jpg‘이 편이 능력을 감추긴 더 좋겠지.’

그녀의 목적은 평범한 하녀를 연기하며 아르문트의 곁에서 그를 지키는 것. 주위의 평판이 어떻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하녀장이 지적한 복장이었다. 이전 생에서 로제타는 항상 바지를 입었고, 그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감히 누가 최고의 기사에게 레이디의 소양을 운운하며 복장을 간섭할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랜만에 치마를 챙겨입은 소감은 한마디로 ‘매우 불편하다’였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싶었다.

16549563898417.jpg“전하, 마리아입니다. 새로운 하녀를 소개해 드리러 왔습니다.”

치마를 입고 가장 효율적으로 걷는 법을 연구하다 보니 금방 황태자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이전 생들에서 로제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바로 그곳이었다. 아련하게 주위를 훑어보는 순간,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기사와 눈길이 마주했다. 밤송이 같은 회색빛 머리카락에 눈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가진, 투박한 인상의 남자. 한때는 로제타의 아래에서 일하던 기사인 리처드였다.

16549563898407.jpg‘릭! 오랜만이다 야!’

하마터면 이렇게 소리칠 뻔했다. 로제타는 재빨리 어금니를 꽉 깨물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눈웃음을 사르르 지어 보였다. 제 부하에게 이런 상냥한 미소를 짓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러자 리처드의 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더위라도 먹었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썩 마음에 안 드는 꼴이었다. 이윽고 커다란 문이 열렸다. 로제타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하게 마리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황태자의 방. 호위기사일 때는 웬만해선 머무를 수 없던 곳이었다. 그 탓에 아르문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하녀로서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감 때문인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16549563898417.jpg“전하께 인사 올리게.”

16549563898407.jpg“처음 뵙겠습니다.”

사실 몇 년을 본 사람이었으나 이 모습으로는 처음이니 그렇다고 치자.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반질반질한 구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16549563898407.jpg“메이필드 남작가의 로제타라고 합니다. 앞으로 성심성의껏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이번엔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추론해봤을 때, 아주 높은 확률로 아르문트는 “그래. 잘 부탁하네.” 하고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으니까. 로제타는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아르문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답변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그의 기척이 코앞에서 느껴지는데도.

16549563898407.jpg‘무슨 문제라도 있나?’

불안해진 로제타는 눈을 치켜뜨고 아르문트를 향해 흘끔 시선을 던졌다. 마리아는 감히 얼굴을 보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물론 그녀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이내 시야에 아르문트의 모습이 담겼고, 로제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 그랬듯 아르문트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칼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실바람에 살랑거렸고, 숱이 짙은 눈썹 아래로는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날카로운 눈매와 앙다문 입술은 언뜻 사나워 보였으나 야성미가 있었고, 오른쪽 눈 아래에 찍힌 점 하나가 유독 매력적이었다. 몸도 얼굴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커다란 몸에 골고루 박힌 근육은 투박하기보단 관능적이다. 절로 시선을 잡아먹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로제타가 놀란 까닭은 그의 범상치 않은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연애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그녀가 보기에도 무척 잘생긴 사람이긴 했지만 한두 번 본 얼굴도 아닌데 새삼 놀랄 리가 없다. 그녀가 이토록 당황한 이유는 바로……. 팔랑-. 로제타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고 책을 읽는 아르문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곤 느긋하게 책장을 넘겼다. 여전히 그녀에겐 시선 한 줌 건네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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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63929181.jpg“그래.”

한참 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깨달은 로제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63929181.jpg“이만 나가봐라.”

맹세컨대, 로제타의 인생에서 이런 푸대접은 처음이었다. *** 이번 생의 로제타는 기사의 길을 걷지 않고 하녀로 취직했다. 이는 즉 여태껏 이루었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부, 명예, 권력, 그리고 세월 속에 쌓아온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전부. 그렇기에 이번 생의 자신 앞에 펼쳐질 미래가 이전의 것과 퍽 다르리라는 것쯤은 로제타도 충분히 예상하였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충분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르문트의 변화에 이렇게 놀란 걸 보면.

16549563898407.jpg‘전하가 무뚝뚝하긴 해도 저렇게 예의 없진 않았는데…….’

이전 생의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제법 존중해주었다. 능력을 인정받고 기사단장 직위에 오르기 전까지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수많은 차별과 조롱을 감내해야 했다.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야 모두들 태도를 바꾸었다. 유일하게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바로 아르문트였다. 로제타가 그의 호위에 자원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 로제타가 혼란스러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6549563898417.jpg“메이드복이 잘 어울리네, 로제타.”

멍하니 서 있던 로제타에게로 황태자 궁의 하녀, 멜라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은근하게 흘겨보는 눈동자로 보아 진심으로 칭찬하는 게 아니라 이죽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귀족 출신이라고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일까 기선제압을 해두는 모양이었다. 이전 생이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녀가 감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빈정대다니. 로제타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었다.

16549563898407.jpg‘이게 하녀의 삶이구나!’

아르문트의 태도 변화도 당연하다. 호위기사와 하녀가 같은 대우를 받을 리 없다. 둘은 다른 존재니까. 절망스럽기보다는 신선했다. 오히려 미지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재밌었고, 기대도 됐다. 호위기사일 때 로제타는 다소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걸을 지금, 그녀는 다른 전략을 짜기로 했다.

16549563898407.jpg“정말? 고마워!”

나도 이 메이드복 예쁜 것 같아! 로제타는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조금의 꾸밈도 없이 천진한 모습이었다.

16549563898407.jpg“이름이 멜라니라고 했지? 앞으로 잘 부탁해. 열심히 일할 테니 선배로서 많이 가르쳐줘!”

16549563898417.jpg“어? 어어, 그래…….”

이런 반응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멜라니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뒤로도 며칠간 멜라니는 로제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행여나 로제타의 행동이 다 가식일까 싶어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제타의 태도는 한결같기만 했다. 정말로, 한결같이 바보 같았다.

16549563898417.jpg“로제타! 그건 오전용 복장이잖아! 청소할 때는 검은 옷 입는 거 아니라니까.”

16549563898407.jpg“으아! 미안해! 갈아입고 올게!”

16549563898417.jpg“로제타, 그거 뜨거운 물……!”

16549563898407.jpg“아뜨뜨뜨!”

오전 복장과 오후 복장을 헷갈리질 않나, 뜨거운 물에 막무가내로 손을 집어넣질 않나. 장작을 과할 정도로 많이 나르다 장난치지 말라며 혼쭐이 나기도 했고, 난로 청소라도 하러 가면 숯검댕이가 되어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 지저분한 얼굴로 헤헤 웃는 모습은 정말이지…… 순박하다 못해 모자라 보였다. 의심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멜라니를 포함한 다른 하녀들은 점차 마음을 열고 로제타와 어울렸다. 로제타는 잘못을 지적받으면 담백하게 사과했고, 또 금방 웃으며 열심히 할 일을 찾아서 했다. 한번 가르침을 받으면 그 부분은 다시 실수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남을 때는 다른 하녀들의 일도 도왔다. 그런 사람이 좋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타는 황태자 궁 사용인들 대부분의 호감을 얻었다. 누가 보면 일한 지 몇 년은 된 줄 알 정도로 부쩍 하녀들과 가까워진 그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로제타를 ‘특별한 하녀’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6549563898417.jpg“뭐? 벌써 내 차례야?”

16549563898417.jpg“저번 달에 제스랑 미나가 나갔잖아. 그래서 순번이 좀 빨리 돌았을 거야.”

16549563898417.jpg“하…….”

욕실 청소를 마치고 뒤늦게 식사에 참여한 로제타는 대화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료 하녀인 엘리아가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있었다. 로제타를 발견한 멜라니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16549563898417.jpg“황태자 전하 방을 청소하는 순서 말하는 거야. 전하가 워낙 방에 누구 들이는 걸 안 좋아하셔서 사흘에 한 번씩 청소하는데, 돌아가면서 맡거든. 다들 하기 싫어해서.”

16549563898407.jpg“왜?”

16549563898417.jpg“그야 무서우니까. ……너 설마 소문 못 들었어? ‘그’ 소문 말이야.”

로제타는 눈만 껌뻑거렸다. 붉은빛 속눈썹 아래로 보석 같은 눈동자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딱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멜라니는 으이구, 하고 한탄하며 로제타의 귀 옆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작던 목소리 크기가 더욱 줄어들었다.

16549563898417.jpg“황태자 전하가 미쳤다고.”

로제타는 우선 감탄했다. 멜라니가 가시를 바짝 세우고 저를 경계하던 게 고작 일주일 전인데, 이제는 이런 위험한 소문을 알려줄 사이가 되다니.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그다음으론 의아해했다. 로제타는 이것이 헛소문임을 알았다. 그녀가 서른이 되도록 아르문트의 곁에 있는 동안 그가 광인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멜라니와 하녀들은 아르문트에 대한 갖가지 소문들을 읊어댔다. 시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느니, 식기를 마구 던졌다느니, 하는 자극적인 것들이었다. 그 소문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이들 중 아무도 그런 모습을 직접 목도한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16549563898407.jpg‘누가 일부러 거짓 소문을 퍼트렸거나, 아니면 증언할만한 사용인은 다 이미 쫓겨나고 없는 거겠네.’

로제타는 어떤 쪽이든 상관없었다. 소문이 진실이든 아니든 하녀들은 다들 여러모로 예민하게 구는 아르문트를 만나기를 꺼렸고, 로제타에게 이것은 기회였다. 모름지기 훌륭한 기사라면 주어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로제타는 들고 있던 수프를 한입에 털어놓고는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이 뜨거운 걸 그대로 삼키다니 미쳤냐는 멜라니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16549563898407.jpg“엘리아.”

16549563898417.jpg“응?”

로제타가 엘리아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어쩐지 믿음직스러운 미소였다.

16549563898407.jpg“내가 대신 갈게. 전하 방.”

작전명, <아르문트 길들이기>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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