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입술 더 벌려요, 전하2021.03.11.
멜라니는 불행을 자처하는 로제타에게 몇 가지 지켜야 할 점을 조언했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이것이었다.
-“노크는 무조건 두 번. 용건을 말한 후 전하의 대답을 얌전히 기다려야 해. 5초쯤 지나서 들어오라 하시면 그때 들어가.”
두 번 하라니까 세 번 하고 싶어지네. 방문 앞에 선 로제타는 애써 청개구리처럼 굴고 싶은 심보를 억누르며 손을 들었다. 똑똑.
“전하, 청소하러 왔어요.”
절도 있게 아르문트의 방문을 두드린 그녀가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언젠가는 세 번 두드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정확히 5초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르문트가 보였다. 로제타에게 짧게 시선을 둔 그는 금세 다시 독서에 집중했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게 마음을 열까?’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방을 쓸고 닦으며 고민했다. 사실 청소할 건 많지 않았다. 어찌나 깔끔하게 생활하는지 사흘 만에 청소하는 건데도 바닥에서는 아주 광이 났다. 그가 자주 식사를 하곤 하는 테이블도 묻은 것 하나 없이 깨끗했다. 로제타는 없는 먼지도 찾아 꼼꼼히 닦는 척 시늉하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아르문트가 선호하는 하녀는 아무 말 없이 일만 마치고 떠나는 타입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랬다가는 그냥 일 잘하는 하녀가 돼버릴 것이다. 로제타는 최대한 많은 시간 그의 옆을 지킬 수 있기를 원하고, 그러려면 그와 친해져 곁을 허락받아야 한다. 친구처럼 친해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적당히 친해서 곁에 두어도 나쁘지 않은 하녀’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친밀하게 굴면 성격상 또 경계할 게 뻔하니…….’
로제타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르문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청소 중에도 방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통 귀족이라면 자리를 뜬 동안 청소하게 했을 텐데, 그는 꼭 자신이 있을 때만 방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다른 하녀들이 그의 방을 정리하는 걸 꺼리는 것도 그 이유였다. 안 그래도 두려워하는 황태자와 같은 곳에 단둘이 있으려니 눈치도 보이고 부담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나. 심지어 그는 그 흔한 전속 시종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반적인 황족은 기본 세 명은 두는데 말이다. 그 탓에 시종이 해야 할 업무 또한 하녀에게 넘어왔다. 다행히 웬만한 것은 아르문트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덕에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하녀들 입장에서는 거북할 따름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드높은 경계심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였다. 2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에 오르기까지,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암살 위협을 겪어온 탓에 아르문트는 어지간해서는 누군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호위로 일하며 수많은 암살자를 없앤 로제타에게조차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지 않았던 그이니 알만도 하다. 게다가 예민하긴 또 어찌나 예민한지.
“…….”
빗자루질 소리나 걸레질 소리가 잠시만 들려오지 않아도 아르문트는 시선을 돌려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짓을 하는지 감시하듯이 말이다. 그의 시선을 빠르게 눈치챈 로제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선반 위의 먼지를 닦았다. 뒤통수에 따가운 눈빛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경계부터 최대한 풀어봐야지.’
경계 풀기. 기사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늘 무뚝뚝하고 냉정한 모습을 고수했던 이전의 로제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테다. 그러나 지금의 로제타는 자신이 있었다. 입궁한 지 몇 주 만에 다른 하녀와 기사들의 경계심을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로제타는 먼지 묻은 천을 반듯하게 접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르문트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가 유유히 돌아갔다. 때마침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아르문트와 시선이 마주했다. 깜빡깜빡. 로제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동그란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절대 전하와 눈을 마주치면 안 돼! 화가 난 전하가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누가 알아? 행여나 실수로라도 마주치면,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 생기면, 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전하가 먼저 시선을 돌리길 얌전히 기다려.”
이는 멜라니의 두 번째 조언이었다. 아마 다른 하녀들은 그러한 지침을 충실히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로제타는 고개를 숙이긴커녕 아르문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무표정하던 아르문트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휘었다. 그가 무어라 말문을 열려는 순간, 그제야 로제타가 반응했다. 해말간 얼굴 위로 보드라운 미소가 방싯 피어올랐다. 기다란 눈매가 나긋하게 휘어지고 눈웃음이 걸리었다. 한동안 열심히도 지어 보였더니 어느새 익숙해진 천진한 미소였다.
“전하, 청소는 모두 끝냈어요!”
살가운 목소리까지 곁들였다. 아르문트는 당황한 듯 대답을 하지 않고 한쪽 눈썹만 휘어 올렸다.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찌푸려지자 누가 봐도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전혀 굴하지 않고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창문은 그대로 열어놓을까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햇볕도 따스하고, 바람도 살랑살랑하니.”
초여름의 맑은 날씨가 정말 좋기는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날씨 따위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르문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로제타를 서늘히 응시했다. 경계는 물론이고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로제타는 미소를 유지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아니.”
“네에, 그럼 닫아 놓을게요.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시거나 산책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한참 만에 들려온 대답에도 로제타는 헤실헤실 웃었다. 다만 괜히 더 말을 붙여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아르문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로 온 하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종일관 바보처럼 웃고,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놓는 태도가 퍽 의심스러웠다. 분명 자신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텐데 말이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치곤 깔끔하게 포기하고 나가기는 했지만, 경계를 게을리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방문 너머로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방금 나간 하녀의 목소리였다.
“아약!”
“로제타, 또 부딪힌 거야? 잘 좀 보고 다녀.”
“내 어깨, 내 어깨! 내 어깨 부러진 거 아냐?”
“아니 멀쩡해.”
이러한 대화 소리를 들으니 또 다른 의심도 들었다.
‘그냥 바보인가?’
로제타로서는 나쁘지 않은 첫 시작이었다. *** 로제타는 곧바로 아르문트의 전속 하녀에 자원했다. 사실 말이 전속 하녀이지, 전속 시중이나 시녀처럼 따로 있는 지위도 아니고 그저 아르문트의 방 청소와 시중을 전담하는 하녀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선언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다른 하녀들은 ‘전속 하녀!’ ‘전속 하녀!’ 하고 외치며 앞으로 그 불편하고 숨 막히는 시간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너 정말 괜찮겠어? 몇 년 차 하녀들도 다들 꺼리는 건데…….”
“취소하려면 얼른 해!”
멜라니와 엘리아 등 친해진 하녀 몇몇이 로제타의 안위를 걱정했다. 괜히 황태자의 눈에 자꾸 띄었다가 화를 당하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로제타는 당당하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 완전 튼튼해!”
물론, 그녀의 본래 실력을 알지 못하는 다른 하녀들에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튼튼하긴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툭하면 픽픽 쓰러지면서.”
“푸핫, 개복치! 진짜 잘 어울린다!”
멜라니의 비유에 엘리아가 배를 그러안고 크게 웃었다. ‘황궁의 개복치’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이렇게 탄생했다. 별명은 유행처럼 퍼져 이윽고 너도나도 로제타를 볼 때면 이렇게 부르곤 했다.
“여! 개복치, 어디 가?”
“오늘은 부디 기절하지 않기를 바라!”
이전 생에서는 로제타를 어려워하던 기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장난을 쳤고.
“우리 개복치 좀 그만 괴롭혀! 스트레스받아서 기절하면 어쩔 거야!”
“로제타, 이 쿠키 먹어!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가 너 주라더라. 다른 애 주지 말고, 너만 먹어, 너만.”
동료 하녀들은 아기 대하듯 어화둥둥 어르곤 했다.
‘제국 최강의 검더러 개복치라니!’
로제타는 과거의 영예를 떠올리며 치욕스러워했으나 이내 적응했다. 사실 부끄러운 건 잠깐이었고, 오히려 즐거웠다. 동료들과 장난을 치고 웃는 소소한 일상. 기사일 적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였으나 동료는 많지 않았기에. 하녀 일은 익숙지 않아 어렵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적응하니 견딜 만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르문트 길들이기’ 작전도 꽤 원만하게 흘러갔다.
‘잠깐, 원만한 거 맞나?’
로제타는 볼을 한번 긁적였다. 로제타는 매일같이 아르문트의 방을 찾아가 청소했다. 그리고 늘 해맑은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작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온 적 없는데도 말이다.
“사흘에 한 번 정리하라 했었는데.”
어느 날, 보다 못한 아르문트가 이렇게 질책하자 처음으로 로제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으아, 깜빡했어요, 죄송해요!”
로제타는 정말 열심히 사죄했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용서를 빌었다. 커다란 눈망울 아래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렁주렁 걸릴 것 같았다. 그 불쌍한 모습을 본 기사와 하인들은 매우 불경하게도 아르문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 보듯이 쳐다봤다. 로제타와 친분이 제법 두터워진 탓에 잠시 본분을 망각한 것이었다. 그 과한 사과에 아르문트는 더욱 인상을 썼다. 귀가 시끄러워서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됐으니 그만해라.”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눈물을 떨구기 직전이던 로제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왕 온 김에 조금만 치우고 갈게요! 필요하신 건 더 없고요, 전하?”
맹세컨대 황태자인 아르문트에게, 심지어 미쳤다는 소문까지 난 그에게, 이런 식으로 군 사람은 로제타가 처음이었다. 이 건방지고도 눈치 없는 태도가 너무 어이없어서 차마 화도 나지 않았다. 더 질책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더는 얽히기가 싫었다. 그 후로 그는 최대한 로제타를 무시했다. 보다 보니 그녀는 썩 나쁘지 않은 하녀였다. 일을 군더더기 없이 잘했고, 쓸데없이 아르문트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말이 쉽지, 실제론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이전의 하녀들은 수도 없이 아르문트의 의심을 샀다.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거나, 그의 눈치를 보다 말도 없이 시야 밖으로 사라져 꼼지락거리는 것, 그에게 올릴 음식을 유난히 느리게 가져오는 것. 그들로서는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일진 몰라도, 아르문트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기사를 시켜 그들의 몸을 검색하게 했으며, 들고 온 음식은 냉큼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제 눈앞에 띄지 말라 명령했다. 이와 달리 로제타는 행동거지가 아주 깔끔했다. 늘 그의 시야 안에서 움직였고, 필요 없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상황에는 그에게 미리 알려 의심을 피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아르문트를 만족시킨 하녀였다. 다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전하, 오늘도 날씨가 환상이네요! 산책하기 딱 좋은데 안 나가실래요?”
“…….”
“배는 안 고프세요? 슬슬 입이 심심할 시간인데. 아까 쿠키를 하나 얻어먹었는데 진짜 맛있더라고요. 바삭한 초코 쿠키에 고소한 아몬드가 송송 박혀서…….”
“조용.”
“넵.”
불그스름한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러나 십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금 열리고 말았다.
“참, 오늘 빨래방 하녀를 도와주러 나갔다가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요.”
“나가.”
“넵.”
로제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걸어 나갔다. 자책하듯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톡톡 내리치는 모습이 하찮고 귀여웠다. 물론, 아르문트의 눈에는 그저 귀찮기만 했다. 이렇듯 로제타는 아르문트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열심히 그의 곁을 쫓아다녔다. 단, 중요한 것은 적당한 타이밍에 빠지는 것이었다. 만약 아르문트가 정해둔 선을 넘으면 그는 분명 단숨에 그녀를 내칠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피하고자 로제타는 눈치껏 치고빠지기를 반복했다. 몇 주간 졸졸 따라다녔음에도 아르문트의 마음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의 인사를 받아준 적도 없었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먼저 말을 건 적도 전무했다. 이대로 갔다간 십 년은 지나야 곁을 허락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전에 아르문트는 또다시 죽고 말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내일부터 조금씩 더 들이대 보자!’
로제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너무 들이댔다간 저 개복치가 또 난리를 칠 테다. 그러니 아주 조금,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조금만 더 다가가 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래, 분명 그럴 작정이었는데…….’
밀려오는 회한에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확히는,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잔뜩 흐트러진 차림새를 한 남자. 햇살을 녹여 만든 것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유독 아름다운 그. 무려 아르문트와 키스를 해버렸다.
“입술 더 벌려요, 전하.”
그것도 자신의 주도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