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하녀가 내 몸을 노린다2021.03.21.
“……뭐?”
아르문트가 되물었다. 무언가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자신이 잘못 들었거니 생각했다.
“목욕시중이요! 전하 아침에 목욕하시잖아요.”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기가 막힌 나머지 허, 하는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르문트는 어젯밤 자신이 전속 하녀로 임명한 여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 늘어놓는 말이 목욕시중을 들겠다는 거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제타는 해맑다 못해 뻔뻔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참다못한 아르문트가 서늘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메이필드 남작가에서는 하녀가 목욕시중을 들어주나 보지?”
“글쎄요. 다른 사람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전 혼자 씻었어요.”
로제타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먼 과거의 일인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이었다. 정작 당황한 것은 아르문트였다. 아무리 한미한 가문이래도 어엿한 귀족 영애가 혼자 목욕하는 법은 없다. 이름있는 가문은 시녀를 고용하여 도움을 받고, 그럴 여유가 안 되는 가문은 하녀를 썼다. 아무래도 그녀의 집안은 후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직접 하녀가 된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뭐, 사정이 어떻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이내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은 아르문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중은 필요 없다. 목욕을 명목으로 여인을 욕실에 들이는 파렴치한 취미도 없고.”
직접 몸을 씻는 황태자라니.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애초에 아르문트는 타인을 신뢰하지 못해 시종조차 고용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일 때 누군가를 곁에 둘 리가 없다. 더군다나 젊은 여자를 욕실로 들이다니. 황실이든 귀족가에서든 제법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긴 했으나, 그는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시중을 받으시면 더 편하실 텐데…….”
로제타가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이 틀어지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사나운 아르문트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날 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파렴치한 취미가 없다 설명했는데도 고집하는 건, 네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나?”
로제타를 위아래로 쏘아보는 눈초리가 퍽 흉흉했다. 한낱 하녀에 불과한 네가?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여인에게, 특히 귀족 영애에게 내보이기에는 몹시 모욕적인 언행이었다. 정숙함을 강조하는 사회에선 이만한 수치가 따로 없으리라. 아무리 예우를 갖춰 잘 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한들 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다. 이 정도로 말하면 귀찮게 굴지 않고 물러나겠지. 아르문트가 곧 얼굴을 붉히고 떠날 하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로제타는 볼을 붉히긴커녕 조금의 부끄러움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요?”
로제타가 두 눈을 껌뻑거렸다. 아르문트도 말없이 눈을 껌뻑거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차,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로제타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멜라니와 엘리아의 말로는, 스킨십을 하다 보면 유대감이 생긴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로제타는 목욕시중을 들어주며 어떻게 관계를 좀 더 개선해보고자 했다. 아직 하녀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녀가 젊은 남자 주인의 목욕 시중을 드는 게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농담이에요.”
로제타가 머쓱한 마음에 헤헤 웃었다.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르문트가 언급한 ‘다른 의도’ 도 ‘친해지고 싶다는 의도’쯤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이런 접촉은 무리인가 보지, 뭐. 하긴, 어제 겨우 인사를 텄는데. 로제타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치만 목욕시중이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전 언제든 준비돼 있으니까요.”
이 또한 언제든 성실히 시중을 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나, 이미 잔뜩 의심하고 있는 아르문트에겐 그런 순수한 뜻으로만은 해석되지 않았다.
‘무슨…… 준비?’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상황이 그려졌다. 뽀얀 김이 가득 찬 욕실과, 그 습한 곳에서 곱게 눈매를 휘어 웃는 로제타의 모습. 이내 잘생긴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의도치 않았다고 한들 이딴 상상을 하다니, 민망하다 못해 불쾌했다. 지위가 지위이니만큼 여인들의 육탄공세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으나, 이렇게 뻔뻔하게 대꾸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내쫓았을 테지만, 그러기엔 널 마지막까지 거두겠노라 약조한 게 걸렸다. 게다가 로제타의 푸른 눈동자는 그런 말을 내뱉었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순수했다. 조금의 음흉함도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곧 죽을 몸으로 날 유혹해서 얻을 것이 없기도 하고.’
재물도, 권력도 필요 없다고 말했던 그녀다. 그런데 굳이 왜 자신을 유혹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아르문트의 마음이 차차 가라앉았다. 짧은 기간 동안 봐온 하녀는 둔하고 눈치 없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시답잖은 농담을 뱉은 모양이다. 아르문트는 그녀에게 제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꺼내지 말라고 경고할까 고민하다, 이내 아무 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길어야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삶, 하고 싶은 말도 다 못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신경에 거슬리더라도 참아 넘기는 것이 곧 고인이 될 자를 위한 예의다. 아르문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따뜻한 물 속에서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삼십 분 뒤. 목욕을 마친 뒤 하얀 가운을 걸치고 나온 그는 제 방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어야 할 그의 공간에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붉은 머리의 하녀, 로제타가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방을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아르문트를 발견한 로제타가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전하! 환복을 도와드릴게요!”
아르문트는 잠시 침묵하며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늘 그랬었으니까. 그렇기에 가운을 대충 걸치고 허리끈도 느슨히 묶고 나왔다. 하얀 가운 사이로 훤히 드러난 가슴과 배가 보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래의 주요 부분은 가려져 있었다. 즉, 그는 반쯤 헐벗은 상태였다.
“-가.”
“네?”
뭐라고 하셨어요?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각상 같은 몸을 앞에 두고도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기사 생활을 하며 워낙 남자의 벗은 몸을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심 감탄하기는 했다. 여태껏 봐온 것들과 달리 그의 몸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어깨가 널찍했고, 팔다리는 무척 길었으며, 온몸에 오밀조밀 박힌 근육은 조금도 투박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다만 숙련된 기사인 그녀는 감히 모시는 주군의 반나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태도지만, 저 예술적인 모습을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로제타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르문트가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당장, 나가.”
“그, 환복을…….”
“나가!”
그가 기어코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로제타가 후다닥 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아르문트는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로 로제타가 떠난 문을 노려보았다. 흥분한 까닭인지 그의 귓가가 살짝 붉었다. 목욕할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지만 이제야 확실해졌다.
‘곧 죽을 하녀가 내 몸을 노린다.’
그의 권력도, 재물도, 목숨도 아닌……. ‘몸’ 그 자체를.
***
“쯧, 쪼잔하게 굴기는.”
쫓겨나듯 아르문트의 침실을 나온 로제타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그 보기 좋던 모습을 떠올리니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잡념을 없애고자 노력할 무렵, 문 앞에 서서 경비를 서던 기사,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방금 그거, 황태자 전하 얘기입니까……?”
앗, 릭이 있었지. 로제타가 심드렁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법 당황했는지 은회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한때 그녀의 부하였던 사람인 데다, 워낙 존재감이 흐릿한 탓에 명색이 호위기사인 그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황태자 험담을 뱉어버렸다. 뭐,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그녀가 아는 리처드는 투박한 인상과는 달리 마음이 약해 부탁을 잘 들어주는 편이니까.
“경, 비밀로 해주실 거죠?”
로제타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다란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는 모양이 퍽 고왔다. 아니나 다를까 리처드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 대신…….”
대신? 이번엔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자신에게 조건부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긴, 지금은 상사가 아니라 하녀니까. 그녀는 자신이 또 이전 생 기준으로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섯 번째 생이 시작된 지도 벌써 몇 주인데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았다.
“대신?”
리처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로제타가 말을 재촉했다.
“……이름을 불러도 됩니까?”
리처드가 무뚝뚝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가가 떨리는 모습으로 보아 몹시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부르라고 있는 이름인걸요. 말도 편히 하셔도 돼요.”
고작 이름이 뭐라고 저렇게 긴장해?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녀가 된 이후로, 이름을 허락해달라 말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귀족인 것을 인식한 몇몇만 예의상 존대를 할 뿐, 대부분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부르고 말을 놓았다.
“아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리처드는 끝까지 존대를 고수했다. 아마 그도 ‘아무리 하녀일지라도 귀족은 귀족이니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쪽인 모양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괜찮아요. 혹시 시한부니 어쩌니 얘기를 들으셨다면, 그저 소문일 뿐이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예, 다른 하녀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로제타,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리처드가 허리 굽혀 사과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홍조를 띠고 있던 얼굴에는 짙은 죄책감이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얘가 날 밀쳤었지.’
로제타가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바람에 허리가 쑤시긴 했지만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과거에 암살자를 상대하며 당했던 숱한 부상과 비교하면 별것도 아니다. 애초에 리처드는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이기도 하고. 다만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반응 속도였다. 일이 벌어진 지 한참 후에야 들어온 데다가, 암살자라고 판단된 하녀를 그렇게 무르게 떼어내다니. 호위기사 실격이다. 그녀 또한 아르문트를 여러 번이나 지키지 못했으나, 그래도 한때 그의 상사였던 기사로서 차마 가만히 넘길 수 없었다.
“경,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더욱 강하게 대처하셨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걸요. 전하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로제타가 엷은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말했다. 하녀인 제 지위를 생각하여 최대한 돌려서 충고한 그녀였다. 그러자 리처드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은회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역시…….”
그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로제타, 당신은 참 속이 깊으시군요. 본인의 건강보다도 전하를 더 걱정하시는 그 충정……. 그야말로 모든 기사의 귀감입니다.”
은회색 눈동자가 로제타를 향해 과하게 반짝거렸다.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돼?’
그저 선배 기사로서 리처드에게 충고하려던 로제타는 어버버 말을 잇지 못했다. 좋게 해석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기사일 적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더욱이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그 감동을 거부하고자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과찬이세요. 당연한 얘기인걸요.”
“과연…… 그렇군요. 전하의 소속으로서 당연히 전하를 우선해야 한다는 그 마음가짐, 저도 본받겠습니다.”
그 말투 부담스럽다고! 로제타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자 리처드는 그제야 주제를 돌렸다.
“로제타. 혹…… 이번 휴일에 시간 있으십니까?”
“휴일에요? 왜요?”
“그게…….”
리처드가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험악한 인상과 커다란 덩치 탓에 스물일곱 평생 여자와의 접점이 없던 그였다. 즉, 제대로 된 데이트 신청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탓에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이 굳었다. 차라리 맨손으로 호랑이를 상대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기나긴 고심 끝에 마침내 리처드가 입을 열려는 찰나.
“시간 없다.”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나를 보필하기에도 바쁘니까.”
어느새 화려한 정복을 차려입은 아르문트가 문에 어깨를 기댄 채 말했다. 이내 날카로운 시선이 로제타에게 쏟아졌다. 이미 그가 나오는 것을 파악하고 있던 로제타는 영문 모를 상황에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에 아르문트의 눈썹이 더욱 꿈틀거렸다.
‘내 몸만 노리는 게 아닌가?’
한번 시작된 오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