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소꿉친구, 발레리안 등장 (7/145)

7화. 소꿉친구, 발레리안 등장2021.03.25.

16549564920153.jpg“안 그런가?”

아르문트가 로제타에게 물었다. 사실상 질문이라기보다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던 로제타가 빠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16549564920158.jpg“그럼요! 전하를 보필하는 데 휴일이 어딨겠어요.”

무슨 생각으로 꺼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목표인 그녀로서야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로제타가 천연히 웃으며 확답하자 리처드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그가 연민이 가득 담긴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16549564920163.jpg‘불쌍한 로제타……!’

기껏 몸 바쳐 전하를 구해냈더니, 돌아오는 건 휴일 근무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가 다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 특별한 하녀가 제대로 찍힌 모양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미친 황태자에게 말이다. 그런데도 로제타는 실망한 기색을 비치기는커녕 헤헤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리처드의 눈에는 고결하고도 위대해 보였다. 한편, 아르문트는 리처드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16549564920153.jpg“경은 언제까지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을 생각이지?”

16549564920163.jpg“아, 죄송합니다!”

이성을 되찾은 리처드가 빠르게 비켜섰다. 로제타를 불쌍해할 때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 보이면 그의 소중한 휴일까지 반납해야 하는 수가 있다. 흥, 하고 콧방귀를 내쉰 아르문트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듣자 하니 이 맹랑한 하녀가 자신이 죽지 않는다며 거짓 소문을 내고 다닌 모양이다. 물론 그야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어떤 식으로 인생을 마무리 지을지는 본인의 선택이니. 그러나 그 음흉한 계략에 제 호위기사를 끌어들이는 걸 용납할 순 없다.

16549564920153.jpg‘내 몸만 노리는 게 아니었다니.’

어이가 없군. 아르문트가 또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16549564920158.jpg“전하, 본궁에 가시는 거죠? 제가 모실게요!”

로제타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녀가 함께 간다는 말에 리처드의 인상이 훤해졌다. 곧 죽을 여자가 제 몸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르문트가 쯧 혀를 찼다. 그러곤 서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16549564920153.jpg“필요 없다.”

16549564920158.jpg“전 전하의 유일한 전속 하녀인걸요? 당연히 어딜 가든 모셔야지요!”

로제타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괜히 그런 말을 해선. 아르문트는 그런 약조를 한 것을 벌써 후회하기 시작했다. 며칠만, 며칠만 참자.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며칠만 참으면 이 이상한 하녀에게서도 해방이다.

16549564920158.jpg“전하, 오늘부터는 햇볕이 강하대요. 그러니 제가 양산을 들게요! 전하 피부라도 상하시면 어떡해요. 피부가 타면 따끔거려서 집중도도 떨어지고 그러면-.”

16549564920153.jpg“알았으니 조용히 해라.”

16549564920158.jpg“네!”

만세!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이렇게 손쉽게 곁을 허락받을 수 있다니, 다시 생각해도 독을 먹길 잘했다. 알현실이 있는 본궁까지는 약 십오 분을 걸어야 한다. 돌아올 때도 포함하여 매일 삼십 분은 딱 붙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멜라니 왈, 어떤 사람에게 기억되기 위해선 자주 얼굴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정 시간대에 특정 행동을 반복하면 효과가 더 좋다고 했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 짧게나마 함께 산책하는 것이 바로 딱 좋은 예였다. 로제타는 활짝 웃으며 재빨리 황태자의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에서 양산을 꺼내 들고 왔다. 한편, 아르문트는 해말갛게 웃는 로제타의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16549564920153.jpg‘저 몸으로 무슨 양산을 든다고. 얼마 못 가 포기할 게 뻔하지.’

척 보기에도 양산의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랫동안 수련한 기사들이야 아무렇지 않게 들겠지만, 일반적인 여인에게는 무리였다.

16549564920158.jpg“가는 동안 심심하시지 않게 짧은 이야기를 들려드려도 될까요? 생각보다 재밌으실 거예요.”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에요! 로제타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죽음을 언급하면 그가 한결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잘 써먹는 그녀였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였다면 곧장 거절했을 아르문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마지막 소원이라 하니 들어줘야 할 것 같으면서도, 본궁으로 가는 내내 수다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못마땅했다.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16549564920153.jpg“그래.”

아르문트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으나 그것마저 아름다웠다.

16549564920153.jpg“네가 양산을 들고 있는 동안은 들어주지.”

16549564920158.jpg“좋아요!”

로제타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리처드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 가느다란 팔로 성인 세 명은 가릴 수 있는 거대한 양산을 들다니. 오 분도 못 가서 포기할 게 뻔했다. 아니, 어쩌면 일 분도 채 안 돼서 떨어트리고 말 테다. 그러나 이게 웬걸,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황태자 궁을 나온 즉시 로제타가 커다란 양산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이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16549564920158.jpg“두 분 다 하녀 일을 너무 쉽게 보신 것 같네요.”

생각보다 힘이 많이 필요한 일이랍니다. 로제타가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들의 생각쯤이야 훤히 읽혔다. 기사일 적에도 그녀의 체구만 보고서 비웃는 놈들이 태반이었으니, 하녀인 지금은 더욱 우습게 보일 것이다. 워낙 잘 쓰러지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한몫했다. 흥,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그녀가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16549564920158.jpg“그리고 전 그중에서도 힘이 센 편이거든요. 이 정도 드는 것쯤은 무리도 아니에요.”

로제타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자, 리처드는 더욱 반한 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고, 아르문트는 절망한 얼굴을 했다. 그래. 억지로 키스할 때도 힘이 아주 장사였지. 어제의 입맞춤 아닌 입맞춤을 떠올린 아르문트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16549564920158.jpg“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16549564978802.jpg

  *** 본궁으로 향하는 내내 아르문트는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썹을 휜 모습은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16549564920158.jpg‘하지만 난 거짓말인 걸 알지!’

로제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르문트를 곁에서 보필한 것만 거의 십 년 차. 옆모습만 보아도 그의 기분을 유추할 수 있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느릿해지는 발걸음으로 보아…… 그는 로제타의 이야기에 빠진 상태였다. 그것도 아주 흠뻑. 실제로 아르문트는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를 경청 중이었다. 따분한 사설이나 늘어놓으리라는 예측과 달리 그녀가 풀어낸 이야기는 나름, 아니, 꽤나 재미있었다. 주로 특이한 몬스터나 전설에 대한 것이었는데, 묘사가 어찌나 생생한지 책에서 읽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549564920153.jpg“전설 속 ‘이르케이아의 눈물’이 사실은 귀걸이고, 그 주인은 아스펠 왕국의 왕이라니……. 이런 정보는 어디서 들은 거지?”

이야기 도중 아르문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로제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16549564920158.jpg“어……. 글쎄요.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헤헤.”

사실은 그 왕 내가 죽이고 그 귀걸이 내가 가졌거든. 로제타가 말을 삼켰다. 그녀가 어디서 들었다며 꺼낸 전설과 무용담은 다 그녀가 직접 겪은 것이었다. 그러니 유달리 실감 나지 않고 배기랴.

16549564920158.jpg“자, 오늘은 여기까지!”

느닷없이 멈춰선 로제타가 공표했다. 그 단호한 선언에 아르문트와 리처드 둘 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16549564920153.jpg“왜 벌써…….”

아르문트가 저도 모르게 투덜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래선 정말 아쉬워하는 것 같지 않나! 그가 민망함에 고개를 홱 돌렸다.

16549564920158.jpg“그야, 다 도착했으니까요.”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본궁 앞 정원에 다다라있었다. 다 온 줄도 모르고 왜 이야기를 끝내냐며 투덜대다니. 아르문트의 민망함이 더욱 커졌다.

16549564920153.jpg“가지.”

그가 괜히 차가운 목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에게 꾸벅 인사한 리처드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16549564920158.jpg“전하!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

하녀인 로제타는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가 회의를 끝낼 때까지 정원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아르문트는 당연하게도 대답하지 않고 떠나갔고, 이윽고 로제타가 정원에 홀로 남았다.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귀여운 얼굴로 조잘거리던 아까와는 달리 무표정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화사한 햇살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짙은 녹음 사이로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아름다운 얼굴이 그림자 아래 사라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행인들은 걸음을 내딛는 중간중간 수풀 속에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을 흘끔거렸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미인의 모습은 꼭 그림 같았다. 로제타는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명상을 이어나갔다. 누가 보면 졸기라도 하는 줄 알 테지만, 실은 아르문트의 기운이 무사한지 살피고, 제 몸 안의 기운도 점검하는 것이었다.

16549564920158.jpg‘아직 한참은 멀었네.’

쯧, 로제타가 속으로 혀를 찼다. 회귀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스무 살의 몸은 서른 살일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약했다. 이미 경지에 올라보았기에 더욱이 답답했다. 그녀는 본래 스무 살에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스물다섯에 두 번째를, 스물여덟에 마지막을 깨우쳐 비로소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16549564920158.jpg‘이번엔 저번 회차처럼 5년쯤 걸리려나.’

네 번째 생에선 본래보다 3년이나 빠른 나이에 모든 깨달음을 얻었다. 회귀 전 경험을 그대로 기억하는 데다가, 한번 올라본 요령도 있는 덕이었다. 그러나 하녀가 된 이번 생에는 검을 쓸 일이 너무 적어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매일 새벽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수련은 하고 있었지만, 수련과 실전은 다른 법이니.

16549564920158.jpg‘발레리를 만나봐야겠다.’

감각을 잃지 않으려면 그를 만나 대련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다섯 번째 인생이 막 시작되었을 때쯤이었으니, 슬슬 찾아가서 정보를 공유할 때도 되었다. 같은 황성에서 일하니 언제든 만날 수야 있었지만, 하녀 일이 생각보다 바빠 짬이 나지 않았던데다가 아직은 아르문트의 신임을 얻는 게 더 급했던 탓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같은 황성이라곤 해도 마법사인 그는 본궁에서 일하고, 로제타는 황태자궁을 떠나지 않았으니 우연히 마주치기는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그녀가 본궁에 찾아오지 않는 한.

16549565007777.jpg“로제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아하면서도 장난스럽고, 고상하나 딱딱하지 않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 로제타가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 왔다. 이 또한 익숙한 향기였다. 로제타가 슬며시 눈을 떴다. 꽃향기의 주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16549564920158.jpg‘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로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아르문트를 향할 때와는 달리, 조금의 가식도 없는 순수한 기쁨이 드러났다.

16549564920158.jpg“발레리!”

라그나르 제국이 자랑하는 최연소 대마법사. 로제타의 소꿉친구이자, 친혈육보다 더 혈육 같은 존재. 어깨 위로 살랑이는 화사한 금발과 늘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귀걸이가 트레이드 마크인, 발레리안 윈저프리드였다.

16549565007777.jpg“오랜만이야, 내 로즈.”

발레리안이 여우처럼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16549565007792.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