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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한 번만 안아봐도 돼? (8/145)

8화. 한 번만 안아봐도 돼?2021.03.28.

발레리안 윈저프리드. 라그나르 제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고작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로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 마탑의 차기 주인이라는 영예를 버리고 황실에 몸을 바친 제국의 자랑.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노력해 재능을 꽃피운 온 국민의 귀감. 이렇듯, 그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온갖 찬사란 찬사를 모두 독차지했다. 이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다면 무엇 하나라도 빠지는 것이 있어야 공평한 법이거늘, 발레리안은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거머쥐었다. 외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사한 봄볕을 닮은 머리카락은 늘 결 좋게 살랑거렸고, 피부는 어지간한 귀족 영애보다 희고 고왔으며, 여우처럼 휘어진 눈매와 그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장난스러워 보이다가도 때론 몹시 관능적이었다. 벽안은 제국에서 가장 흔한 눈동자 중 하나였으나,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어딘가 달랐다. 옅은 초록빛이 감도는 파란 눈은 맑은 얼음처럼 투명하면서도 밝아 꼭 보석을 박아넣은 것 같았다. 빤히 바라볼 때면 그 광채에 홀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작은 얼굴에 섬세하게 자리잡힌 수려한 이목구비는 ‘멋지다’보다는 ‘아름답다’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모습이었고, 전체적으로 길쭉한 몸은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게 탄탄했다. 한마디로 그는 라그나르 제국을 대표하는 미남이었다. 출중한 능력과 아름다운 외모를 모두 갖춘 사람은 흔하지 않다. 심지어 그는 부까지 갖추었고, 고리타분한 귀족 자제들과 달리 성격도 매력적이었다. 그렇기에 발레리안은 미혼 영애들이 남몰래 짝사랑하는 남자 1위에 올랐고, 그와 자주 시간을 보내는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몇 년 안에 그녀가 최고의 기사로 자리매김하며 그의 인기를 압도하였지만. 로제타로서는 그 얼토당토않은 질투가 억울할 뿐이었다. 애초에 질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20년. 무려, 20년을 친구로 지냈다. 회귀한 시간을 합치면 그 이상이다. 그들은 로제타가 열 살, 발레리안이 열두 살일 때 처음 마주했다. 집안이 몰락하여 어린 몸으로 거리를 떠돌던 발레리안을 로제타의 어머니인 메이필드 남작 부인이 발견했고, 남작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든 패물을 팔아서라도 그를 후원했다. 발레리안은 첫 만남 때부터 로제타에게 호감을 보였다. 은인의 딸이기도 하고, 자신의 여동생과 나이가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집안이 몰락할 때 잃어버렸던 여동생을 대신하여, 발레리안은 로제타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리안은 로제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어머니가 작고한 뒤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물심양면 도와준 것도 그였다. 정작 친아버지는 그녀를 무시하기 바빴는데도 말이다.

16549565083498.jpg‘오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로제타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16549565083519.jpg“보고 싶었어.”

꿀처럼 달달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더니, 시야가 가로막혔다. 로브를 고정한 푸른 보석이 눈앞에 보였고, 이내 단단한 것이 그녀의 어깨를 둘렀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껴안은 것이었다. 무려, 황실 본궁의 정원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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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65083498.jpg‘이게 미쳤나?’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다. 생각은 빨랐고, 동작은 더욱 빨랐다. 콰직! 로제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발을 내리찍었다. 낮은 구두 굽이 사정없이 발레리안의 발등을 가격했다.

16549565083519.jpg“윽!”

발레리안이 작게 신음하며 몸을 물렸다.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의 실력이면 로제타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일찍이 피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맞고 나서야 떨어지다니. 변태가 따로 없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 그를 쏘아보자, 눈치 빠른 발레리안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16549565083519.jpg“변태 아니야. 너 기분 좋아지라고 안 피했지. 맞으라고 때린 건데 안 맞으면 로즈가 아쉬울 거 아냐.”

16549565083498.jpg“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을 세간에선 변태라고 해.”

16549565083519.jpg“그럼 변태 맞나봐.”

변태 하지, 뭐. 발레리안이 눈꼬리를 아래로 휘며 생긋 웃었다. 쯧, 로제타는 짧게 혀를 찼다. 이것이 바로 발레리안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치대도 너무 치댄다는 것!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건만 발레리안은 로제타를 아기처럼 귀엽게 여겼고, 온갖 스킨십을 아끼지 않았다. 크면 좀 달라지겠지, 했는데 이게 웬걸. 발레리안은 로제타가 서른일 때도 그녀를 귀여워했다. 마찬가지로 스킨십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다른 사람 앞에선 공과 사가 분명하기로 유명한 대마법사는 소꿉친구인 로제타 앞에선 한 마리의 강아지가 되었다. 그것도 아주 애교 많은 강아지. 밥 먹듯이 그와 살을 맞댄 결과, 로제타 또한 웬만한 스킨십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면역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교양이 있었다. 발레리안에게는 없는 교양이. 아무리 반갑다고 한들, 자신의 외모와 유명세를 안다면 적당히 자중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는 조금도 인내하지 않았다. 인내는 무슨, 로제타만 발견했다 하면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기 바빴다. 그 탓에 이전 생에서 로제타는 끊임없는 염문설에 시달려야만 했다. 서른이 되도록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늘 그녀의 곁을 지키는 그의 존재 탓에 다른 남자들이 더욱 못 다가온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상한 소문이 날 뻔했다. 로제타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16549565083498.jpg“자중 좀 해, 발레리! 난 이제 기사가 아니라 하녀란 말이야!”

16549565083519.jpg“맞아, 로제타, 지난번엔 기사가 됐었댔지? 그때 이야기는 언제 자세히 해줄 거야?”

발레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꿈을 이뤘었구나, 대단해. 살가운 칭찬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며. 회귀할 때마다 칭찬해주는 건 똑같네.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네 번째였다. 회귀하자마자 발레리안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는 것도. 발레리안은 로제타의 요청에 시간을 돌린 장본인이다. 비록 약간의 부작용으로 루프가 생겨나긴 했지만, 이런 대규모 시간 마법이 성공한 것은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제타는 회귀할 때마다 그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천재에게 상황을 공유하는 건 당연했다. 발레리안은 항상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아주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이다. 그러곤 지난 회차의 패인을 함께 분석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한편 이번 회차의 경우, 하녀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탓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루프에 빠졌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 끝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암살 시도가 많을 때가 아니니, 아르문트의 믿음을 얻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16549565083498.jpg“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갈 생각이었어. 지금은 시간이 안 되고…….”

로제타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아직 그들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으나,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계속 있으면 들키고 말 것이다. 물론 들켜봤자 지겨운 염문설이 나는 정도겠지만, 천재 마법사가 천재 기사와 교제한다고 소문이 나는 것과, 일개 하녀가 마법사에게 들이대더라 추문이 나는 건 그 결이 달랐다. 게다가 기운을 보아하니 아르문트가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다시 보필하려면 발레리안과 얘기 나눌 시간이 부족할 테다. 로제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발레리안을 응시했다. 그는 뭐가 그렇게 기쁜지 아직도 눈매를 휘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16549565083498.jpg“며칠 뒤에, 언제가 괜찮아?”

16549565083519.jpg“나야 로즈가 원한다면 언제든.”

16549565083498.jpg“장난치지 말고!”

16549565083519.jpg“장난 아니야.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그런데 로즈, 이런 옷 입은 것도 예쁘네. 과연 내 동생은 안 어울리는 게 없어.”

일은 힘들지 않고? 그가 다정히 속삭였다. 두어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퍽 부드러웠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머리를 묶어주곤 했던 그이기에 로제타는 별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16549565083498.jpg“힘들진 않아. 오히려 재밌어. 기사로 일할 때보다 즐거운 것도 있고. 그, 친구도 생겼어.”

16549565083519.jpg“친구?”

16549565083498.jpg“응. 같이 일하는 하녀 동기들.”

로제타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한 건 다섯 번의 인생을 통틀어서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과한 반응이 돌아왔다.

16549565083519.jpg“친구라니…… 이 오빠는 정말 감격스럽다, 로즈.”

16549565083498.jpg“오빠는 무슨.”

그녀가 민망함에 괜히 툴툴거렸다. 그를 오빠처럼 의지하는 건 사실이나 그렇게 불러줄 마음은 없었다. 그러건 말건 발레리안은 잔뜩 감동한 얼굴을 하고선 그녀의 어깨를 금방이라도 감싸 안을 듯 그러쥐었다.

16549565083519.jpg“조만간 집에 데려와. 맛있는 거 해줄게.”

16549565083498.jpg“대마법사님 집에 부담스러워서 가겠어? 그리고 놔, 누가 보겠다!”

16549565083519.jpg“보면 좀 어때?”

16549565083498.jpg“이번 생에도 내 혼삿길을 망치려고 작정했어?”

16549565083519.jpg“우리 로즈, 날 두고 다른 남자랑 결혼할 생각이었어?”

16549565083498.jpg“뭐래.”

의도치 않은 잡담이 이어졌다. 투덜거리는 말투와 달리 로제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연신 걸리어 있었다. 발레리안과 대화하다 보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는 특유의 말재주로 평범한 대화도 즐겁게 만들곤 했다. 어머니를 잃고 다른 가족의 무관심 속에 방에 틀어박혀 있던 그녀를 세상으로 끌어낼 때도 이랬었다. 이러다 정말 아르문트가 보겠네. 일순 떠오른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린 로제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담소를 중단했다.

16549565083498.jpg“어쨌든 그럼, 조만간 네 연구실로 찾아갈게. 아직은 전하의 신임을 얻는 게 바빠서.”

16549565083519.jpg“……그래.”

발레리안의 미소가 어쩐지 씁쓸해졌다.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로제타를 걱정하는 얼굴이다. 말은 장난스럽게 하지만, 몇 번씩이나 인생을 반복하여 살고 있다는 그녀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16549565083519.jpg“늘 건강 조심하고. 며칠 못 볼 텐데 한 번만 더 안아봐도 돼?”

16549565083498.jpg“안 돼, 기척 안 느껴져? 누가 오고 있잖아.”

16549565083519.jpg“아직 멀어. 한 번만, 로즈.”

응? 발레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아양을 떨었다. 저 얼굴. 붉은 입술을 휘어 올리고 푸른 눈동자를 마구 빛내는 저 귀여운 얼굴! 로제타가 약한 부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자신의 수려한 외모를 저렇게 써먹었고, 그녀는 속절없이 넘어갔다. 크고 나선 적당히 면역이 생기긴 했지만 잘 거절하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에휴, 로제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기척이 느껴지는 곳이 꽤 멀기도 하고. 어지간히 눈이 좋지 않은 한 못 볼 것이다. 그녀가 대충 두 팔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잔근육이 선명하게 박힌 팔이 다시금 그녀의 등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로제타가 로브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16549565083519.jpg“조만간 연구실로 와. 여섯 시에는 퇴근하니까 우리 집으로 바로 와도 좋고. 오랜만에 둘이 시간 좀 오래 보내자.”

우리 집. 발레리안은 황궁 근처에 마련한 제 타운 하우스를 꼭 저렇게 부르곤 했다. 로제타와 발레리안, ‘우리’의 집이라고. 피식. 로제타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누가 들으면 부부 혹은 연인으로 착각할 내용이다. 이러니 소문이 안 나고 배기겠는가.

16549565083498.jpg“알았어.”

16549565083519.jpg“내가 준 영양제 잘 챙겨 먹고.”

16549565083498.jpg“네, 알았어요, 할아버지.”

별것도 아닌 농담에 발레리안이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 탓에 그의 가슴이 움직여 로제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으, 간지러워. 로제타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목적을 완수한 발레리안은 얌전히 물러났다.

16549565083519.jpg“그럼. 또 봐, 로즈.”

16549565083498.jpg“잘 가, 발레리.”

로제타가 떠나가는 발레리안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 또한 못다 한 대화가 아쉽긴 하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척이 꽤 가까워졌다. 보통 사람보다 유독 희미한 기척, 아르문트의 것이었다. 로제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발레리안을 만나며 잠시 허물었던 가면을 다시 쓸 시간이 되었다. 눈을 뜨자 곧 멀리서 다가오는 아르문트가 보였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16549565083498.jpg“전하!”

그리고 아르문트는 또다시 차갑디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어쩐지 평소보다도 더 불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16549565083498.jpg‘뭐야, 또 뭐가 문젠데?’

이 예민한 자식. 안에서 무슨 일 있었나? 로제타가 그림 같은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속으로 그를 욕했다.

16549565125278.jpg“방금.”

아르문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16549565125278.jpg“같이 있던 자,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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