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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9/145)

9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2021.04.01.

16549565203724.jpg‘이 자식, 눈은 또 왜 이렇게 좋아?’

로제타가 미소 짓는 낯을 유지하며 속으로 그를 욕했다. 아르문트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실책이었다. 툭하면 죽어버리는 개복치 같은 면모 때문에 잠시 착각했으나, 그는 명색이 황태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검사였다. 타고난 능력도 어지간한 기사보다 더 뛰어났다. 아르문트의 호위인 리처드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거리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호위기사도 차마 확인하지 못한 장면을 아르문트는 본 것이다. 다행인 점은 거리가 멀어 발레리안의 얼굴까지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한 모양이었다.

16549565203724.jpg“아, 친구예요.”

황태자와 그의 호위기사가 추문을 옮길 것 같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기에 그녀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16549565203724.jpg“본궁에서 일하는 친구요.”

1654956520374.jpg“키가 커 보였는데.”

16549565203724.jpg“네, 키가 아주 큰 친구랍니다.”

로제타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을 멀뚱멀뚱하고 아르문트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또다시 경계심이 가득했다. 또 무언가 의심할 거리를 찾았구나. 로제타가 남몰래 한탄했다. 실제로 아르문트는 의심의 나래를 마구 펼치는 중이었다.

1654956520374.jpg‘누군가와 접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앞에선 가족과 사이가 안 좋다며 부도 권력도 관심 없다 얘기했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가족의 안위를 협박받아, 앞에서는 순진한 척 행세하고 자신의 뒤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스스로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이러한 공작을 펼친 자는 없었으나, 그를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세력을 생각하면 못 할 짓도 아니었다. 아르문트는 친구라는 자의 신상정보를 캐내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16549565203724.jpg“콜록, 콜록!”

그러나 한 마디 꺼내기도 전 로제타가 갑작스럽게 기침을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요란한 기침을.

1654956520376.jpg“로제타, 괜찮습니까?”

16549565203724.jpg“저는 괜찮…… 콜록!”

괜찮다는 말과 달리 몸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물론, 이것은 연기였다. 아르문트의 의심을 조금이나마 죽이기 위한 혼신의 연기. 로제타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며 입안을 콰직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어지러운 척 몸을 휘청거렸다.

1654956520376.jpg“로제타!”

가느다란 몸이 힘없이 기울었다. 리처드가 받아주겠거니, 생각했기에 로제타는 걱정 없이 눈을 감았다. 만약 못 받아서 바닥에 쓰러지더라도 머리만 조심하면 그만이다. 불쌍한 모습을 보여 아르문트의 연민을 자극하기에는 그 편이 더 효율적이기도 했다. 다만 이런 상황까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근육이 단단하게 박힌 팔이 강하게 등을 감싸 쥐었다. 그와 동시에 깊고 풍성한 향기가 콧가를 맴돌았다. 야릇한 느낌의 시원하고 달콤한 향. 로제타가 기사로 일하던 시절 가끔 맡고는 했던…… 아르문트 특유의 체향이었다. 이를 깨달은 로제타는 번쩍 눈을 떴다. 시야에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얼굴이 담겼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등을 감싸 안아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준 것이었다.

16549565203724.jpg‘방금까지만 해도 날 의심했으면서……?’

로제타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도, 콜록거리며 연기를 이어나가는 걸 잊지 않았다. 의도했던 대로 짓씹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아르문트는 제 행동에 본인 스스로도 당황했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로제타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몸부터 움직인 모양이었다. 이내 그가 그녀의 손에 묻어난 피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4956520374.jpg“너…….”

1654956520376.jpg“로제타! 피, 피가……! 설마, 저번의 내상이 다 낫지 않았던 겁니까?!”

그러나 리처드가 눈치 없게도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얘는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되게 걱정해주네. 원래 이렇게 착한 애였나? 로제타는 리처드의 친절을 의문스러워 하면서도 계속해서 불쌍한 척 행세했다.

16549565203724.jpg“괘, 괜찮아요. 나아지는 중이니 너무 걱정 말아요.”

로제타가 어지러운 척 아르문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움찔, 아르문트가 몸을 떨었다.

16549565203724.jpg‘스킨십할 기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해도 이 기회를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16549565203724.jpg“잡아주셔서 고마워요, 전하. 전하 덕분에 살았네요.”

로제타는 기다란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천천히 팔랑거리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피가 묻어 붉어진 입술을 하고선 아련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가엾어 보였다. 아르문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살았다니. 그 말이 얼마 없는 죄책감을 마구 자극했다. 그녀는 자신 덕에 산 게 아닌, 자신 탓에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신경 쓸 것을 염려하듯 피 묻은 손바닥을 감추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아르문트는 가슴속 어딘가가 찌릿찌릿한 기분을 느꼈다. 이름하여, 양심의 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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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65203724.jpg“정말 괜찮아요, 전하. 그보다, 계속 햇빛 아래 계시면 피부가 따가워질 거에요. 얼른 돌아가요!”

조심스럽게 아르문트의 품을 빠져나온 로제타가 허둥지둥 양산을 잡아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는 모습이 더욱이 짠했다.

1654956520374.jpg‘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아르문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과한 의심이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1654956520374.jpg“……그래. 돌아가지.”

아르문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6520374.jpg“양산은 경이 들게. 저러다 쓰러지면 괜한 말을 살 테니.”

흥,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치 그녀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결정인 척 도도하게 말하는 모습이 로제타의 눈에는 귀엽기 짝이 없었다.

16549565203724.jpg“전하, 감사해요! 절 위해……!”

1654956520374.jpg“쓸데없는 오해 하지 마. 널 위해서가 아니다.”

16549565203724.jpg“그래도 감사해요!”

말을 못 알아듣는군. 아르문트가 차갑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양산을 든 리처드가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16549565203724.jpg‘개복치가 아니라 고양이 같네.’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린 시절 발레리안과 함께 길렀던 고양이, ‘발로’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잘해주는 모습이 발로와 똑같았다. 자세히 보니 생김새도 비슷해 보였다.

16549565203724.jpg‘날카로운 눈매도 그렇고, 샛노란 눈도 그렇고. 정말 비슷하잖아?’

다른 사람들은 늠름하나 사나운 그를 흑표범에 비유하곤 했으나, 로제타의 눈에는 그저 사나운 척하는 고양이 정도로만 보였다. 그녀는 제 주군을 향하기에는 다소 무례한 생각을 이어나가며 걸음을 내디뎠다. *** 오래 지나지 않아 황태자 궁에 다다랐다. 은근슬쩍 그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온 로제타는 이왕 그의 연민을 산 것, 조금 더 들이대 보기로 작정했다.

16549565203724.jpg“전하, 환복을…….”

곧바로 날카로운 시선이 돌아왔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16549565203724.jpg“도와드리는 대신, 고생하셨을 전하를 위해 차라도 올릴게요.”

1654956520374.jpg“……그래.”

아르문트가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그가 차를 좋아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휴, 로제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무사히 넘어갔다. 만약 그대로 말했더라면 곧장 방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르문트를 위한 차를 준비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차를 좋아하는지는 잘 알았다. 몇 년을 곁에서 일했는데 그 정도야 훤하다. 그러나 문제는 차를 우려내는 솜씨가 썩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녀 또한 이전 생에선 늘 하인을 시키곤 했기에 능숙할 리 만무했다.

16549565203724.jpg“전하, 제가 직접 우린 홍차예요.”

로제타가 헤헤 웃으며 그의 앞에 찻잔을 올렸다. 부족한 실력을 웃는 얼굴로 메꾸려는 의도였다. 아르문트는 전용 티스푼을 몇 번 휘저어 차에 독이 있는지 검사부터 했다. 세타르처럼 몇몇 희소한 독은 확인할 수 없으나,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독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우아하게 홍차를 한 입 머금었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평가를 내렸다.

1654956520374.jpg“형편없군.”

아르문트는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 있는 작자였지, 참. 로제타가 다시금 깨달았다.

16549565203724.jpg“죄송해요, 더 연습할게요. 새 걸 가져다드릴까요?”

1654956520374.jpg“됐다. 네 일이나 해라.”

곧 죽을 것이 연습은 무슨. 아르문트가 짧게 혀를 찼다. 홍차는 그의 세련된 미각을 충족시키진 못했으나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로제타는 그의 명령에 따라 침실을 정돈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먼지가 쌓인 곳이 없나 유심히 살펴보던 중,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진 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아르문트의 방을 청소할 때부터 봤던 것이었다. 작고 예쁜 것들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아르문트였기에, 꽃의 존재가 신기했으나 하녀장이 올려놨겠거니 생각했었다.

16549565203724.jpg‘잔뜩 시들었네. 왜 새 걸로 안 바꾸지?’

로제타는 새 꽃을 준비해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꽃병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르문트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1654956520374.jpg“그건 그대로 둬.”

16549565203724.jpg“네?”

1654956520374.jpg“그대로 두라 했다.”

뭐지? 중요한 꽃인가? 로제타가 눈을 껌뻑거리며 꽃병을 내려놓았다. 단호한 모습으로 보아 소중한 사람에게 받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그를 슬쩍 떠보았다.

16549565203724.jpg“아, 소중한 분이 주셨나 봐요.”

1654956520374.jpg“……그래.”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이야! 로제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르문트의 소중한 사람이라니. 도대체 누구지? 로제타가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때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16549565203724.jpg‘혹시 루니엘라 영애인가?’

페이즐리 테레즈 폰 루니엘라. 발레리안과 마찬가지로, 워낙 유명해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었다. 유명세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성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외모였다. 로제타는 이전 생에서 가끔 그녀를 마주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미모에 깜짝깜짝 놀랐다.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은발과, 핏줄이 보일 만큼 투명한 피부,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적금색의 눈동자는 실로 인간이 아닌 신의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루니엘라 공작가라는 그녀의 어마어마한 배경이었다. 루니엘라는 제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공작가로, 오래전부터 라그나르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력가의 외동딸인 페이즐리는 자연히 사교계의 정상에 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16549565203724.jpg‘셀레나도 루니엘라 영애의 눈에 들기 위해 별짓을 다 했었지.’

첫 번째 생에서 로제타의 이복 여동생, 셀레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선물을 다 갖다 바쳤다. 로제타에게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 어찌나 졸라대는지 귀찮음을 넘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루니엘라 영애는 조금의 관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후 로제타가 제국 최고의 검으로 자리 잡은 뒤, 셀레나는 전략을 바꿔 루니엘라 영애의 자리를 꿰차고자 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애초에 로제타는 사이도 좋지 않은 여동생의 뒷배가 되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교계에는 거의 출입하지 않았던 로제타가 그녀를 종종 마주치곤 했던 이유이자,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에 그녀를 떠올린 이유. 페이즐리 테레즈 폰 루니엘라는 몇 년 후 아르문트가 결혼하는 상대였다. 결혼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남편을 잃는 안타까운 여인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16549565203724.jpg‘그런데 이때는 둘 사이가 괜찮았었나?’

로제타가 바싹 마른 꽃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문트의 저 더러운 성격은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해서 바뀔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여자라면 사사건건 까다롭게 구는 남편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로제타가 기억하는 아르문트와 페이즐리의 관계는 부부라고 지칭하기는 다소 차가웠다. 결혼한 지 1년이 넘어도 합방은커녕 식사도 함께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에 호위를 서던 로제타가 힘겨워할 정도였다.

16549565203724.jpg‘설마 미래가 바뀌는 건…….’

예쁜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아르문트는 다른 방식으로 죽곤 했다. 로제타가 달라졌으니 미래도 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1654956520374.jpg“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르문트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로제타의 상념을 깼다.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꽃이 맞다고 대답해줬더니 갑자기 로제타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미간에 주름까지 잡혔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모습이었다.

16549565203724.jpg“아,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에 빠졌어요. 그런데 혹시…….”

소중한 사람이 루니엘라 영애를 말하나요? 로제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일개 하녀가 묻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정보다. 무슨 주제로 그런 질문을 하냐며 자신을 째려볼 아르문트의 반응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1654956520374.jpg“혹시?”

아르문트가 재촉했다. 평소에는 말도 잘 하지 않던 사람이 왜 오늘따라 자꾸 이상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로제타는 그가 왔다 갔다 구는 모습이 역시 고양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65203724.jpg“혹시, 저녁에는 목욕 안 하세요?”

로제타 메이필드. 라그나르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 좌우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이다. 고로 스킨십 시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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