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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순조로이 착각을 쌓아가는 중 (10/145)

10화. 순조로이 착각을 쌓아가는 중2021.04.04.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의 의사를 알 수 있었다. 아르문트가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흉흉한 눈빛으로 로제타를 쏘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귓가가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으나 아마 분노한 까닭이리라. 그가 불호령을 내리기 전 로제타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얼른 선수를 쳤다.

16549565395857.jpg“아침에 목욕하셨으니, 저녁에는 가볍게만 씻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친구한테 들었는데, 자주 씻는 게 오히려 피부에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공유하고자 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처럼 목소리도 태연했다. 그에 민망해진 것은 아르문트였다.

16549565395863.jpg‘내가 착각했나?’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으나, 혼자 다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몹시 민망했다. 아르문트는 로제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차를 들이켰다. 어쩐지 농락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6549565395863.jpg“고작 외모 따위에 과하게도 신경 쓰는군.”

양산 아래에서 걸어야 한다느니, 목욕은 하루에 한 번만 하라느니. 하나같이 쓸모없는 조언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몇 시간이고 검술 수련을 하던 그다. 인생을 통틀어 외모에 관심을 기울인 적은 단 1초도 없었다. 아르문트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목숨을 보전하고 황태자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오, 이유였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시간도, 마음의 여력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건만 로제타는 경악스럽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16549565395857.jpg“외모 따위라고요?”

너무 놀란 얼굴이라 아르문트는 제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되짚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16549565395857.jpg“어떻게 그 외모를 두고 그런 말을 해요?”

16549565395863.jpg“……뭐?”

16549565395857.jpg“전하도 거울을 보시면 알 거 아니에요!”

눈이 있으면 보이지 않아요? 로제타가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다. 불경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아르문트는 너무 당혹한 나머지 입 닫고 꺼지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그가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대화 아닌 대화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16549565395857.jpg“전하 피부가 얼마나 곱고 예쁜데요. 그걸 고작이라고 표현하는 게 말이 돼요?”

16549565395863.jpg“…….”

16549565395857.jpg“피부도 그렇고 눈코입도 하나같이 다 예뻐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을 정도라고요!”

그래, 내가 이 지겨운 회귀를 어떻게 버텼는데! 보고 또 봐도 새롭게 잘생긴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나날을 견디는 것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로제타는 흥분에 겨워 씩씩거렸다.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 그의 외모에 진심이었다. 재수 없는 주군놈, 봐줄 거라곤 외모밖에 없는데 그걸 깎아내리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 그녀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아르문트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 또한 자신의 외모가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외모만 보고 호감을 품은 채 다가왔으니까.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황후와 1 황자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 눈치만 보며 사라졌고, 그 나머지는 아르문트의 성격에 데여 도망갔다. 그의 성격을 알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면전에 대고 이런 칭찬까지 한 사람은 이 하녀가 처음이었다. 이에 대한 아르문트의 감상은…….

16549565395863.jpg“미쳤나?”

안타깝게도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16549565395863.jpg“어차피 죽을 몸이라고 겁을 상실한 모양이군.”

황금색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사나웠다. 목을 긁듯이 흘러나오는 음성 또한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아차. 로제타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잠시 너무 흥분해서 선을 넘어버렸다. 여태껏 그렇게 노력하여 아슬아슬하게나마 넘지 않았던 경계를 단숨에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16549565395857.jpg“죄송합니다.”

로제타가 재빨리 고개를 푹 숙여 사과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마구 밀려들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눈에 눈물도 고였다. 지나치게 긴장하면 눈이 촉촉해지는 것은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마주한 아르문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16549565395863.jpg‘우는 건가?’

그에게 한 소리를 당한 하녀가 울며 떠나는 것은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있던 일이다.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다른 이의 눈물에서 조금의 감정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도 울지 않던 로제타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느낌이 좀 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고 몸을 휘청거리던 사람이었다. 차에 든 독을 대신 마셔서 죽게 생겼는데도 아르문트를 위한 차를 준비해오기도 했다. 자신은 죽어도 괜찮으니 괜한 죄책감을 갖지 말라며 위로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한마디로, 천하의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16549565395863.jpg‘됐다. 내가 과하게 반응했군.’

아르문트는 이런 말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하고 입술만 간지럽혔다. 배려의 말도 원래 하던 사람이 해야 자연스러운 법이었다. 상냥한 말은커녕 나가라, 꺼져라, 죽여라 등등 험한 말들만 입에 담고 살아온 아르문트는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치열하게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어떤 건 너무 무뚝뚝했고 어떤 건 또 지나치게 상냥해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한편 로제타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시무룩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16549565395857.jpg‘무릎을 꿇을까, 아니면 머리를 박을까?’

그녀는 기사로 오래 일한 탓에 사고가 다소 극단적인 경향이 있었다. 기사단에 있다 보면 실수 후에 머리 박는 상황쯤이야 흔하다. 머리만 박으면 다행이지, 보통은 박은 후에 얻어맞기도 한다. 로제타 또한 그 치욕을 몇 번 경험했었다.

16549565395857.jpg‘좋아, 무릎을 꿇자.’

머리를 박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하지만 치마를 입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로제타가 금방 결정을 내렸다.

16549565395863.jpg“-좋아하나?”

16549565395857.jpg“제가 잘못했어요, 전하!”

그녀가 주저 없이 바닥에 무릎을 내리찍었다. 퍽!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응?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나? 로제타가 질끈 감은 눈을 슬쩍 떴다. 분명 아르문트가 무어라 한 것 같은데 무릎 찍는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16549565395863.jpg“지금 뭐 하는 건가!”

아르문트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눈가가 마구 떨리는 것을 보아 퍽 당황한 모양이었다.

16549565395857.jpg“잘못을 빌려고…….”

16549565395863.jpg“당장 일어서!”

심지어 그는 로제타에게 손을 내밀어주기까지 했다. 로제타는 얼떨떨하게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피부가 닿자 아르문트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귀족 영애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바닥이 거칠었기 때문이었다.

16549565395863.jpg‘몸은 또 왜 이리 말랐어.’

꼭 못 먹고 자란 사람처럼. 아르문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불쌍한 점이 자꾸 추가되는 상황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16549565395863.jpg“네게 무릎 꿇으라 시키지 않았다. 경고하건대,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마.”

16549565395857.jpg“넵.”

로제타가 위아래로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심기를 더 거슬러서 좋을 건 없다. 다행히 아르문트는 말만 험악하게 할 뿐 아까보다 표정이 누그러져 있었다.

16549565395857.jpg‘무릎 꿇는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말은 하지 말라 하지만 내심 마음에 들었나 봐! 로제타가 착각을 하나 더 쌓아 올렸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16549565395857.jpg“저, 근데…… 방금 뭐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후. 아르문트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꺼낸 말을 또다시 뱉으려니 더욱이 부끄러웠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민망함을 억누르며 겨우 답했다.

16549565395863.jpg“배를 좋아하냐 물었다.”

16549565395857.jpg“배요?”

갑자기 웬 배? 로제타가 눈을 껌뻑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두 번까지는 봐준다 해도 세 번은 무리였다.

16549565395863.jpg“하나 더 경고하지.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까다로운 자식. 로제타가 웃으면서 속으로 욕을 했다. 느닷없는 단어를 꺼냈으면 적어도 먹는 배인지 타는 배인지는 설명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안타깝게도 아르문트는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 잘 아는 로제타는 한 번 더 되묻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16549565395857.jpg“네, 좋아해요.”

먹는 배든 타는 배든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왠지 직감 상 아르문트는 이런 대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썹이 일직선으로 평평해졌다. 그 대답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16549565395863.jpg“내일 오전 열한 시쯤 시간 비나?”

16549565395857.jpg“네? 그때는 아마-.”

16549565395863.jpg“안 비어도 비워둬.”

로제타가 고개를 열심히 갸웃거렸다. 왜 비워두라는 건지 묻고 싶은데 직접 물으면 또 짜증 낼 것 같아서 신체 언어로 표시하는 것이었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황당하다는 듯 쯧, 혀를 차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16549565395863.jpg“죽기 전에 추억 하나쯤은 만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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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문트의 방에서 쫓겨난 로제타는 몇 번이나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릿한 고통이 느껴지는데도 여전히 이게 꿈인지 생신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르문트가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하다니!

16549565395857.jpg‘어쩌면 나를 바람 맞히려는 고약한 계획일지도 몰라.’

얼마나 믿기지 않으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만나는 장소가 아르문트의 내실이었다. 애초에 아르문트는 이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로제타는 그날 밤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반신반의하며 눈을 감았다. 너무 기대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스렸다. 괜히 기대를 크게 했다간 실망도 클 것이기에. 그리고 다음 날 오전.

16549565395857.jpg“전하. 정말…… 진심이세요?”

16549565395863.jpg“그래.”

아르문트의 확답에 로제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16549565395857.jpg“정말 저를 데리고 뱃놀이를 가신다고요?”

감히 기대하지 않던 포상이 주어졌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려 로제타에게 뱃놀이를 가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남는 시간에는 방에 박혀 책이나 읽거나 검술 수련만 하던 그 아르문트가! 로제타는 이전 생에 뱃놀이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었고, 여러모로 배 위는 아르문트를 호위하기 적합하지 않은 장소이긴 하나, 그와의 관계가 진척된 것 하나만으로 몹시 즐거웠다.

16549565395857.jpg“전하,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죽는다던데. 혹시 얘 또 죽는 거 아냐?! 그녀가 조급하게 묻자 아르문트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16549565395863.jpg“한 번만 더 물으면 없던 일로 하지.”

16549565395857.jpg“아니요! 안 물을게요! 조용히 할게요!”

로제타가 재빨리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이놈의 입, 나쁜 입! 과장되게 입술을 때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르문트와 리처드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뱃놀이할 연못은 성내에 있기는 하지만 제법 거리가 있어 마차로 이동해야만 했다. 로제타는 신이 나서 창밖을 구경했다. 매일 다니는 길이지만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풍경이 더 예뻐 보였다. 턱을 괴고 심드렁히 앉아 있던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단정한 얼굴 위로 피어난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그로서는 이 외출이 귀찮기 그지없었으나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가슴 찔리는 양심의 가책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한 가지가 또 신경에 거슬렸다.

16549565395863.jpg“……옷은 꼭 그걸 입어야 했나?”

미리 시간을 빼두라 말했거늘, 굳이 메이드복을 챙겨입고 온 것이 황당했다.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매일 똑같은 옷만 입으면 지겹지 않은가.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이유가 돌아왔다.

16549565395857.jpg“아, 제가 마땅한 옷이 없어서요.”

16549565515606.jpg“예? 설마, 아직도 남작가에서 옷이 오지 않은 겁니까?”

리처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실에서 일한 지가 벌써 몇 주짼데, 아직도 본가에서 옷을 받지 못했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이미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게다가 따로 가져온 옷도 있을 텐데. 여러모로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로제타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16549565395857.jpg“아뇨, 그냥 제가 가진 것 중 이게 그나마 제일 좋은 거라…….”

정확히 말하면 본가에서는 그러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고, 그녀가 가진 옷은 제법 많았으나 대부분이 바지였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편한 차림만 줄곧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와 리처드의 얼굴이 모두 충격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 영애가 멀쩡한 옷 한 벌 없다니? 그럴 수가 있나? 평생을 황태자로 살아온 아르문트도, 백작가의 아들로 자라온 리처드도 옷이 없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귀족임에도 하녀로 일하는 모습,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던 말, 쉽게 꿇던 무릎과 거친 손바닥, 옷 한 벌 없는 상황……. 조각들이 대충 맞춰졌다. 아르문트가 멋쩍게 웃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황금빛 눈동자에 일순 연민의 빛이 어리었다.

16549565395863.jpg‘……학대를 당한 건가.’

그것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평생 학대받으며 자라오다 하녀로 들어온 궁에선 변을 당하다니. 운명이 이토록 기구할 수가 없다. 사그라들었던 죄책감이 다시금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이쪽도 순조로이 착각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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