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네가 살아 있으면 좋겠어 (12/145)

12화. 네가 살아 있으면 좋겠어2021.04.11.

1654956626298.jpg

  장미 꽃잎을 닮은 속눈썹이 위아래로 천천히 오르내렸다.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는 얼이 빠진 것처럼 망연했다. 로제타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야에 담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이었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에메랄드빛 수면은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반짝거렸고, 그는 그 절경을 제 배경 삼아 미모를 더욱 뽐냈다. 아르문트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로 로제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말한 것과 달리 그 또한 제법 당황한 듯 황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온몸의 근육도 경직되었다. 로제타는 그와 닿은 모든 곳이 예민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엉덩이 아래의 허벅지는 묵직했고, 제 허리를 붙잡은 커다란 손은 단단했으며,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것은 아주 두툼했다.

16549566262989.jpg‘두툼?’

그녀는 눈을 껌뻑거리며 제 손바닥과 맞닿은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르문트의 흉부였다. 여름이 다가오며 얇아진 옷차림 덕에 근육의 곡선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정체를 눈치챈 순간 로제타의 볼이 뜨거워졌다. 사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척 아르문트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녀가 계획한 바였다. 그러나 이런 긴밀한 자세까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16549566262989.jpg‘윽, 왜 부끄럽고 난리야!’

로제타가 도전하려는 ‘스킨십’은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친구처럼 손도 좀 잡고 포옹도 가볍게 하고…… 그 정도야 뭐,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틈만 나면 치대곤 했던 발레리안 때문에 그녀는 대부분의 접촉에 매우 관대했다. 심지어 발레리안은 가끔 그녀의 이마나 볼에 입 맞춰주기도 했다. 로제타는 연인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기에 그 정도가 보통인 줄만 알았다. 그런 그녀도 다 큰 남정네의 허벅다리 위에 앉은 것은 처음인지라, 민망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걸 티 내면 더욱 부끄러워지는 법. 로제타는 어금니를 꾹 깨물고 애써 창피한 마음을 감췄다.

16549566262989.jpg‘얘는 발레리다, 발레리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 무릎 위에 좀 앉을 수도 있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로제타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입가에 해말간 미소를 띤 채로 천연하게 말했다.

16549566262989.jpg“감사해요, 전하. 덕분에 살았어요.”

움찔. 아르문트가 그녀의 웃음에 몸을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이 하녀가 예쁘게 생겼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눈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아르문트는 겉모습 따위에 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의 외모가 몹시 훌륭한 탓에 어지간한 얼굴에는 감흥이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여자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방금 로제타와 피부가 맞닿은 순간, 그는 제 심장이 예외적으로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꾸밈없는 미소를 마주하자 더욱이 박동이 빨라졌다. 아르문트는 그 낯선 두근거림의 이유를 그저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랐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혹은 느닷없는 접촉에 불쾌했기 때문일 테다. 그게 아니라면 심장이 뛸 이유가 없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16549566263013.jpg“말은 똑바로 하지.”

아르문트가 짐짓 눈매를 사납게 뜨곤 말을 이었다. 저번부터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영 거슬렸다.

16549566263013.jpg“너는 내 덕에 산 것이 아닌, 내 탓에 죽는 거다. 잊기라도 한 건가?”

16549566262989.jpg“에이, 안 죽을 수도 있다니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16549566263013.jpg“……말을 말지.”

아르문트가 쯧 혀를 찼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먹지를 못하니 원. 답답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회귀 동안 늘 막막해하던 건 자신이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작게 소리 내어 웃자 아르문트는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죽는 얘기를 해도 실실거린다니. 어쩌면 멍청한 것을 넘어 미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49566262989.jpg“안 빠지게 해줘서 고마워요, 전하. 옷이 젖는 건 좀 곤란했거든요. 몇 개 없는 거라.”

황궁은 일반 하녀에게 메이드복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줄 정도로 너그럽지 않았다. 당연히 빨래도 알아서 해야 했고, 옷이 닳으면 스스로 수선해서 입어야 했다. 여벌의 메이드복을 오늘 아침에 빨아둔 상황이니, 이것마저 젖으면 곤란했을 것이다.

16549566263013.jpg“……그래.”

아르문트가 그녀의 학대 정황을 또다시 떠올리며 찝찝하게 말을 이었다.

16549566263013.jpg“그런데 언제까지 내 위에 앉아 있을 생각이지?”

로제타의 사정이 안타깝기는 하나 계속 제 허벅지를 임대해줄 수야 없는 노릇. 기다란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간지러운 데다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누군가와 이렇게 긴밀히 닿아 있는 건 처음이었다.

16549566262989.jpg“무서운데 계속 이러고 있는 건…….”

로제타가 애교 있게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아르문트의 눈매가 대번에 날렵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재빨리 말을 바꿨다.

16549566262989.jpg“역시 아닌 것 같아요. 어딜 감히 고귀하신 전하의 허벅지 위에!”

로제타가 허둥지둥 일어나 몸을 물렸다. 배가 워낙 작은 탓에 필연적으로 피부가 닿고 살이 눌렸다. 가느다란 여체가 허벅지를 스치자 아르문트는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불쾌한 것은 아닌데 썩 기껍지도 않았다. 슬금슬금 자리에 앉은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들이대 보았다.

16549566262989.jpg“저, 손만이라도 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16549566263013.jpg“안 돼.”

16549566262989.jpg“또 흔들려서 넘어지면 어떡해요?”

16549566263013.jpg“그럼 그냥 빠져.”

단호한 자식. 로제타가 속으로 그를 흉봤다. 이쯤 되니 멜라니와 엘리아의 조언이 의심스러워졌다. 정말 스킨십을 한다고 친해질 수 있는 걸까? 발레리안과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긴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고 헤어질 때는 포옹을 하며 우정을 쌓아가곤 했으니까. 후배 기사들과 대련을 하며 살을 스친 것도 관계 향상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로제타는 다른 사람은 동의하지 못할 논리를 펼치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방법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다. 아르문트처럼 접촉할 기회 자체를 안 주는 사람에게는 써먹을 수가 없는 방법인 것이다. 로제타는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하고 시큰둥하게 허리를 기댔다.

16549566262989.jpg“어쨌든, 제 동기는 전하였어요.”

16549566263013.jpg“뭐?”

16549566262989.jpg“아까 하던 얘기 말이에요.”

왜 자원했냐고 물으셨잖아요. 로제타가 덧붙였다. 아르문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16549566263013.jpg“네가 무슨 힘으로?”

일개 하녀 주제에 무슨 힘이 있다고 지킨다 만다야? 그의 매서운 눈초리가 말했다.

16549566262989.jpg“양산 한 손으로 들던 것 못 보셨어요? 저 은근 힘세요. 감도 좋고요. 게다가…….”

로제타는 그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16549566262989.jpg“힘이 세고 지위가 높아야만 누군갈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문득 회귀하기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 누구보다 강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었으나 제 주군은 살리지 못했던 자신이.

16549566262989.jpg“저, 이미 한 번 전하를 구해드렸잖아요. 좋은 예시 아닌가요?”

16549566263013.jpg“……그 탓에 네 목숨은 지키지 못했고.”

16549566262989.jpg“전하는 지켰잖아요.”

그럼 됐죠. 로제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인상이 더욱 서늘해졌다. 무언가가 또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16549566263013.jpg“이유가 뭐지?”

16549566262989.jpg“네?”

16549566263013.jpg“이유가 무어냐 물었다. 네 목숨까지 걸어가며 나를 지키려 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이유? 로제타가 바보같이 눈만 깜빡거렸다. 이 회귀를 시작한 이유는 그저 아르문트가 그녀의 첫 실패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주군 하나 지키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서 어떻게든 그를 다시 살리고 싶었다. 첫 번째 회귀 당시, 아르문트를 만난 심정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살아 숨 쉬는 그의 모습에 전율마저 흘렀다. 회귀가 반복되며 그때의 감정들은 차차 마모되었고, 이유마저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녀의 바람만은 늘 같았다.

16549566262989.jpg‘그냥 네가 살아 있으면 좋겠어.’

살아 무엇이 되든 상관없다. 황제가 되어도 좋고, 왕관을 내려놓고 소박한 삶을 꾸며가도 좋다. 로제타는 그저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자신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그에게 설명할 순 없다.

16549566262989.jpg‘아무 이유도 없다고 하면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이번 회차 동안 더욱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아르문트는 놀라울 정도로 주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에도 대충 알고야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차마 몰랐다. 그나마 그녀는 믿어주던 그였기에. 아니, 어쩌면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황제의 신임을 받던 그녀였으니 앞에서만 믿는 척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문트는 대답을 요구하듯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잠시 고민하다 입술을 뗐다.

16549566262989.jpg“비밀이에요.”

16549566263013.jpg“……뭐?”

16549566262989.jpg“비밀이라고요.”

아르문트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고작 하녀가 비밀 운운할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16549566262989.jpg“일개 하녀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쯤은 있답니다. 설마 비밀마저 말하라 강제하시진 않겠죠?”

로제타가 새침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아르문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격은 더러운 그였으나 그렇게까지 권위적이진 않았다.

16549566262989.jpg“어쨌든, 전하를 지키고 싶다는 그 마음은 진심이에요.”

16549566263013.jpg“하.”

아르문트가 헛웃음을 뱉었다. 진심. 그토록 같잖은 말이 따로 없다. 그가 가장 믿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단어를 입에 담은 놈들이 가장 먼저 배신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향해 날 선 말을 뱉고자 했다. 그녀는 배신할 새도 없이 죽을 운명이란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진심이라는 표현 자체가 싫었다. 얼마나 불쾌하면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말문을 떼려는 찰나, 또다시 배가 크게 진동했다. 덜컹!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배의 움직임이 멎었다. 중심을 잡은 로제타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16549566262989.jpg‘여긴…… 제일 깊어 보이는데.’

물색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꽤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근처에는 작은 암석이 있었으나 그것에 부딪혔다기엔 거리가 멀었다. 마력장치가 고장이 나 배가 멈추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다. 그러나 하필, 황태자가 탄 배가 가장 수심이 깊은 곳에서 고장이 난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

16549566262989.jpg“전하, 조심…….”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 말하려던 로제타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중심을 잡고 앉아 있던 아르문트가, 수면 위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549566262989.jpg“전하!”

로제타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물이 잔뜩 튀어 올랐다. *** 아르문트는 고작 배가 덜컹거린 것쯤으로 중심을 잃을 만큼 나약하지 않다. 설사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수영을 해 다시 배 위로 올라오면 그만이다. 그러니 위험할 것은 하나도 없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배가 크게 진동한 순간, 작은 두통에 불과했던 것이 갑작스럽게 몸집을 부풀렸다. 이명이 귀를 울림과 동시에 머리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흐릿해졌고, 일순 정신까지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차가운 물이 피부를 따갑게 쏘아댄 후였다.

16549566263013.jpg‘미쳤군.’

요즘 원인 모를 편두통이 생겼기는 하나, 배 위에서 기절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다. 아르문트는 눈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물은 먹지 않았다. 그가 수면으로 나아가고자 팔다리를 움직였다. 몇 번만 휘저으면 금세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무거운 몸은 차차 아래로 가라앉았다. 조금 전 정신을 잃었던 때처럼 의식도 희미해졌다. 안 돼. 고작 이따위로 죽을 순 없어. 아르문트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정신은 조금이나마 또렷해졌으나 몸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그때였다. 에메랄드빛 물거품이 거세게 일며 장미같이 붉은 것이 물속에서 피어났다. 그의 전속 하녀, 로제타였다. 환한 햇빛을 받아 생기 있는 피부와, 늘 실실거리던 것과 달리 몹시 화가 난듯한 입매가 차례로 시야에 담겼다. 밝은색의 메이드복이 물에 젖어 흔들거리는 모습은 꼭 날개 같아 보였다. 이내 그녀의 손이 아르문트의 손을 단단하게 쥐어 잡았다.

16549566381016.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