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안아주세요, 전하2021.04.15.
아르문트는 눈을 깜빡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로제타를 응시했다. 시야에 담긴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몽환적이었다. 순간 꿈을 꾸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기에는 단단히 맞잡은 손의 감촉이 선명했다. 물속이라 그런지, 굳은살이 박여 거친 손바닥마저 부드럽게 느껴졌다.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아르문트의 곁으로 다가온 로제타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곤 수면을 향해 발돋움했다. 아르문트는 그때까지도 눈을 감지 않고 로제타의 얼굴을 바라보기 바빴다. 눈이 따가웠으나 차마 감을 수가 없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내 두 개의 몸이 반쯤 뒤엉킨 상태로 차가운 물을 헤치고 올라갔다. 수면 위에 다다르자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덥혔다.
“푸하.”
로제타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곤 제법 심각한 얼굴로 아르문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전하?”
아르문트는 그제야 자신이 물 밖에 나왔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날 지키겠다는 거냐며 허세를 부린 것이 조금 전인데, 지금 그는 거의 로제타에게 안기듯 몸을 기대고 있었다. 축축하게 달라붙은 옷 위로 그녀의 몸이 여실히 느껴졌다. 부드러운 살이 닿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괜찮다. 그러니 놔.”
“괜찮으신 것 맞아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은데…….”
“괜찮다 했다.”
아르문트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팔다리에 여전히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으나, 자존심 때문에라도 솔직히 대답할 순 없었다. 그는 빠르게 호숫가를 살폈다. 이런 사고가 났는데 호위라는 놈은 뭐 하는 거야? 민망한 마음에 괜히 리처드를 탓했다. 리처드는 부력이 있는 물건을 찾아 그들에게 던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구한 밧줄의 길이가 짧아 닿으려면 더 나아가야 했다. 아르문트는 축 늘어진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어떻게든 수영을 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 즉시 로제타에게 저지를 당했다.
“가만히 계세요.”
괜찮다는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로제타가 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아르문트는 이를 지적할 수 없었다.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오래도록 검술을 갈고닦은 그이거늘 고작 하녀에게 압도당하다니. 몹시 당혹스러웠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흘린 기운을 거둬들이며 그의 뒤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곤 그를 껴안듯 가슴 위로 팔을 둘렀다.
“뭐 하는……!”
“씁.”
느닷없는 백허그에 아르문트가 몸을 움찔거리자 그녀는 단호하게 그를 제압했다. 더 이상의 지체는 사양이었다. 날이 따뜻하긴 해도 오랫동안 물에 젖어 있어서 좋을 건 없다. 괜히 감기라도 걸렸다가 죽어버리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가 된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건방지다 할지라도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다. 잠시 움찔거리던 아르문트는 곧 포기한 듯 몸에 힘을 빼고 로제타가 이끄는 대로 둥둥 떠내려갔다. 이것이 제 무사를 위한 최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몸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뭍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이 정도 수치쯤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했다. 그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맡겼다. 그러나 그다음 일어난 일은 그가 차마 감내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호숫가가 가까워지며 발에 지면이 닿자, 로제타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아르문트의 등과 다리를 든든하게 받친 채로 말이다. 이름하여, 공주님 안기였다.
“전……!”
다급히 다가오던 리처드가 아르문트를 부르다 말고 그 생소한 장면에 멈춰섰다. 로제타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한 아르문트라니.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슨 힘으로 그를 들어 올렸는지는 둘째치고, 가느다란 팔에 근육질 사내가 대롱대롱 들려 있는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 탓에 리처드는 곧바로 아르문트를 받아주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한편, 아르문트는 당장 내려놓으라 외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어가며 겨우 유지했던 이성이 점차 멀어졌다.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졌다. 그렇게 그는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정신을 잃었다.
*** 아르문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삼십 분이 지난 후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제 침실의 천장이었다. 그는 이를 인식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리처드가 다가와 그의 몸을 살폈다. 아르문트는 조용히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사가 왔다 간 모양인지 흠뻑 젖었던 머리카락에 물기가 하나 없었다. 옷도 갈아 입혀져 있었고, 몸도 뽀송뽀송했다. 그러나 아직도 머리가 무거웠다. 아까보다는 나았으나 완벽하게 회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르문트는 가만히 제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눈을 굴렸다. 리처드의 옆에 서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와는 달리 머리도 아직 다 말리지 못했고, 젖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수건만 걸치고 있었다.
‘왜 아직도 꼴이 저 모양인가.’
아르문트가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정신을 잃으신 지 아직 한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본 사람은 많나?”
“아니요. 최대한 은밀히 움직였습니다.”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해도 곳곳에 심어놓은 눈을 피하긴 어려웠을 테다. 황태자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떠들어댈 귀족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소파에 앉아 허리를 기댔다. 잠시 걸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은 아직 치료가 덜 된 상태였다.
“신관은.”
“하급 신관이 응급조치는 취하고 갔습니다만…… 아직 대신관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황태자가 쓰러졌다는데, 아직도 오지 않았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리처드는 제가 죄를 지은 것처럼 푹 고개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1황자님이 대련 중 다치셨다 합니다. 저희가 궁에 돌아오기 전부터 그곳에 계셔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그 같잖은 실력으로 대련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아르문트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황태자는 황제 다음으로 고귀한 신분. 1황자를 먼저 치료 중이었다고 해도 소식을 들었다면 곧바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 현 황후이자 1황자의 어미가 신전을 포섭하고자 애를 쓰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버텨준다 싶었는데…….
‘결국 넘어갔군.’
이렇게 대놓고 그 관계를 드러내다니. 이는 그에 대한 우롱이나 다름없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크게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냉정해졌다. 갑자기 배가 멈추고, 몸은 이상해졌으며, 돌아오니 신관은 자리를 비웠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지나쳤다. 한편, 리처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르문트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듣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황족을 욕하는 것에 동조할 순 없다. 그렇다고 아르문트의 앞에서 1황자를 두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의 고뇌를 읽었는지 아르문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됐으니 이만 나가보게.”
“예, 알겠습니다.”
리처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기분이 안 좋은 아르문트의 곁에 남아 좋을 것이 없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로제타 또한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리처드의 뒤를 쫓았다. 리처드는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그녀의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갈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러곤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어서 이 방을 떠나 그녀의 상태를 살필 요량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방해가 들어왔다.
“아니.”
아르문트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입을 열었다.
“너는 남아.”
“……저요?”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르문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나.”
나는 사람도 아닙니까. 리처드가 억울한 목소리를 삼켰다. 그가 가볍게 턱짓을 했다.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로제타는 눈치껏 왔던 길을 다시 쪼르르 돌아갔다. 리처드가 침통한 얼굴로 문을 나서자 커다란 방안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남으란 거지?’
로제타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까 건방지게 군 것 가지고 한소리 하려 그러나? 아니면 공주님 안기 때문에? 구해주고 나서도 행여나 그가 기분 나빠할까 반응을 걱정해야 한다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녀가 아는 아르문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상이 빗나갔다.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군.”
그는 차분히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동일 인물이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앙칼진 고양이 같던 눈매가 누그러지고, 황금빛 눈동자는 평소의 사나움을 잃은 채 로제타를 향했다. 그는 부끄러운 듯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고맙다.”
아르문트가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기사 시절 그에게 감사 인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벅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순 눈가가 촉촉해졌다. 수많은 회귀를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에 기어코 눈물까지 차오른 것이었다.
“……지금 우는 건가?”
커다란 눈동자 아래 주렁주렁 걸린 눈물을 발견한 아르문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고맙다고 표현했을 뿐인데 갑자기 울다니.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아뇨, 아니에요.”
로제타는 빠르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전하가 고맙다고 하시니까…… 좋아서요.”
그녀의 말은 안 그래도 높이 쌓여 있는 죄책감을 자극하기 적절했다. 고작 고맙다는 말 하나로 울 정도로 좋아하다니. 지금껏 지나치게 차갑게 군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또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르문트는 복잡미묘한 기분에 입술을 움찔거리다 멋쩍게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들어줄 테니.”
“네? 괜찮아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별로 갖고 싶은 게 없어서……. 그저 전하가 무사한 것으로 충분한걸요.”
로제타가 또다시 제안을 거절하자 간질간질한 기분은 더욱 심해졌다. 그것이 너무나 생소해 그는 괜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긴 한 모양이다. 아르문트가 제 건강을 탓했다.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몇 번이고 몸을 바쳐 자신을 구해내면서, 정작 제 목숨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그녀가 이상했다. 사람이라면 욕심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당신이 무사하니 됐다고 말하는 태도는 고결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죽음이 머지않았기에 미련도 없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기엔 아르문트는 반대의 경우를 자주 봤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러울 정도로 욕심을 내던 이들. 제 아비도 그중 하나였다. 아르문트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행동하는 그녀가 몹시 불편했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내 목숨값이니 비싸게 쳐주는 것이 당연하다. 무엇이든 말해. 억지로라도 금은보화를 안기기 전에.”
아르문트가 엄포를 놓았다. 이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로제타는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겨우 무언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목욕시중은 빼고.”
“아앗…….”
그가 단호히 덧붙이자 로제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걸 말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목욕시중을 못 들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아르문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면요…….”
로제타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목욕시중 말고 적당히 할만한 스킨십이 뭐가 있을까? 불현듯 배 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세가 좀 민망하긴 했지만, 피부가 맞닿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꼭 접촉하지 않더라도, 쉬지 않고 들이댄 것만으로 그와 제법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직 가깝다기엔 너무 먼 그였으나 이전과 비교하면 성과가 훌륭했다. 아무래도 아르문트는 적극적으로 들이대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타입인 듯했다. 좋아. 그러면 조금 더 대담하게 나가볼까. 로제타가 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아주세요, 전하.”
사실 그녀는 아르문트가 순순히 안아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또 미간에 주름이나 잡으면서 눈을 사납게 뜰 게 분명하다. 그러나 또다시 예상이 빗나갔다.
“……정말 그게 원하는 건가?”
“네. 정말인데요.”
로제타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이런 말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니!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답을 들은 아르문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좋아.”
아르문트가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로제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까 전 자신이 당한 걸 복수라도 하듯, 공주님 안기 자세로. 거기까지만 했더라면 아마 로제타는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안아주지.”
무려, 그가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안아준다’라는 의미를 잘못 해석하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