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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더한 걸 원해 (14/145)

14화. 더한 걸 원해2021.04.18.

16549566653061.jpg‘이 하녀는 내 몸을 원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르문트가 확신했다. 모든 정황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색을 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목욕시중을 들고자 하는 것, 배 위에서 은근슬쩍 무릎을 맞대던 것, 손을 잡으려 하고 안아달라 하는 등 계속해서 스킨십을 시도하는 것. 이 모든 모습이 그녀의 의도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는 로제타의 행동이 몹시 못마땅했다. 물론 지금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니 돌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16549566653061.jpg‘그냥 원하는 바를 들어줄까.’

무려 목숨을 두 번이나 빚진 상대다. 자신을 살리려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재물도 권력도 필요 없고 자신을 원한다는데, 들어주는 시늉쯤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거기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니, 바로 지나치게 예민한 그의 성격이었다. 까다로움과 예민함의 대명사, 아르문트는 누군가와 닿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하인이나 호위기사는 물론,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인 그는 종종 행사에 끌려나가 첫 춤을 춰야 했다. 그에게는 고역인 일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과 손을 잡고, 사람들 앞에서 빙빙 돌아야 한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첫 춤까지만 춘 이후 결코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 제게 이런저런 수작을 걸어오는 귀족 여인들도 솜씨 좋게 무시했다. 그만큼 그는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자라는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사실, 아르문트 또한 자신이 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딱히 시도해본 적은 없으나, 아무에게도 아랫도리가 반응하지 않았으니 정말 그런 걸지도 모른다.

16549566653061.jpg‘이걸 알게 되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아르문트가 이렇게 대담하게 나온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숨어 있었다. 몸만 원하는 여자이니 제 상태를 알면 금세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 분명하다. 살이 맞닿는 것은 불쾌하겠지만, 잠시만 인내하면 앞으로 이 귀찮은 하녀에게서 해방이다.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아르문트는 이렇게 확신했다.

16549566653078.jpg“전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르문트에 의해 침대에 눕게 된 로제타는 멍한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붉은색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커다란 눈망울과 복숭아 같은 두 뺨은 몹시 순수했으나, 붉게 물든 입술이 살짝 벌어진 모습은 놀랄 만큼 요염했다. 아르문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굴렸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시야에 더욱 자극적인 장면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밝은색의 오전용 메이드복은 물기가 덜 마른 탓에 여인의 굴곡진 몸을 여실히 드러냈다. 앞치마를 걸치지 않아 가려지는 곳도 없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곡선에 아르문트는 흠칫 몸을 굳혔다. 새삼 제 피부와 맞닿은 그녀의 살이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다른 사람은 스치는 것조차 싫었는데. 이상하게 감촉이 썩 나쁘지 않았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닿는 면적을 더 넓히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기민한 후각이 미세한 향기를 잡아챘다. 은은한 꽃내음 같았으나 잔향은 달콤했다. 어디서 나는 향기지? 아르문트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 근원을 쫓았다. 답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로제타, 이 이상한 하녀의 체향이었다. 순간 시선이 마주했다. 자신의 것과는 달리 조금의 음심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으나 그게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일순,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16549566653061.jpg‘이게, 무슨…….’

그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가 동했다. 그것도 자신의 전속 하녀에게. 고작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 몸이 딱딱해진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간질거리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자괴감과 민망함이 솟구쳤다. 그는 그녀와 정말 정을 통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대충 시늉이나 하다, 제 몸에 대한 기대를 접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뿐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욕정을 느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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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문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깨물던 찰나, 로제타가 타이밍 좋게 말문을 열었다.

16549566653078.jpg“전하, 왜 포옹을 굳이 침대 위에서……?”

당황스러운 것은 로제타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친구끼리, 혹은 동료끼리 가볍게 껴안아 주는 상황을 기대한 것인데, 갑작스럽게 침대로 던져놓다니. 아무리 눈치 없는 그녀라도 그냥 포옹과 침대 위 포옹이 사뭇 다른 느낌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이건 친구가 아니라 연인끼리 할만한 것이다. 로제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의심이 가득한 시선에 아르문트가 몸을 더욱 빳빳하게 굳혔다. 이제야 그녀의 ‘안아달라’가 자신이 생각한 의미와 차이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던 그녀였기에 당연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고작 포옹이라니. 목숨을 구해진 대가로 요청하기에는 너무 소소하지 않은가. 생각보다는 로제타가 원하는 것이 담백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넘어갈 수 있는 게 다행이면서도, 괜한 오해를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자존심상 이를 티 낼 수야 없다. 그는 애써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뱉었다.

16549566653061.jpg“침대가 더 편해서 온 거다. 설마 다른 의미라도 있을 것 같나?”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로제타를 의심하듯이 구는 그였다. 다행히 그의 꾀에 넘어간 로제타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16549566653078.jpg“아뇨! 그럴 리가요!”

16549566653061.jpg“포옹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이제 내 침대에서 내려가.”

아르문트가 새침하게 명령했다.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선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이 정말 고양이 같았다. 로제타는 예전에 키웠던 고양이 발로를 다시금 떠올리며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16549566653078.jpg“전하가 비켜주셔야 내려가죠.”

그 합당한 지적에 아르문트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그는 귀 끝까지 분홍빛으로 물들이고는 그녀의 위에서 비켜주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민망함에 입꼬리가 파들거리는 것은 차마 감추지 못했다. 은근 허술한 데가 있네. 몰랐던 면모를 발견한 로제타는 숨죽여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16549566653078.jpg“저기, 전하.”

16549566653061.jpg“…….”

16549566653078.jpg“지금 생각해보니까, 전하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을 말하는 거지? 부끄러워 침묵하던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66653078.jpg“전하의 목숨값이니 비싸게 받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요. 아무래도 이 포옹 한 번은 전하의 목숨처럼 값지진 않은 것 같아서요.”

16549566653061.jpg“……다른 걸 원한다는 건가?”

16549566653078.jpg“네. 정확히는…….”

로제타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생긋 웃었다.

16549566653078.jpg“더한 걸 원해요.”

목소리는 나긋했으나 그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아르문트는 또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턱을 괴는 척 자연스럽게 허리를 슬쩍 굽혔다. 침이 목울대를 타고 꿀꺽 내려갔다.

16549566653061.jpg“무엇을 원하나.”

가슴이 다시금 두근거렸다. 미쳤군. 미친 게 틀림없어. 아르문트는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이래선 꼭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지 않나. 그는 아랫도리의 사정을 그저 생리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인과 침대 위를 뒹군 것은 처음이라,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추호도 없다. 곧 죽을 하녀와 정을 통할 순 없다. 생리적인 흥분만 가라앉히면 끝날 일이다. 그는 되뇌고 또 되뇌었으나 그것은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가 뜸을 들일수록 묘한 기대감만 늘어갔다.

16549566653078.jpg“매일 하고 싶어요.”

쿵. 또다시 심장이 떨어졌다. 아르문트가 애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16549566653061.jpg“무엇을, 말인가.”

16549566653078.jpg“이것저것을요.”

그가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모호하게 말하는지 일부러 놀리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가 로제타를 흘겨보자 그녀는 헤헤 웃으며 부연했다.

16549566653078.jpg“손을 잡는 것도 좋고, 포옹도 괜찮아요. 아니면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고요. 무엇이든 하루에 하나만, 제가 원하는 걸 해주세요.”

16549566653061.jpg“그런 무리한 요구에 내가 응할 것 같나?”

아르문트가 차갑게 답했다. 잠시 기강이 흐트러진 상태라고 한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승낙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66653078.jpg“전하가 무리하다 생각하시는 건 거부하셔도 괜찮아요. 그냥 귀찮아서 거절하는 건 제외하고요. 스킨십도 당연히 포옹 이상은 요구할 생각 없어요.”

16549566653061.jpg“…….”

16549566653078.jpg“어차피 저는 며칠 내로 죽을 텐데,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않나요?”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말대로, 아르문트에게 거부권이 있는 이상 그리 과한 요구는 아니었다. 조금 귀찮을 뿐인 요구였지. 그녀는 머지않아 죽을 몸. 귀찮음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살이 닿는 촉감도, 아주 불쾌하지만은 않았고. 하지만, 혹 이런 이상 반응이 또다시 나타난다면? 아르문트가 허벅지에 힘을 꾹 주며 고민했다. 하녀와의 추문이라니. 그리 드문 내용은 아니었다. 웬만한 하녀는 뒷배가 없는 평민이었고, 황족을 비롯하여 많은 권력자는 그런 그들을 마음 편히 데리고 놀다 버리곤 했으니. 다만 아르문트는 그런 귀찮은 일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괜한 소문을 더하는 것은 사양이다.

16549566653061.jpg‘내가 그럴 리 없지. 자제하면 끝날 일인 것을.’

단지 이번 경우가 특수했던 것뿐이다. 이렇게 생각한 아르문트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16549566653061.jpg“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 목숨값이니 어쩔 수 없지.”

16549566653078.jpg“와! 들어주시는 거예요?”

16549566653061.jpg“그래.”

흥. 아르문트가 콧방귀를 내쉬며 말했다. 이 고양이 같은 자식. 로제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16549566653078.jpg“고마워요, 전하! 그러면 우선…….”

그녀의 손이 느닷없이 제 치마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냉큼 치마를 들쳐 올렸다. 치마가 올라가며 하얗고 탄탄한 다리가 드러났다. 난데없이 그녀의 다리를 보게 된 아르문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6549566653061.jpg“뭐 하는 짓이야!”

아르문트가 기겁하여 외쳤다. 어느새 얼굴이 다시 달아오른 그였다.

16549566653078.jpg“네? 이거 꺼내려고요.”

로제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안에 속치마도 있는데 왜 난리야? 예민하기는. 기사단에 있을 적 훌렁훌렁 옷을 벗곤 했던 그녀는 잘못을 아르문트에게로 돌렸다.

16549566653078.jpg“이거, 임명장이요.”

로제타가 치마 속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임명장이었다.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전속 하녀로 임명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바로 그것.

16549566653061.jpg“그게 왜…… 거기서 나오나?”

16549566653078.jpg“누가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숨겨왔죠!”

잘했지요? 그녀가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아르문트는 도대체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지 못해 그저 침묵했다. 다 큰 여인에게 치마를 아무 곳에서나 들추면 안 된다고 조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6549566653078.jpg“여기 마지막에 추가해주세요. 매일 한 가지씩 원하는 걸 들어준다!”

16549566653061.jpg“원하는 것도 많군.”

16549566653078.jpg“전하의 목숨값이 너-무 비싸서요. 확실하게 해야죠.”

내가 왜 목숨값 얘기를 꺼냈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것을. 아르문트가 밀려오는 후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 펜을 꺼내 들고 임명장 위에 대충 내용을 추가했다.

16549566653061.jpg“나, 라그나르 제국의 황태자, 아르문트 볼드윈 폰 라그나르는 로제타 메이필드를 유일한 전속 하녀로 임명한다. 또한,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루에 한 가지씩 로제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 단 귀찮음은 거부 사유가 될 수 없다.”

로제타가 그의 굵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16549566653061.jpg“기한은 로제타 메이필드가 죽을 때까지로 둔다.”

아르문트가 찝찝한 얼굴로 낭독을 마쳤다. 그리고 로제타는 천연한 얼굴로 손뼉을 치며 음흉한 생각을 했다.

16549566653078.jpg‘좋아, 내일은 뭘 요구해볼까.’

그녀가 이것저것 행복한 상상을 하는 찰나, 노크 소리가 울리며 상념을 깼다. 똑똑.

16549566768724.jpg“전하, 다른 신관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헉, 신관? 로제타가 흠칫 몸을 굳혔다. 지금 당장 제 몸 상태를 들키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했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리처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16549566768724.jpg“대마법사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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