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미남 사이에 낀 하녀2021.04.22.
의외의 인물이 호명되자 로제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대마법사가 거기서 왜 나와?’
라그나르 황실을 위해 일하는 대마법사는 오직 발레리안뿐이다. 마법사의 탑에 박혀 지내는 늙은이들이 여기까지 올 리 없으니 정말 그가 왔다는 뜻이었다.
‘지금껏 발레리가 먼저 전하를 찾아온 적은 없었는데…….’
이번 회귀에는 여러모로 이변이 많았다. 로제타가 기사가 되지 않고 하녀로 입궁한 것이 처음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이는 즉 지금처럼 그녀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계속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로제타는 다시금 그 가능성을 깨닫고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부디 그 변화가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일어나기를 바랐다. 한편, 아르문트 또한 제법 놀란 얼굴로 문 쪽을 응시했다. 대마법사 발레리안 윈저프리드. 황태자인 자신보다도 많은 곳에서 회자되는, 그야말로 황궁의 인기인이다. 대마법사 중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가졌다는 그가 황실의 소속으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세력이 발레리안을 탐했다. 최고의 보상을 약조하며 어떻게든 그를 영입하려 애썼다. 황후와 1황자도 그러한 세력 중 하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마법사는 그들의 1순위 포섭 대상으로, 영입에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르문트 또한 대마법사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제법 공을 들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는 자본의 차이 때문이라도 대마법사가 황후 쪽으로 붙으리라 여겼다. 1황자의 외척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부를 거머쥔 가문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르문트의 예상은 빗나갔다. 대마법사가 황후의 포섭을 단호히 거부한 것이었다. 발레리안은 두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현 정세에서 꼿꼿하게 중립을 지켰다. 양쪽 모두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황후는 그런 그가 퍽 못마땅한 듯했으나 감히 협박하거나 배척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대마법사가 가지는 힘이 크기 때문이었다. 반면 아르문트는 재물 따위에 넘어가지 않고 입장을 관철하는 대마법사를 꽤 흥미롭게 여겼다. 언젠가 꼭 제 편으로 만들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 발레리안 윈저프리드가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왔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연구실을 나서지 않는 그 발레리안이 말이다. 아르문트의 그림 같은 얼굴 위로 당황스러운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고 들어오라 명령하려다 말고 제 상황을 인지했다. 흐트러진 차림새로 황태자의 침대에 앉아 있는 로제타가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치마는 여전히 살짝 들쳐진 상태였다. 오해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장면이다.
“……전하?”
문밖의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아르문트를 재촉했다. 아르문트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로제타에게 턱짓을 했다. 당장 일어서! 그가 눈빛으로 명령했다. 잠시 멀뚱거리던 로제타 또한 상황을 인지하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수정된 임명장을 다시 치마 속으로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레리가 이런 모습을 보면 난리가 날 거야!’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끔찍이 생각하는 발레리안은 이상한 오해를 하고선 눈이 돌 것이 분명하다. 감히 제 동생이나 다름없는 로제타를 건드렸냐며 길길이 날뛸 것이다. 어쩌면 황태자인 그를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다가도 발레리안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어릴 적, 그녀에게 안 좋은 마음을 품었던 귀족 자제를 반 죽여 놓았던 전적이 있기에 더욱이 신빙성이 높았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리처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암살 시도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불안해진 그였다.
“아니다.”
아르문트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로제타를 훑었다.
‘전 준비 됐어요!’
로제타가 이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미소 짓는 얼굴이 무척이나 해맑았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머리카락의 뒷부분은 여전히 헝클어져 있었고, 치마 밑단은 누가 봐도 어딘가 누웠던 것처럼 쭈글쭈글했다. 이 꼴을 하고서 뭐가 이렇게 자신만만해? 아르문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음만 같아선 제대로 정돈하라 명령하고 싶었으나 시간만 더 낭비할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그는 마지못해 손을 뻗었다.
“읏!”
로제타가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목소리가 크지 않아 바깥의 사람들은 듣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르문트가 조용히 하라는 듯 아니꼬운 눈초리를 던졌다. 그녀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말도 없이 머리를 만져놓고!’
느닷없이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파고드는데, 심지어 그 단단한 것이 귓가를 스쳤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잘 만져?’
아르문트는 혹 전생에 하녀가 아니었나 싶을 만큼 빠른 속도로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대충 하는 것 같은데도 이리저리 얽힌 것을 아프지 않게 풀어내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다. 손재주가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내가 하녀의 머리를 정돈해주다니.’
아르문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평생 이런 일이 생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는데. 남의 머리카락을 만진다니,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로제타의 머리카락은 제법 결이 좋고 촉감 또한 부드러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몇 번 몸을 겹쳤다고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가.’
곧 죽을 하녀와 익숙해지다니. 웃기는 소리다. 아르문트가 스스로의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척 보기에도 로제타는 삶에 미련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집에 얌전히 박혀 치료받아도 며칠 더 살까 말까 한 상황에 남을 구한답시고 호수에 뛰어들고 있으니. 신관은 최대 일주일을 불렀지만 그 전에 픽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연 기분이 가라앉았다.
“들어와.”
놀라운 속도로 정돈을 마친 아르문트가 명령했다. 마침내 커다란 방문이 열리고, 두 명의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펜리르 신전의 종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왼편에 선 신관이 먼저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하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한 신관은 무척 젊어 보였다. 기껏해야 스무 살은 될까, 싶을 정도였다. 그의 외모를 확인한 아르문트는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아르문트가 부른 것은 대신관이다. 얼굴도 처음 보는 이런 어린 신관이 아니라. 아무래도 대신관이 제대로 돌아선 모양이었다. 순간 분노가 끓어올랐으나 아르문트는 능숙하게 참아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대마법사, 발레리안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말했다. 고개를 숙여 예의는 지켰으나 그 몸짓이 과하진 않았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친 얼굴은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진짜 발레리잖아!’
로제타가 당황을 감추려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을 마주하니 새삼 더 당혹스러웠다.
‘설마…… 전하 앞에서 아는 척을 하진 않겠지?’
그녀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발레리안을 쏘아봤다. 발레리안과 친구인 것을 밝히면 아르문트가 그녀를 달리 볼 수야 있겠지만, 아직은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의심 많은 아르문트라면 발레리안까지 덩달아 경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금이나마 아르문트의 신임을 얻은 후에, 그때 가서 관계를 밝히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다행히 발레리안은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제타를 아는 척하기는커녕 그녀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그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꺼림칙한 기분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벌써 얘기가 본궁까지 흘러들었나?”
“황궁 내에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지요.”
건방지다 여길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다만 발레리안의 능력을 생각하면 못할 말도 아니었다.
‘저거구나!’
그제야 로제타는 발레리안의 행차 이유를 깨달았다. 황태자가 하녀와 함께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어, 걱정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발부터 내디딘 것이었다.
‘내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참.’
그와는 어렸을 적부터 셀 수 없이 많이 대련해온 사이였다. 누구보다 로제타의 강함을 잘 아는 것도 그였다.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알면서, 고작 호수에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오다니. 중증도 이런 중증이 따로 없다.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발레리안의 말에 아르문트의 눈이 일순 커졌다. 뒤에 선 리처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많은 회유와 압박에도 늘 중립을 지키던 그가 먼저 도움을 제안하다니. 너무도 갑작스러워 의심될 정도였다. 발레리안은 경계의 눈빛 속에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가 지나치게 마음이 급했던 것 같군요. 치료도 받으시기 전에 찾아뵙다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가 천천히 옆으로 몸을 물렸다. 화려한 로브를 너울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퍽 아름다워 꼭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자리를 피해 있겠습니다.”
발레리안이 자연스럽게 로제타에게 눈짓을 보냈다. 함께 나가자는 신호였다.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보지 못하도록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선 그 제안이 무척 기꺼웠다. 괜히 신관 근처에 있다가 멀쩡한 몸 상태를 들키면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럼 이제 치유를…….”
대마법사와 황태자 사이에 껴서 눈치만 보던 신관이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그 사이 로제타는 종종걸음으로 발레리안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정확히는, 나서려고 했다.
“잠깐.”
아르문트가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너, 어딜 가는 거지?”
설마 그 ‘너’가 또 나는 아니겠지? 로제타는 그가 부른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임명장도 고쳤으니 얼른 나가서 축축한 옷을 갈아입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아르문트가 그런 호칭으로 부를 만한 사람이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최소한 ‘너’가 아닌 이름으로라도 불리기를 바라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저요, 전하?”
“그래.”
“저야, 이만 밖으로 나가드리려고 했죠. 전하가 신관님에게 치유를 받으셔야 하니까요.”
로제타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때에 따라 다르긴 하나, 내상의 경우 피부를 접촉하여 신성력을 주입하곤 했다. 즉 치유를 위해선 그가 옷을 벗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녀야 뭐 그가 옷을 벗든 말든 큰 감흥이 없었으나, 아르문트는 저번에 상체만 보였을 때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던 사람이다. 이번에도 당연히 나가 있으라고 명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로제타가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르문트가 인상을 썼다. 그러곤 무뚝뚝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헛소리 말고 남아.”
“네? 왜…….”
로제타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시야 끝에 발레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이 담겼다. 아르문트의 강압적인 말투에 화가 난 것이었다. 아르문트의 지위는 황태자고, 로제타는 하녀에 불과하니 저 정도 태도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안 돼! 발레리, 참아!’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잘못하다간 이번 회차는 발레리안의 손에 아르문트가 죽으면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그 와중에 아르문트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두 미남이 양쪽에서 인상을 일그러뜨리니 중간에 낀 로제타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른 죽고 싶어 안달이라도 났나?”
이윽고 아르문트가 협박성이 짙은 말을 뱉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거칠었다. 발레리안의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푸른 눈동자 위로 살기가 비쳤다. 로제타는 그냥 눈을 감았다.
‘이제 다음 회차 시작인가.’
반쯤 포기했을 찰나, 아르문트가 그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아니라면, 잔말 말고 남아서 치유 받아.”
다만 그 내용은 로제타가 추측한 것과 달리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