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2021.04.25.
‘세상에, 이 까칠이가 이런 소리를 하다니.’
로제타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물에 빠졌다 나온 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원하는 걸 추가로 들어주겠다며 귀찮음을 감수하질 않나, 치료를 받으라고 화내질 않나. 이전 회차의 생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반응이었다. 발레리안 또한 아르문트의 소문을 들어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법 놀란 모양새였다. 이글거리던 살기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발레리안이 이런 의미를 담아 로제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 황태자와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의문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뿌듯한 미소로 답하다, 이내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착각하지 마. 네 걱정 따위 한 적 없다.”
아르문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은 무슨. 자신 대신 죽게 된 사람에게 최소한의 보답을 하는 것뿐이다.
“네에. 어쨌든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전하야말로 얼른 치료받으세요.”
로제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또다시 구겨졌다.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거로 보이나?”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잔말 말고 남으라 말했다.”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했을 텐데. 덧붙이는 목소리마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진료를 받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옷을 벗어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로 일하며 한두 번 치유를 받아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상태를 들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치유를 받았다가, 신관이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데요?’ 같은 말을 하면 큰일이다.
‘하필이면 또 테오도르 신관이야!’
로제타가 신관에게 흘끔 시선을 두었다. 동그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눈치를 보는 어린 신관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 회차에서는 초면이었으나, 이전 회차에선 꽤나 자주 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신관은 이후 대신관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다지 높은 직급이 아니나, 그것은 신전 내 정치에 미숙한 탓이었다. 현 대신관의 눈 밖에 난 탓에 엄청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신관이 1 황자의 편으로 돌아선 지금, 테오도르는 놓쳐선 안 될 인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타이밍이 얄궂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이 명의를 하필 이 순간에 만나냐, 이 말이다. 그에게 진료를 받으면 거짓말이 바로 들통날 것이 뻔했다.
“며칠 전 세타르를 한 모금 정도 마셨다. 바로 치료는 받았지만 머지않아 죽을 거라는 선고를 받았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나?”
설상가상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대신하여 그녀의 상태를 설명하기까지 했다. 테오도르가 높은 직급의 신관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멸시하거나 깔보지 않고 진중하게 대접하는 그였다. 테오도르는 이러한 태도가 익숙지 않은 듯 감동한 얼굴을 했다.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만 보고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 글쎄요……. 제대로 몸을 살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신관의 모습에서 로제타는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그녀가 아르문트의 호위가 되기로 결정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아차. 흐뭇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로제타가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상황을 모면할만한 방법이 영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저…… 혹시 제가 남자라 불편하신 거라면, 여신관을 불러 진료를 받으셔도 괜찮습니다.”
“맞아요! 사실 그것 때문이었어요!”
로제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사실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요. 그, 제가 나중에 따로 가서 여신관님한테 진료받을게요.”
이해해주실 거죠? 그녀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아르문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였던 행동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 내겐 왜 그렇게 치댔지?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아르문트는 애써 말을 삼켰다. 아무리 성격 더러운 그라고 한들 다른 남자들 앞에서 로제타를 모욕할 수는 없었다.
“자, 그러면, 얼른 치료받으세요, 전하! 저는 마법사님을 응접실로 안내해드릴게요.”
로제타가 아르문트가 다른 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아르문트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더는 강제하지 않았다. 아무리 적극적인 성격이라 해도 귀족 영애는 귀족 영애. 외간 남자와 접촉하는 것이 부끄러울 수 있다. 도대체 왜 자신에겐 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지, 그것이 여전히 의문이지만 말이다.
“마법사님, 가시죠!”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발레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뒤를 돌았다. 얼른 로제타와 단둘이 남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조급했다.
***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방을 나서 발레리안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녀 또한 입이 간질간질했으나 걷는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에 보는 눈이 있을지 알 수 없기에, 바깥에서는 하녀와 마법사의 관계로만 보여야 했다.
“이쪽이에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발레리안이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따라 들어갔다. 탁. 응접실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둘의 시선이 마주했다.
“푸핫.”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서로에게 이렇게 얌전 떠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그런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레이디?”
“늘 마시던 거로.”
발레리안이 장난스럽게 하인 흉내를 냈다. 로제타는 우아한 귀족 영애 행세를 하며 장난에 응수했다. 한두 해 만나온 사이가 아니기에 어떤 상황극을 연출하든 척하면 착이었다. 탁. 발레리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트레이에 준비되어 있던 찻잔과 주전자가 허공으로 둥둥 날아올랐다. 텅 비어 있던 주전자 안에 물이 차오르더니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찻잔도 점차 따뜻해졌다. 차가 완성되기까지는 고작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데 마법 낭비하기는.”
“왜 쓸데가 없어? 우리 로즈랑 차 마시는데 쓰는 건데.”
차는 정성이지, 정성. 이렇게 중얼거린 로제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홍차를 맛봤다. 그녀가 정성 들여 우려낸 차보다 백 배쯤 맛있었다. 검술 말고 마법을 배울 것을. 로제타가 잠시 의미 없는 후회를 했다.
“그래서, 발레리.”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켠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황태자 궁까지는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거야? 언질도 없이.”
“……너야말로 왜 말 안 했어?”
발레리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걸치고 있었으나 어쩐지 푸른 눈동자가 어두워 보였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신호였다.
“독을 마신 사용인이 너였다니. 아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에이, 고작 세타르였는걸. 너도 알잖아, 나 어지간한 독에 면역 있는 거.”
“누구야.”
“응?”
로제타가 고개를 기울였다. 발레리안의 눈빛이 섬뜩했다. 꼭, 누군가를 잡아 죽이고 싶은 것처럼.
“누구냐고. 네게 독을 먹인 놈.”
착각이 아니다. 그는 로제타가 그 정도 독에 죽고 말고를 떠나서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다.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치고는 있었으나 저것은 가짜 미소였다. 푸른 눈동자 속에 그 범인에 대한 살기가 엿보였다.
“알면 어떡하려고……?”
“글쎄. 곱게는 못 죽이겠지?”
발레리안이 생긋 웃었다. 발레리는 이 나이에도 저렇게 살벌했구나. 로제타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이미 죽었어. 자결, 혹은 입막음. 배후에 대한 증거는 못 찾았고.”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낼 수 있다면 그녀가 먼저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해봐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빠득. 발레리안이 이를 갈았다. 강하게 말아쥔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물에 빠진 건 또 뭔데.”
네가 배 위에서 중심을 잃었을 리도 없고. 누구보다 그녀의 실력을 잘 아는 발레리안이 냉철하게 질문했다.
“배에 이상이 생겼었어. 그러다 갑자기 전하가 정신을 잃더니 호수에 빠지더라고. 구하려다 보니까, 뭐. 경치 좋은 데서 수영 좀 한 거지.”
“만약 암살자라도 있었으면 어쩌려고? 네가 강한 건 내가 제일 잘 알지만, 어떻게 검 한 자루 없이 그들과 맞설 생각을 해.”
“아, 그건 걱정 마.”
로제타가 씨익 웃으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치마를 번쩍 들쳐 올렸다. 아르문트에게 보여준 것의 반대쪽이었다.
“로제타!”
아르문트와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발레리안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하얀 얼굴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어딜 치마를 그렇게 번쩍번쩍……!”
“잔소리 그만. 그러지 말고 이거 봐, 이거.”
로제타가 그의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제 허벅지 쪽을 가리켰다. 발레리안은 치마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다리에 볼을 붉히면서도 그녀가 가리키는 것을 응시했다. 이내 그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게…… 뭐야?”
“보면 모르겠어?”
그녀의 다리에는 낯설고도 익숙한 도구가 가죽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하얀 솜털 같은 것이 길쭉하게 달려 있고, 손잡이가 있었다. 발레리안은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먼지떨이……?”
“반은 맞았어.”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곤 매끄러운 동작으로 먼지떨이를 뽑아 들었다. 발레리안이 그녀가 반복되는 회귀에 미치기라도 했나 의심할 무렵, 갑자기 먼지떨이가 변모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빛깔의 마나가 일렁이더니, 점차 물건의 모양이 바뀌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로제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귀여운 먼지떨이가 아닌, 화려하게 장식된 검이었다.
“검이야. 첫 번째 생에서 전하가 내게 하사하신.”
“검에서 나오는 마나는…….”
“맞아. 네 마나야. 정확히 말하면, 서른둘 발레리안의 마나. 시간 마법의 매개가 바로 이거였거든. 그 후로 이렇게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됐어.”
덕분에 이렇게 숨겨 다니기 좋아. 그녀가 검을 다시 작은 먼지떨이 모양으로 바꾸며 덧붙였다.
“……차라리 목걸이나 반지로 바꿔. 위급한 상황에 바로 사용하려면 반지가 낫겠네.”
“음. 물에 젖은 먼지떨이가 다리에 붙어있는 감촉이 별로긴 하더라. 한번 생각해볼게.”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반지로 바꿔두면 더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러나 먼지떨이의 효용도 아주 뛰어나서 막상 바꾸려니 아쉬웠다. 이만큼 먼지를 잘 털어내던 도구가 따로 없는데. 그녀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요해?”
“응?”
느닷없는 말에 로제타가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담긴 발레리안의 얼굴이 못내 심각해 보였다.
“먼지떨이가?”
“아니.”
발레리안이 헛웃음을 뱉었다.
“황태자 말이야.”
“아아.”
“그가 네게 그렇게 중요해? 시간을 몇 번이고 돌려가며 살리려고 애를 쓸 만큼?”
처음 들어본 질문은 아니었다. 이전 회차 때도 발레리안은 이런 질문을 하곤 했으니. 그러나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닌데도, 이 질문은 들을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아르문트가 내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이런 고생을 할 만큼? 잠시 침묵하던 로제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야. 내가 모시기로 선택한 주군이고.”
“그게 이유야?”
“솔직히, 나도 잘은 모르겠어.”
늘 명확한 답은 낼 수 없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래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 단 한 순간도.”
로제타가 단호하게 말했다. 발레리안을 바라보는 얼굴은 확신이 가득했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그런 확신이.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멀거니 응시하다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네 선택이 그렇다면, 존중할게.”
“고마워, 발레리.”
“다만, 널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어.”
응? 로제타가 되물었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앞으로는 나도 개입할 거야.”
“…….”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로제타는 그의 살벌한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다물었다. 발레리안이 도와주겠다는 말을 한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도와주지 않은 회차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개입 의사를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고작 직업 하나 바꿨을 뿐인데 바뀌는 게 이렇게 많다니. 로제타가 잠시 질린 표정을 지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난 네가 위험해지는 꼴, 더는 못 봐.”
그녀의 표정을 오해한 모양인지 발레리안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더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집착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