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무심한 듯 다정한2021.04.29.
로제타는 그의 집요한 시선을 마주하며 잠시 침묵했다. 혼란스러워 보이던 표정이 차차 진정되었다. 이내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에는 당황 대신 감동이 깃들었다. 곧 그녀가 발레리안을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냉큼 그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윽.”
갑작스러운 실력행사에 발레리안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피부 위에 보호 결계를 둘렀음에도 허리가 지끈거렸다. 로제타는 그의 앞에서는 유난히 힘을 감추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 줄 알면서도 말이다.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마법사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 줄 아느냐고 핀잔을 줄까 하다가,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모습에 말을 삼켰다. 로제타가 먼저 포옹을 하다니. 흔치 않은 경우였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혹은 느닷없는 공격에 당황한 탓인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쨌든, 이런 좋은 기회를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발레리안은 작은 어깨 위로 팔을 둘러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을 충분히 즐겼다.
“고마워, 발레리. 항상 나를 도와줘서……. 염치없지만, 이번에도 잘 부탁해.”
로제타는 그의 말을 ‘아르문트를 암살하려고 하는 배후를 잡는 걸 도와주겠다’ 정도로 받아들였다. 이전 회차에서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몇 번의 회귀에도 변함없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모습이 새삼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라니. 로제타는 다시 한번 감동했다. 비록 자신이 남자 복이나 가족 복은 없을지언정 친구 복 하나는 넘치도록 많은 것 같았다.
“걱정 마, 로즈.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내가 그렇게 되게 할 테니까. 발레리안이 그녀를 빈틈없이 안아주며 확언했다. 움찔, 로제타가 몸을 떨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뭐, 말하는 방식이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녀가 대충 납득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부드럽게 미소 짓는 발레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회귀한 시간을 포함하여 몇십여 년을 봐왔지만, 아직도 문득문득 놀랄 정도로 잘생기고 예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계속 이러고 있어도 돼?”
“응?”
“오고 있잖아.”
그가 문 쪽을 향해 턱짓했다. 로제타는 멍하니 눈을 껌뻑거리다, 곧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헉 소리를 냈다. 발레리안과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주변 기운을 읽지 않았던 탓에, 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아르문트가 응접실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문 앞에!
‘이런 건 빨리 말해줬어야지!’
로제타가 눈으로 발레리안을 욕하며 다급히 그의 몸을 밀어냈다. 자신이 곤란해할 걸 알면서도 여유롭게 말하던 그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발레리안은 능글맞게 웃으며 얌전히 몸을 물렸다. 똑똑. 벌컥!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 거면 노크는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윽고 아르문트가 아까보다 나아진 안색으로 등장했다. 그새 옷도 갈아입었는지 차림새가 퍽 화려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시선이 발레리안을 지나쳐 로제타에게 닿았다. 그녀는 소파 뒤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제 신체 능력을 충실히 써먹어 아르문트가 보기 직전 빠르게 자세를 잡은 것이었다. 다만 시간이 부족했기에 치마에 생긴 주름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르문트가 제 옷차림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로제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잠시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아르문트는 이내 다시 시선을 옮겨 발레리안을 응시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발레리안이 소파에서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아르문트도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기다려줘서 고맙군. 편히 앉게.”
“아뇨,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 한들 언질도 없이 찾아오다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이리 맞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하녀장, 차를 새로 내어와.”
저 차는 먹을만한 게 못 되니까. 탁자 위의 차를 로제타가 내린 것으로 착각한 아르문트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하녀장 마리아에게 명령했다. 그나저나 찻잔이 왜 두 개지? 아르문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제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서 있었다.
‘설마 대마법사와 함께 차를 마신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녀와 한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는 대마법사라니. 차라리 대마법사에게 기벽이 있어 늘 새로운 잔으로만 차를 마시려 한다는 것이 더 그럴듯했다. 아르문트의 명령에 마리아가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빠르게 차를 준비하러 떠났다. 그녀 또한 대마법사를 대접하고 있던 게 로제타였는 줄은 몰랐는지 퍽 당황한 표정이었다. 한편, 안심한 로제타는 오랜만에 보는 아르문트의 예의 차린 모습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한때는 나도 저런 대접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고작 저번 회차만 해도 그랬었다.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아주 오래전 일만 같았다. 한창 추억에 빠져들어 갈 무렵,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아르문트가 그녀를 빤히 쏘아보고 있었다.
“전하, 필요하신 거라도……?”
“나가지 않고 뭐 하나.”
“네?”
로제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아르문트는 또다시 눈썹을 휘어 올리며 대답했다.
“나가 있으라고. 어차피 오늘 근무 날도 아니지 않나.”
“아, 그래도…….”
“그 김에 여신관을 찾아가 치유도 받는 게 낫겠군. 내 이름을 대면 곧장 해줄 거다.”
아르문트는 그녀가 말을 잇도록 두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대화 흐름에 로제타는 잠시 눈치를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녀는 꾸벅 인사한 후 곧장 걸음을 옮겼다. 둘의 대화를 듣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무리라는 걸 알았다. 최근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마음을 제법 열었다고 해도 아직 이 정도 정보를 공유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중을 핑계로 남아 있기도 마땅찮았다. 그 유명한 대마법사를 대접하는 자리인 만큼 시중은 그녀가 아닌 하녀장의 몫이었다. 발레리안이 함께 있으니 아르문트가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로제타는 얌전히 아르문트의 말에 따라 떠나기를 선택했다. 물론, 그렇다고 신관을 만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만났다고 거짓말하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제 몫의 일을 마친 로제타는 바쁘게 아르문트의 방으로 향했다.
“로지, 오늘도…… 힘내?”
“로제타, 혹시 이거…….”
로제타를 발견한 하녀들이 말을 걸다 말고 어물거렸다. 늘 바보처럼 헤헤 웃고 다니던 그녀가 드물게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드디어 전하가 본색을 내보였나? 또 하녀 한 명 퇴사하겠구먼.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러나 로제타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빠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어젯밤, 아르문트와의 대화를 마친 발레리안이 남몰래 방으로 찾아와 말해준 내용 때문이었다.
‘꽃에 독이 묻어 있었다니.’
테오도르와 발레리안의 증언에 따르면, 아르문트의 몸은 중독된 상태라 했다.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은 것은 그 이유였다. 몇 시간 동안 주변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놓여 있던 꽃에서 소량의 독이 검출되었다. 이틀 전 로제타가 의아해 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받았다는.
-“워낙 소량이라 단번에 큰 변화는 못 느꼈을 거야. 그러나 며칠이고 옆에 두었다면 몸 안에 차차 독이 쌓였겠지.”
로제타는 발레리안의 말을 되새기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작 그걸 치워버렸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 아래에 달린 마력장치에서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장치 내부의 마나 회로가 일부 타들어 간 상태라 했다. 점검한 지 얼마 안 된 장치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작해놓은 것이 분명했다.
‘왜 이렇게 달라진 거지?’
독이 묻은 꽃도, 배의 이상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온갖 암살 시도를 다 겪어보긴 했지만, 그건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시기가 빨라져도 너무 빨라진 것이다. 애초에 이전 회차에서는 이 시기에 뱃놀이를 간 적이 없으니, 그에 따라 변화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되겠어.’
이렇게 많은 것이 변화하는 이상, 이전 회차의 경험만 믿고 안심하는 것은 아르문트의 죽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아르문트를 지키기 위해선 현재의 관계에 안주하지 말고, 무리해서라도 얼른 더 그와 가까워져야 한다. 로제타가 더 노력하겠노라 굳게 다짐하며 문 앞에 멈춰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로제타.”
황태자의 방 앞에 우뚝 서 있던 리처드가 무뚝뚝한 얼굴 위로 미소를 걸치며 그녀를 반겼다. 주인을 기다리던 대형견처럼 낯빛이 아주 환했다. 꼬리가 있었다면 붕붕 흔들고 있을 것 같았다.
‘릭이 원래 이렇게 웃음이 헤픈 애였나?’
이전에는 항상 사무적인 얼굴만 보여주더니, 이번 생에는 왜 자꾸 웃어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라고, 자꾸 다른 점이 발견되니 기분이 묘했다. 아르문트가 벌써부터 암살당할 뻔한 걸 안 지금은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안녕하세요.”
로제타가 애써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그와 더 재잘대고 싶지는 않았기에 시선을 냉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얼른 네 직무에나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리처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휴, 귀찮게 굴기는. 로제타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입을 열었다.
“늘 수고가 많으시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 리처드 경!”
“예, 예. 로제타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눈꼬리를 휘며 상냥하게 말하자, 이번에는 리처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버버’거리는 모습은 로제타보다도 바보 같았다. 로제타는 그에게 더 관심을 두지 않고 문을 두들겼다. 똑똑.
“전하, 로제타예요.”
“들어와.”
그의 허락하에 들어선 방은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기사들이 온통 뒤지고 나간 후, 급하게 하녀들을 불러 새벽 내 치웠다더니. 시간이 모자랐던 것인지 아직도 정돈이 덜 된 상태였다.
‘그런데 왜 나는 안 부른 거지?’
말뿐인 지위더라도 그녀는 아르문트의 전속 하녀이니, 당연히 그녀를 불러 청소를 시켰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젯밤 마리아는 로제타에게 그냥 쉬라는 말을 반복했다. 몇몇 하녀들만이 무언가 들은 게 있는지 그녀에게 부럽다며 몇 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로제타는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 의아해하며 아르문트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신관은 만나보았나?”
흠칫. 로제타가 몸을 굳혔다. 들어오자마자 치유 여부를 검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본인 몸이나 걱정할 것이지! 그녀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런 속마음을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로제타는 언제 몸을 굳혔냐는 듯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네, 전하가 배려해주신 덕에 잘 찾아뵀어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전하. 전하는 정말이지 최고의 주군-.”
“뭐라 하던가.”
찬사의 말을 길게 늘어놓아 정신을 쏙 빼놓으려고 했으나, 순순히 넘어갈 아르문트가 아니었다. 며칠 함께 다니며 그녀를 다루는 방법을 파악한 그였다. 쓸데없는 말은 미리부터 잘라야 한다.
“음…… 제가 생각보다 몸이 튼튼해서, 잘하면 더 오래 살 수 있대요.”
한 몇십 년 정도? 로제타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삼켰다.
“……그렇군.”
‘더 오래’를 ‘며칠 더 오래’ 정도로 생각한 아르문트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오래 살아있을수록 자신이 귀찮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제 은인이 빨리 죽길 바랄 정도로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도의심 그 이상으로 로제타가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스스로도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채 말이다. 어쩌면 이 특이한 하녀가 사라지는 것이 조금쯤 아쉬운 걸지도 모르겠다. 한편, 로제타는 슬쩍 시선을 돌려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문제의 꽃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소중한 사람이 준 거라고 했는데. 누가 손을 쓴 거지?’
루니엘라 영애가 벌인 짓이라기엔 너무 무모했다. 들키면 곧장 의심을 받을 테니 말이다. 중간에 누군가 음모를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머리로는 범인의 정체를 고민하며 몸으로는 청소도구를 집어 들었다. 어제 사람이 많이 왔다 간 탓에 군데군데 먼지가 묻어있었다. 역시 검술 말고 마법을 배울걸. 로제타가 짧게 후회하며 창문을 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뜬금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청소할 필요 없다.”
늘 깨끗한 상태를 고수하는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로제타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곤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오늘은 청소하지 말까요? 편히 쉬고 싶으신 거면 이만 나가볼게요.”
“아니.”
아르문트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명령했다.
“앞으로도 잡일 같은 것 할 생각 마.”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