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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밤 시중을 들어줘 (18/145)

18화. 밤 시중을 들어줘2021.05.02.

16549567604016.jpg‘이건 또 무슨 소리야?’

로제타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16549567604016.jpg‘전하가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아직도 독에 취해서 헛소리를?’

앞으로 잡일 같은 것을 할 생각 말라니. 그것도 하녀인 자신에게! 뭘 잘못 먹은 게 아니라면 이런 얘기를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녀를 응시하는 아르문트의 시선은 한점 떨림도 찾을 수 없이 또렷하기만 했다. 그 단호한 얼굴에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49567604016.jpg“잡일이라 하시면 어떤……?”

16549567604029.jpg“청소나 빨래 같은 것 모두.”

16549567604016.jpg“그, 죄송하지만…… 그게 제 직무인데요?”

로제타가 눈치를 보며 묻자 아르문트가 눈을 또 가늘게 떴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67604029.jpg“괜히 무리하다 어디서 픽 쓰러지지 말라는 소리다.”

배려를 해줘도 못 알아먹는군. 그가 짧게 투덜거렸다. 아. 로제타가 짧게 감탄했다. 어제는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신관에게 얼른 치료를 받으라고 명령하질 않나, 오늘은 그녀의 몸 상태를 배려해 청소도 하지 못하게 하질 않나. 이전의 아르문트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로제타를 ‘지나가는 하녀 1’ 정도로만 취급하던 그였다. 어지간해선 먼저 말을 걸지도, 시선을 맞추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무려 로제타를 배려하고 있었다.

16549567604016.jpg‘독을 마시길 백번 잘했다.’

로제타가 두 손을 꽉 모아 쥐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독을 대신 마시고, 또 호수에서 목숨을 구해준 것이 제법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관계가 가까워지는 데는 스킨십이 최고라던 멜라니와 엘리아의 조언이 효험을 나타낸 걸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로제타는 성공했다. 마침내 아르문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연 것이다. 아직 로제타의 이름조차 불러준 적 없는 그였으나 이 정도면 감지덕지했다. 울멍울멍한 눈빛이 그에게 닿자 아르문트는 흠칫 몸을 굳히더니 얼굴을 반대쪽으로 홱 돌렸다. 부끄러워하기는.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67604016.jpg“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전하.”

16549567604029.jpg“네 걱정 따위 한 적 없다고 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생각이지? 아르문트가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협박에 익숙해진 로제타는 입을 슬며시 벌릴 듯 말 듯 웃을 뿐이었다.

16549567604016.jpg“네에, 그럼요.”

전하의 말이 다 맞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반달 모양의 눈웃음을 치는 얼굴은 꼭 아르문트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에 민망해진 아르문트가 착각하지 말라고 재차 못 박으려는 찰나, 그녀가 빠르게 말을 가로막았다.

16549567604016.jpg“어쨌든 배려에 감사드려요. 다만, 전하의 방을 청소하는 건 계속 제가 맡고 싶어요.”

16549567604029.jpg“……왜지?”

16549567604016.jpg“그야, 저는 전하의 전속 하녀인걸요. 죽을 때까지 성심성의껏 전하를 모시는 것이 제 소명이니까요.”

로제타가 아련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말했다. 충성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사실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16549567604016.jpg‘청소한다는 명목이라도 있어야 이 방에 계속 드나들지!’

로제타는 곁을 허락받은 후로 예전보다는 자주 그의 침실까지 드나들곤 했다. 간식이나 차를 전달할 때나, 옷을 가져다줄 때, 청소할 때가 그 예였다. 그러나 이는 ‘예전보다 자주’일 뿐, 로제타가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 많은 시간을 그의 옆에서 보내길 바랐다. 그러지 않는다면 기사를 때려치우고 하녀가 된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로제타로서는 방을 드나들 수 있는 핑계 중 하나를 고작 몸의 편안함을 위해 포기할 수 없었다.

16549567604016.jpg‘이젠 익숙해져서 별로 힘들지도 않고.’

하녀가 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종종 실수했으나 이제는 베테랑이나 다름없었다. 수년을 일한 하녀들마저 그녀의 놀라운 청소 실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힘이 너무 센 탓에 설거지나 빨래는 아직 썩 잘하진 못했지만, 황태자 전속 하녀라는 직함을 단 후엔 그 두 가지 업무에선 제외되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었다.

16549567604016.jpg“게다가, 다른 하녀가 들어와서 청소하면 전하도 더 신경 쓰이실 것 아니에요.”

로제타가 조곤조곤 그를 설득했다. 일리가 있는 내용이었다. 여태껏 로제타만큼 그를 그의 눈치를 잘 살핀 하녀가 따로 없었다. 아마 다른 하녀가 들어온다면 이전과 같은 결과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16549567604016.jpg“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전하를 편안히 모시고 싶어요.”

그러니 허락해주세요, 전하. 덧붙이는 목소리가 나긋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그 보드라운 미소에 아르문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이유 모를 다정함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왜, 승은을 입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충성심을 보이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이유를 물어봤자 저번처럼 진심을 운운하며 헛소리를 할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더 묻지 않고 대화를 끝냈다.

16549567604029.jpg“네 마음대로 해.”

16549567604016.jpg“감사해요, 전하!”

로제타가 아르문트에게 꾸벅 인사한 후 창문 쪽으로 도도도 걸음을 옮겼다. 소중한 기회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퍽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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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뻗어 창문을 열어젖히려는 순간, 느닷없는 노크 소리가 그녀를 저지했다. 똑똑.

16549567661191.jpg“전하.”

리처드의 목소리에 아르문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자신을 부르는 어조로 보아 또 누군가 그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누가 감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찾아온 거야? 하루 정도 푹 휴식하라는 신관의 조언에 따라 일부러 오늘은 일정도 다 빼두었는데. 그가 쯧, 혀를 차며 문 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16549567661191.jpg“마담 르블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16549567604029.jpg“응접실로 모셔라.”

아르문트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귀찮아하던 좀 전과는 달리 표정이 아주 밝았다. 그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고는 다급히 응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 또한 청소도구를 내려놓고 아르문트의 뒤를 따랐다. 마담 르블랑. 그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깊은 사이는 아니었으나, 여러 번의 회귀 동안 숱하게 봐온 자였다.

1654956766121.jpg“전하!”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한 여인이 달려와 아르문트의 어깨를 감싸 안듯 잡았다. 로제타는 반사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서려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이내 비켜섰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올려묶고, 푸근한 인상의 얼굴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중년의 여인은 무려 ‘그’ 아르문트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존재였다. 전속 호위기사인 로제타는 물론, 아내인 루니엘라 영애보다도 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16549567604029.jpg“이곳까지는 어쩐 일인가, 베티.”

마담 르블랑은 일찍이 목숨을 다한 전 황후, 아르문트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를 키운 유모이기 때문이었다. 마담 르블랑은 현 황후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어린 아르문트를 훌륭히 키워냈다. 형식적인 유모의 업무를 떠나, 그를 아꼈고 소중히 대했다.

1654956766121.jpg-“하급 귀족인 제가 입에 담기엔 너무나 불경한 말이지만…… 저는 전하가 정말 제 아들 같아요.”

어린 시절, 그녀는 가끔 아르문트의 머리카락을 빗겨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것은 아르문트가 유일하게 믿는 진심이었다. 아르문트가 험난한 황궁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1654956766121.jpg“어쩐 일이라뇨!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16549567604029.jpg“이런,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군. 울지 마, 베티. 나는 건강하다.”

아르문트가 품에서 손수건을 빼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다른 이를 대할 때와는 달리 목소리도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16549567604016.jpg‘뭐, 마담 르블랑이니까.’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납득했다. 그녀 또한 마담 르블랑을 제법 좋아했다. 회귀할 때마다 한결같이 아르문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의 태도가 퍽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때로 마담 르블랑은 호위를 서고 있던 로제타에게 아르문트를 잘 챙겨주어 고맙다며 이것저것을 챙겨주곤 했다. 스스로 정한 원칙상 직무 중 음식을 입에 댈 순 없기에 거절했지만, 그 마음만은 참 고마웠다. 상냥한 마음씨 하며, 녹색의 눈동자 하며, 여러모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했다.

1654956766121.jpg“제가 드린 꽃에 독이 묻어 있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마담 르블랑이 연신 눈물을 떨구며 중얼거렸다.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로제타는 그 내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6549567604016.jpg‘소중한 사람이 루니엘라 영애가 아니라 마담 르블랑이었어?’

어쩐지 뭐가 이상하더라니!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미래가 아주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준 꽃’이라는 말에 당연히 연애 쪽을 떠올린 것이 실수였다. 이전 회차에서는 마담 르블랑이 꽃을 가져온 적이 거의 없기도 하고 말이다.

16549567604029.jpg“자네 잘못이 아니니 마음 쓰지 말게. 누군가 중간에 손을 쓴 모양이야.”

아르문트가 마담 르블랑을 소파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16549567604029.jpg“혹, 그때 꽃을 누구에게 맡겼는지 기억하나?”

마담 르블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차를 준비하던 로제타는 덩달아 침을 꿀꺽 삼켰다.

1654956766121.jpg“……시녀님께 맡겼었어요.”

16549567604029.jpg“……시녀? 밀리엄 백작 부인 말인가?”

1654956766121.jpg“네. 대신 전해줄 테니 달라 하시는 걸 거부할 수가 없어서……. 이리될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거절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전하. 앞으로는 꽃 같은 것 절대 보내지 않을게요.”

마담 르블랑이 깊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르문트는 네 잘못이 아니라며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16549567604016.jpg‘밀리엄 백작 부인이라. 그렇다면 또 황후 짓인가?’

로제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밀리언 백작 부인은 아르문트의 어머니가 황후이던 시절부터 황궁을 관리하던 여인으로, 지체 높은 백작 부인이자 현 황후의 심복이었다. 그녀의 손을 탔다면 분명 증거가 눈 녹듯 사라졌을 것이다. 늘 그래왔었기에 로제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르문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654956766121.jpg“전하. 치료는 잘 받으신 거죠? 신관은 뭐라던가요?”

16549567604029.jpg“잘 받았다.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

1654956766121.jpg“그래도 안심하면 안 돼요. 제가 해독에 좋은 찻잎을 좀 가져왔어요. 약이다, 생각하고 자주 드셔야 해요. 아셨죠? 전하는 물을 많이 안 드셔서 큰일이에요. 사람은 물을 많이 마셔야…….”

상황이 진정되자 마담 르블랑은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햇빛도 자주 쐬고 스트레칭도 자주 해야 한다, 채소도 잘 먹어야 한다 등등 말이 끝이 없이 이어지자 아르문트가 질끈 눈을 감았다.

16549567604029.jpg“그래, 다 지킬 테니 걱정 말게.”

1654956766121.jpg“요즘은 잠자는 건 어떠세요? 예전보다 좀 나아졌나요?”

찻잔을 들고 옮기던 로제타가 의외의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르문트에게 불면증이 있었나? 저녁을 먹은 이후에는 제 방에 아무도 들이지 않던 그인지라 전혀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가끔 새벽에 방 안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곤 했었다. 다만 아르문트의 기척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데다가, 무릇 훌륭한 호위기사란 주군의 사생활에 의문을 품어선 안 되기에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16549567604029.jpg“괜찮다.”

1654956766121.jpg“괜찮은 얼굴이 아니신걸요.”

마담 르블랑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시선을 옮겨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1654956766121.jpg“저, 아가씨.”

16549567604016.jpg“네?”

갑작스러운 호명에 깜짝 놀란 로제타가 다소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찻잔이 깨지진 않았으나, 차 몇 방울이 탁자에 튀고 말았다. 큰일 났다. 로제타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봤다. 그러나 이어진 마담 르블랑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하기만 했다.

1654956766121.jpg“전하의 전속 하녀라는 분이 아가씨죠?”

16549567604016.jpg“아, 네. 그렇습니다.”

1654956766121.jpg“전속 하녀가 생겼다니,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부디 전하를 잘 챙겨주세요.”

마담 르블랑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황한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아르문트의 불퉁한 목소리가 순서를 가로챘다.

16549567604029.jpg“쓸데없는 소리.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아는가.”

1654956766121.jpg“제 눈엔 아직 그렇게 보이는걸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르문트를 놀렸다. 아르문트는 부끄러움에 귓가를 붉히면서도 그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아주 평화로운 티타임이었다. *** 마담 르블랑은 차 한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성한 황태자의 방에 유모가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명령에 따라 그녀가 가는 길을 배웅했다.

1654956766121.jpg“저, 로제타라고 했나요?”

황태자 궁의 정문을 나서는 순간, 마담 르블랑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1654956766121.jpg“초면에 실례지만…… 부탁할 게 있어요.”

16549567604016.jpg“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로제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 또한 마담 르블랑에게 제법 호감을 품었기에, 이상한 부탁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마담 르블랑이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전달한 내용은 그런 그녀의 믿음을 깨뜨리고 말았다.

1654956766121.jpg“전하의 밤 시중을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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