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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악마에 가까운 (19/145)

19화. 악마에 가까운2021.05.06.

16549567802096.jpg“밤 시중이요……?”

로제타가 되물었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냐는 눈빛도 함께 돌려주었다. 아무리 그녀가 호감을 품었던 상대라고 한들 받아줄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받아줄 수 없는 말이었다. 많은 귀족이 하녀를 제 침대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용인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때면, 수많은 경험과 정보들이 듣고 싶지 않아도 절로 들려오곤 했다. 그중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귀족들의 지저분한 소문이었다. 그것을 기회 삼아 크게 벌어보려는 하녀도 분명 존재했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그 추잡한 제안에 불쾌해했고, 또 두려워했다. 거절하면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마지못해 수락하면 하찮은 하녀 주제에 주인을 꼬드겼다며 더한 질타를 받곤 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 또한 남다른 두각을 드러내기 전에는 종종 호위하던 귀족에게 그런 추잡한 제안을 받곤 했다. 힘없는 가문이긴 하나, 그래도 귀족인 그녀가 그런 취급을 당했는데, 평민인 하녀들은 얼마나 심하겠는가.

16549567802096.jpg“그런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어요.”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를 발견한 마담 르블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16549567802106.jpg“어머, 어머! 그 뜻이 아니었어요! 세상에, 제가 말을 이상하게 했네요. 죄송해요, 로제타 양.”

그녀가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뿐만 아니라 목까지 새빨개진 모습이었다.

16549567802106.jpg“제 말은, 저녁 이후에도 전하의 방에 찾아가 시중을 들어줬으면 한다는 거였어요. 수시로 장작을 살펴주고, 따뜻한 물을 올려주는, 그런 거요.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말실수를…….”

마담 르블랑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로제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밤에도 시중을 들어달라는 말을 너무 축약해서 말해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16549567802096.jpg‘어쩐지, 마담이 그럴 리 없지.’

박살 났던 믿음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로제타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생긋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16549567802096.jpg“이해했어요, 마담. 부디 괘념치 마세요.”

16549567802106.jpg“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나이가 드니 점점 정신이 없네요.”

휴. 마담 르블랑이 민망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16549567802106.jpg“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로제타가 늦은 시간에도 전하의 시중을 들어줬으면 해요. 물론 힘들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전하가 조금이라도 잘 주무셨으면 해서요. 어렸을 때부터 방이 조금이라도 추우면 잠을 설치곤 하셨거든요.”

16549567802096.jpg“음, 저야 괜찮지만, 전하가 싫어하실 텐데요…….”

로제타로서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웠다. 안 그래도 저녁에는 그를 가까이서 지킬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 참이었다. 만약 밤에도 시중을 명목으로 방을 드나들 수 있다면 호위가 한결 쉬워질 테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성질을 부려댈 아르문트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자신을 암살하러 온 거냐며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겨우 쌓아온 신뢰마저 한 번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로제타로서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16549567802106.jpg“어머! 전하만 괜찮으시다면 들어주겠다는 뜻인가요? 어쩜, 이렇게 친절할 수가……!”

다른 하녀들은 절대 못 한다며 도망가곤 했었는데! 마담 르블랑이 두 눈을 빛내며 로제타의 손을 맞잡았다. 로제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봤다.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모습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16549567802106.jpg“고마워요, 로제타. 전속 하녀가 생겼다는 말에 내심 기대했었는데, 제 기대보다도 훨씬 좋은 분이시네요.”

16549567802096.jpg“저, 그게…….”

아직 수락한다고 안 했는데요. 로제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담 르블랑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그러나 고작 미안함을 이유로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로제타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마담 르블랑이 무어라 하든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뱉을 심산이었다.

16549567802096.jpg“마담, 저는…….”

16549567802106.jpg“혹시 전하가 뭐라고 하면, 제 이름을 대요. 제가 시켰다고 하면 아마 화내지 못하실 거예요. 제 고집을 잘 아시거든요. 화를 낸다 해도 제게 내시겠죠.”

16549567802096.jpg“저는 늘 전하의 건강이 염려되었답니다. 그러니 마담의 말씀을 따를게요.”

그리고 로제타가 아주 단호하게 수락했다. 충성스러운 하녀인 척, 마담 르블랑을 따라 두 눈을 빛내며. 마담 르블랑이 시켰다고 대답한다면 분명 아르문트의 질책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괜한 의심을 사지도 않을 것이다. 즉, 이는 늦은 시간에도 아르문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계였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다. 구미가 당기다 못해 안달까지 났다. 마담 르블랑은 로제타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고맙다며 몇 차례 인사를 한 후에야 황태자궁을 나섰다. 로제타 또한 흐뭇한 미소를 걸친 채로 그녀를 배웅했다. 마담 르블랑을 태운 마차의 모습이 차차 멀어졌다. 그때,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로제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16549567825126.jpg“로제타.”

16549567802096.jpg“하녀장님.”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공간에 하녀장 마리아가 특유의 깐깐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물론, 로제타는 한참 전부터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일반인인 마담 르블랑은 몰랐겠지만.

16549567825126.jpg“방금 마담과 무슨 얘기를 했지?”

16549567802096.jpg“아, 제게 전하의 시중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늦은 시간에도 전하를 잘 모셔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로제타는 해맑은 얼굴로 사실을 그대로 진술했다. 마리아가 기둥 뒤에 숨어 그들의 대화를 다 엿들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이상 말을 아껴봤자 괜히 의심만 살 것이다. 뭘 모르는 어리숙한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곧바로 털어놓는 것이 현명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마리아의 얼굴 위에 옅게나마 비치던 경계의 기색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로제타를 하찮고도 귀엽다는 듯 잠시 응시하다, 이내 쯧쯧 혀를 찼다.

16549567825126.jpg“장성한 전하를 이리 자주 찾아오다니…… 괜한 소문만 더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혹 언제 또 찾아오겠다는 말이 있었나?”

16549567802096.jpg“아뇨, 그런 건 없으셨어요.”

16549567825126.jpg“전하께 주고 간 건 따로 없고?”

16549567802096.jpg“음…… 아, 해독에 좋은 찻잎을 가져오셨던데요.”

로제타의 말에 마리아가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걸 왜 또……. 그녀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마리아가 여러모로 마담 르블랑을 꺼리는 모양이었다.

16549567802096.jpg‘이런 건 또 처음 알았네.’

기사로 일할 적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정보였다. 일개 하녀와 유모의 관계 따위에 관심을 두기에 그녀는 너무 바빴다.

16549567802096.jpg‘어쩌면 그게 패인이었을지도 몰라.’

로제타가 가만히 서서 이를 꽉 깨물었다. 이전 회차들에서 그녀는 황후와 1 황자에게만 온 정신을 집중했었다. 그러나 그래선 늘 실패할 뿐인 것을 알았기에, 이번에는 보다 넓게 주변을 관찰할 생각이었다.

16549567825126.jpg“로제타.”

16549567802096.jpg“네?”

16549567825126.jpg“내 자네를 제법 좋게 봤네. 일도 빠릿빠릿하게 하고, 하녀들 사이에 전반적인 평도 좋더군.”

16549567802096.jpg“앗, 감사해요, 하녀장님.”

로제타가 헤헤 웃으며 인사했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보다는 하녀들 사이에 평이 좋다는 얘기가 더 기분이 좋았다. 이전 생과는 달리 친구가 꽤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은 칭찬하는 사람치고 퍽 심각해 보였다.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67825126.jpg“그러니 자네를 위해 경고 하나 하지.”

마리아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로제타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16549567825126.jpg“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감히 전하의 곁을 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마담의 말만 믿고 늦은 시간에 전하의 방으로 향하는 어리석은 짓은, 더욱이 지양하게.”

16549567802096.jpg“네……? 그렇지만, 마담의 말대로 저녁에도 시중을 드는 것이 전하께 더 좋지 않을까요? 곧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새벽에는 쌀쌀하실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셨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에요.”

로제타가 심각한 기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이나마 마리아의 입에서 정보를 더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16549567825126.jpg“기본적인 온도 조절은 마법석으로 하고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네.”

16549567802096.jpg“어디서 들었는데, 온도 조절 마법은 무척 까다로워서 마법석만 가지곤 장작을 태우는 효과는 내기 어렵다고…….”

16549567825126.jpg“고작 온도 조절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지 않은가!”

16549567802096.jpg“그럼 뭔데요?”

로제타가 이때다 싶어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경고를 하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16549567825126.jpg“전하의……!”

짜증스럽게 입을 연 마리아가 말을 하다 말고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곤 로제타를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안타깝게도 로제타의 유도 신문에 넘어가다 말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16549567825126.jpg“……나는 분명 경고했네.”

그녀는 단 세 마디 말을 남기고 주저 없이 휙 돌아섰다. 그리고 홀로 남은 로제타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응시했다.

16549567802096.jpg‘전하의, 라고 했지.’

무언가를 추론하기에는 너무 단서가 부족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16549567802096.jpg‘적당한 핑계도 있겠다, 직접 알아내면 그만이니까.’

로제타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씩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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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은 천천히 흘러 이윽고 화려한 황태자궁의 주위로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느긋한 하루를 보낸 아르문트는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로제타에게 이만 방으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로제타는 장작을 마지막으로 살핀 후, 물병에도 따뜻한 물을 따라두었다. 그러곤 쾌활한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아르문트는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시선으로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았다.

16549567906507.jpg‘설마 오늘 밤 갑자기 죽는 건 아니겠지.’

로제타가 독을 먹은 지도 벌써 5일째였다. 처음 그녀를 진료했던 신관의 말에 따르면 길어봤자 일주일이라 했으니, 언제 갑자기 죽어도 이상치 않은 것이었다.

16549567906507.jpg‘최근 검진받았을 때 며칠은 더 살 수 있을 거라 했으니…… 오늘 밤은 괜찮을 거다.’

이렇게 생각한 아르문트는 냉큼 고개를 돌렸다. 씁쓸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으나 착각으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달이 어렴풋이 떠오른 새벽. 황태자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인 러크는 밀려드는 잠기운을 몰아내려고 애쓰며 아르문트의 방문 앞을 지켰다. 잠이 많은 그에게 야간 호위란 정말이지 끔찍한 것이었다. 참으려 해도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왔고 검을 쥔 손은 점차 힘이 풀렸다. 의식이 꿈의 경계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16549567802096.jpg“흠, 흠.”

느닷없는 헛기침 소리에 러크가 화들짝 몸을 곤두세웠다. 혹 기사단장님이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한 명의 하녀였다. 그것도 동기인 리처드가 좋아하는 바로 그 하녀, 로제타.

16549567802096.jpg“수고가 많으시네요, 경.”

16549567825126.jpg“크흠. 로제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멀쩡히 말하는 걸 보니 몽유병은 아닌 것 같고.”

러크가 졸고 있던 모습을 들켰다는 민망함에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다만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16549567802096.jpg“보다시피, 전하 방에 장작을 갈려고 왔어요.”

그녀가 품 안의 장작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러크는 아직 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16549567825126.jpg‘전하께서 밤에는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라 하시지 않았었나?’

워낙 오래된 얘기라 가물가물했지만, 늦은 시간에는 하녀는 물론 기사도 드나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얘기를 하며 가로막기엔 로제타의 모습이 너무 당당했다. 따로 허락받은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16549567825126.jpg‘하긴, 이름뿐이라 해도 로제타는 전하의 전속 하녀고…… 또 요즘은 유독 전하와 붙어 다녔으니까.’

어찌나 붙어 다니던지, 리처드가 제 짝사랑이 망한 것 같다며 매일매일을 우울하게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본래 단순하고 조심성이 없기로 유명한 러크는 로제타라면 전하께 따로 허락을 받았겠거니, 하고 납득했다.

16549567825126.jpg“고생해라.”

러크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어주며 로제타의 야간 업무를 응원했다. 내심 동병상련의 동지애를 느낀 까닭이었다. 로제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를 지나쳤다. 다만 여전히 눈빛은 서늘하다 못해 사나웠다.

16549567802096.jpg‘근무 태만에 조심성 부족이라. 이러니까 일찍 해고당하지.’

처음 봤을 때 어쩐지 본 적 없는 얼굴이라 했더니, 알고 보니 그녀가 호위기사가 되었을 때 러크는 이미 아르문트의 눈 밖에 나 쫓겨난 후였다. 로제타는 저놈의 정신머리를 언젠가 고쳐놓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촛불 하나 켜진 것이 없는 아르문트의 침실은 낮에 보던 것과 달리 조용하고 어두웠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미세한 한기가 피부를 얼렸다. 방이 워낙 넓어 마법석만으로는 추위를 막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장작을 새로 채워 넣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아예 소리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기다란 나무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16549567802096.jpg‘의외네. 바로 깰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침대 위의 아르문트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도 한번 뒤척이지 않고 자는 것이 죽었나 싶을 정도였다. 무언가 커다란 비밀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곧 그럼 그렇지, 하는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16549567802096.jpg‘그냥 하녀가 주제도 모르고 헛생각을 품을까 경고한 거구먼.’

장작을 모두 채워 넣은 로제타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침대 근처에 놓인 물병을 따뜻한 것으로 교체했다. 새로운 물병을 내려놓은 그녀는 허망한 마음에 가만히 서서 잠든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입술을 딱 붙이고 자는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16549567802096.jpg‘평소에도 이렇게 착한 얼굴이면 좋겠네. 미간에 주름 좀 그만 잡고.’

그러다 일찍 주름 생긴다, 너. 로제타가 소리 죽여 속삭였다.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고요한 어둠 속에 불이 켜지듯, 검은 속눈썹이 올라가고 황금색 눈동자가 번쩍 드러났다. 이내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16549567802096.jpg‘어……?’

당황한 로제타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죽은 듯이 자던 그가 갑자기 일어날 줄이야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커다란 손이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더니, 그녀조차 놀랄 정도의 힘으로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새 등 뒤에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 위에는 아르문트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 두 눈을 정욕으로 물들인 채, 아래를 빳빳이 굳힌 아르문트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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