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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침대 위의 짐승 (20/145)

20화. 침대 위의 짐승2021.05.09.

로제타는 얼른 입을 열고 변명의 말을 뱉으려 했다.

16549568008631.jpg‘마담 르블랑이 시키신 일이에요! 저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어요!’

이런 식으로, 냉큼 책임을 마담에게로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관계를 한순간에 잃고 싶지는 않았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입술을 떼려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처음 이상한 점을 발견한 곳은 바로 그의 찬란한 눈동자였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지금까지 아르문트가 보여주던 것과 사뭇 달랐다. 아니, 수많은 회귀를 모두 합쳐도 저런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글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는 꼭 새빨간 쇳물 같았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삼킬 듯이 펄펄 끓어오르는 쇳물. 그녀로서는 낯설기만 한 감정이, 혹은 욕구가 그 속에서 버글거렸다. 꿀꺽.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단지 시선을 마주한 것뿐인데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위험성을 느낀 탓이었다.

16549568008631.jpg“저, 전하……?”

로제타가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르문트는 그녀의 위에 단단히 자리 잡은 채 그녀를 이리저리 훑고 있었다. 어디부터 먹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포식자에게 붙잡혀 잡아먹히기를 기다리는 먹잇감의 심정이 이런 걸까.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만큼 아르문트의 시선이 집요하고도 진득했다. 그녀는 우선 이 불편한 자세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르문트에게 잡힌 손목에 힘을 주고, 그의 아래에 깔린 다리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를 밀어내기 직전, 또 다른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말았다.

16549568008631.jpg‘이게…… 뭐지?’

슬그머니 들어 올린 다리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얇고 보드라운 천 아래가……. 단단했다. 그 정체를 유추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6549568008631.jpg‘미, 미친 거 아냐?!’

로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르 달아올랐다. 푸른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로제타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상황이었다. 물론 각종 대련을 하며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신없이 흙바닥을 뒹굴다 닿는 것과 침대 위에서 닿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지 않나. 심지어 눈앞의 상대는 자신의 주군, 라그나르 제국의 황태자, 아르문트였다. 연애결혼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될 남자이자, 그 아내와도 서른이 넘도록 합방 한번 하지 않은, 그 아르문트 말이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이다. 죄악감 때문인지, 혹은 그저 놀라서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무 당혹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전하를 걷어차도 되는 걸까? 그러다 거기가 터지면 어쩌지? 아니면 확 던져버릴까? 힘 조절을 못 해서 죽지는 않겠지? 로제타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러느라 아르문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촉. 낯선 촉감에 로제타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아르문트의 고양이 같은 눈매가 보였다. 뭐가, 닿은 거지? 로제타가 떨리는 눈으로 그 범인을 쫓았다. 제 입술에서 유유히 떨어지는 붉은 것이 보였다. 바로 아르문트의 입술이었다. 아르문트가 고개를 숙여 로제타에게 키스한 것이었다. 가벼운 입맞춤 후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금 고개를 숙여 또다시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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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극도의 당황으로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까칠한 입술이 그녀의 것과 스치듯 맞닿았다. 이내 촉촉한 것이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려 했다.

16549568008631.jpg“전하!”

물론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로제타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르문트에게 잡힌 한 손을 빠르게 빼낸 후 그대로 그의 가슴 위를 짚어 거칠게 밀어냈다. 온 힘을 다하진 않았더라도 제법 힘을 줬는데, 튕기듯 날아갔어야 할 그의 몸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다만 차마 더 다가오지는 못했다.

16549568008631.jpg“진정 미치셨습니까?”

어찌나 당황했는지 기사일 적 쓰던 말투까지 튀어나왔다. 혹 바깥에 있는 러크가 소리를 듣고 들어올까 겨우 목소리를 낮춘 그녀였다. 로제타는 씩씩거리며 아르문트를 올려다봤다. 당장 제대로 된 변명을 털어놓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군이라 해도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이 마주했다. 일순 로제타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야에 담긴 아르문트는 말 그대로 미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목적 외의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짐승처럼 로제타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로제타의 호령 따위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건 아르문트가 아니야. 그녀가 본능처럼 깨달았다.

16549568008631.jpg“……전하?”

로제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1654956800867.jpg“크륵…….”

목을 잔뜩 긁고 나오는 듯한 거친 소리. 인간의 목소리보단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깝게 들렸다. 철렁.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언젠가 멜라니가 귓가에 속살거리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6549568008674.jpg-“너 설마 소문 못 들었어? ‘그’ 소문 말이야. ……황태자 전하가 미쳤다고.”

황태자 전하가 사용인에게 검을 휘둘렀다, 식기를 마구 던져댔다, 하는 자극적인 소문들과, 정작 이 같은 상황을 직접 목도한 이는 황태자궁에 하나 없는 상황. 저녁 이후로는 어지간해서는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전하. 단서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아르문트가 매일 밤 방에만 박혀 있던 건 아니었다. 긴급한 회의가 있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면 밤길을 나서곤 했다. 그러나 종종, 급한 일정 중에도 갑자기 이만 돌아가겠다며 홱 가버릴 때가 있었다. 피곤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소한 핑계를 대며 말이다. 로제타는 그저 그것이 아르문트의 강퍅한 성격 때문이겠거니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태도를 보일 때는 항상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16549568008631.jpg‘가끔……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었지.’

로제타가 떨리는 시선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의 호위기사로 일하던 시절, 새벽이 되도록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때면, 간혹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나, 창문을 흔들고 벽을 치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나 물어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이가 침입한 것도 아니었고, 어디 아픈 것 같지도 않았기에 로제타는 그저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주군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로제타는 그 사생활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것을 목격했다. 이전 생의 아르문트가 고이고이 감춰두었던 비밀을.

16549568008674.jpg-“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감히 전하의 곁을 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마담의 말만 믿고 늦은 시간에 전하의 방으로 향하는 어리석은 짓은, 더욱이 지양하게.”

하녀장은 알고 있었나 보군. 로제타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어째서 이런 장면을 목격한 사용인이 궁에 아무도 없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마 그녀가 돈으로 입을 막든, 쫓아내든, 뒤에서 처리했을 것이다. 로제타가 다시금 아르문트와 눈을 맞췄다. 그러곤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16549568008631.jpg“전하. 지금 제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아르문트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려고 애쓸 뿐 대답하지 않았다. 큿, 하는 신음만 중간중간 흘릴 뿐이었다. 보아하니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조여오는 힘이 심상치 않았다.

16549568008631.jpg‘원래 이렇게 힘이 셌나?’

로제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나 악력이 강한지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단숨에 제압당했을 게 분명했다.

16549568008631.jpg‘몽유병…… 같은 건가.’

그녀가 몸부림치는 그를 가볍게 제압하며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한 몽유병이라기엔 꺼림칙한 점이 많았다. 비약적으로 증가한 힘도 그렇고, 반쯤 돈 것 같은 저 상태도 그렇다. 살쾡이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16549568008631.jpg‘아니면 정말 전하가 미치기라도 했나.’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 로제타가 보기에도 그의 삶은,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외롭고 고단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황태자로서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늘 괴로워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얼굴은 점점 더 무미건조해졌고 찬란한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그런 그가 짐승 같은 이면을 감추고 있었다 한들, 크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르문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녀를 추행한 것이 아닌 이상, 그를 향한 충성심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다만 지금껏 제 주군의 괴로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다.

16549568008631.jpg“전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로제타가 착잡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르문트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 몸을 비틀고 있었다. 손가락을 구부려 공격하듯 휙휙 휘둘러대는 모습은 정말이지 발로를 보는 것 같았다. 휴.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색 속눈썹이 나긋하게 내려앉았다가, 이내 다시 위로 올라갔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결연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위치가 반전되었다. 로제타가 손에 힘을 주고 아르문트의 몸을 단숨에 밀어냈다. 근육이 탄탄하게 박힌 몸이 종잇장처럼 넘어갔다. 아르문트는 큭, 소리를 내며 반항하려 했으나 곧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가 될 자를 상대할 순 없었다. 퍽! 연이어 그녀의 손날이 그의 옆 목을 단호하게 가격했다. 그와 동시에 아르문트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었다.

16549568008631.jpg“후.”

아르문트의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탄 로제타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에게 이렇게까지 실력 행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를 이런 상태로 그대로 두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

16549568008631.jpg“불가항력이었어요, 알죠?”

로제타는 그가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쿡. 무언가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 느낌이 또다시 느껴졌다.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제 다리를 찔러대는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16549568008631.jpg‘저건 왜…… 안 죽어?’

기절하면 같이 죽어야 마땅하지 않나? 로제타가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정신을 수양했다. 흠, 흠. 헛기침을 내뱉은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짚었다. 차가운 손이 벌어진 잠옷 틈을 파고들었다. 손가락 끝이 심장 근처에 다다르고 나서야 진입을 멈췄다.

16549568008631.jpg‘누가 보면 기절한 사람을 더듬는 변탠 줄 알겠군.’

로제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바닥을 그의 피부에 밀착했다. 딱딱한 근육의 촉감을 느끼며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내 그녀의 손에서 나온 기운이 아르문트의 몸속으로 천천히 흘러들었다. 여름 햇살 아래의 강물처럼 따스하고도 시원한 기운은 그의 심장을 파고들더니 곧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깨달음을 얻은 로제타의 기운은 그 농도가 매우 짙어 실신한 사람의 몸에 주입할 경우 원기를 회복하는 걸 도울 수 있었다. 신성력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위급할 때는 제법 쓸만한 능력이었다.

16549568008631.jpg‘바로 일어나긴 어렵겠지.’

힘 조절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손에 맞았으니 빠르게 정신을 차리긴 힘들 것이다. 몇 분간 기운을 흘려보낸 로제타는 손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와중에도 목소리를 죽인 덕분에, 문밖에 서 있을 러크는 딱히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장면을 보였다간 오해받을 것이 분명하니 다행인 일이다.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작게나마 소란이 일었는데도 들어와 보기는커녕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조차 않는 러크의 해이한 태도에 짜증이 일었다.

16549568008631.jpg‘나갔는데 또 졸고 있으면 가만 안 둔다…….’

옛 기사단장의 사고로 돌아간 로제타가 이를 으득 갈며 조심스럽게 아르문트의 위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갑작스럽게 누군가 손을 덥석 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1654956800867.jpg“큭…….”

낮게 울리는 신음에 로제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인상을 찌푸리고 저를 노려보는 아르문트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아직도 기운이 남은 건가? 깜짝 놀란 로제타가 다시 손날을 세운 순간,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6800867.jpg“네가 왜…… 여기 있지?”

진짜 아르문트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하필이면 로제타의 아래에 깔린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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