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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저를 내쫓지 마세요 (21/145)

21화. 저를 내쫓지 마세요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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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한밤중 황태자의 침대로 몰래 기어들어 온 변태가 되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오해해버린 아르문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노기 어린 목소리가 곧 귀를 울렸다.

16549568147515.jpg“감히, 네가-.”

16549568147519.jpg“전하께서 저를 덮치셨어요.”

오해하지 말라는 말로 장황하게 설명해봤자 아르문트가 화내는 시간만 길어질 것이 뻔하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말을 끊고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16549568147515.jpg“……뭐?”

그러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끝이 은연히 떨렸다. 씨근덕거리던 숨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16549568147519.jpg“마담 르블랑이 제게 부탁하셨어요. 밤에도 전하의 시중을 들어달라고요. 실례를 무릅쓰고 장작을 갈러 들어왔는데……. 갑자기 전하게 제게 달려 드셨어요.”

로제타는 침착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16549568147519.jpg“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으셨고, 눈빛은 꼭 전하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이글거렸어요.”

16549568147515.jpg“…….”

16549568147519.jpg“계속 제게 달려드시는 걸 겨우 막아냈고요. 이 자세는 전하를 급하게 제압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랍니다.”

부디 오해하지 마세요. 그녀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몇 분은 더 의심할 줄만 알았던 아르문트는 예상외로 말을 더 보태지 않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녀를 응시하던 얼굴이 옆으로 기울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허공을 응시하는 옆모습이 어쩐지 비참해 보였다.

16549568147515.jpg“……일단 내려가.”

16549568147519.jpg“아, 네.”

로제타가 허둥지둥 그의 위에서 내려갔다. 설명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자세가 이상하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다행히 전하의 그것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안심한 로제타는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근처에 섰다. 하녀인 그녀가 감히 전하의 침대에 앉을 수야 없다. 소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멀뚱멀뚱 서 있으려니 어색함이 치밀어올랐다.

16549568147515.jpg“서 있지 말고 앉아.”

아르문트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명령투의 말이었으나 목소리가 부드러워 명령보다는 상냥한 제안처럼 들렸다. 로제타는 눈치를 보다 슬쩍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그의 눈썹이 어이없다는 듯 휘어졌다.

16549568147515.jpg“……침대 말고, 소파 말이다.”

16549568147519.jpg“앗, 네.”

로제타가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다시 엉덩이를 떨어트렸다. 소파 근처로 걸어가 주변을 서성거리자 아르문트가 한숨을 내쉬더니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맞은편에 착석했다.

16549568147519.jpg“아, 따뜻한 차라도 좀 가져다드릴까요?”

로제타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부러 웃으며 묻자 아르문트는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황금색 눈동자는 불처럼 이글거리던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앙다문 입 위로 살집 없는 볼이 미세하게 떨렸다.

16549568147515.jpg“앉아 있어. 내가 가져다줄 테니.”

16549568147519.jpg“전하께서요?”

깜짝 놀라 되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몸을 일으키더니, 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다기로 차를 준비했다. 방 안 가득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동작이 아주 자연스럽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했다.

16549568147519.jpg‘전하가 직접 내려주는 차라니!’

로제타는 입을 쩍 벌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군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은 앉아 있는 상황이 못내 불편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16549568147515.jpg“심신 안정에 좋은 차다. 동대륙에서 수입한 것인데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군.”

능숙하게 차를 내린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앞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동대륙에서 수입한 찻잎이라니. 동대륙과 거래가 완전히 자리잡히기 전인 지금, 소량으로 들여온 사치품이 얼마나 비쌀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물론 로제타가 이 정도 사치에 놀랄 사람은 아니었다. 첫 번째 생에서 그녀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재력가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르문트가, 자신에게 이런 귀한 것을 내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도, 그의 호위기사도 아닌 그저 하녀에 불과한 지금의 자신에게.

16549568147519.jpg‘잘해줘서 입막음하려 그러나? ……아니면 차에 독을 타서 죽이려고?’

완벽한 입막음을 위해서는 후자가 더 효과적일 테다. 그러나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후자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다면 주군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16549568147519.jpg“잘 마실게요, 전하.”

그렇기에 로제타는 해사한 얼굴로 감사를 표시한 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차를 들이켰다. 그런 그녀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아르문트의 얼굴은 더욱 묘해졌다.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었다. 로제타가 그와 시선을 맞추자 아르문트는 아닌 척 고개를 쓱 돌렸다. 무거운 정적이 방 안을 메웠다. 작은 숨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낮으면서도 신중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적막을 깼다.

16549568147515.jpg“방금 있었던 일은…… 미안하다.”

아르문트가 고개를 힘없이 아래로 떨어트렸다. 허락도 받지 않고 방에 들어온 로제타를 탓하거나, 그녀의 증언을 전면 부정할 수도 있을 텐데도 그러지 않고 사과하는 그였다. 로제타는 입안의 차를 천천히 삼키곤 부드러운 미소로 응수했다.

16549568147519.jpg“괜찮아요.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잖아요.”

달칵. 그녀가 찻잔을 낮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68147519.jpg“보다시피 다친 곳도 전혀 없고요.”

로제타가 이것 보라는 듯 두 팔을 과장스레 흔들었다. 사실 그에게 잡혔던 손목에 옅은 멍 자국이 남을 것 같긴 했지만, 아직은 깨끗하기만 했다. 아르문트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겨우 말을 고른 듯 어렵게 입을 뗐다.

16549568147515.jpg“……어떻게 한 거지?”

16549568147519.jpg“네?”

16549568147515.jpg“어떻게, 전혀 다치지도 않고 그걸 제압했냐는 의미다. 힘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걸’이라.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단어 하나로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자신의 이상 행동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 변화에 스스로의 의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대답하기도 전에 조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68147515.jpg“내가 이리 일찍 이성을 되찾은 것도, 네가 무언갈 한 덕인가?”

이성을 되찾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것 같고. 로제타가 조용히 정보를 추가했다.

16549568147519.jpg“음,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로제타가 헤헤 웃으며 뜸을 들였다. 아르문트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16549568147519.jpg“제가 은근 힘이 세거든요.”

16549568147515.jpg“……뭐?”

16549568147519.jpg“힘이 세다고요. 엄청.”

아르문트가 멍한 얼굴로 되묻자 로제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16549568147515.jpg“……농담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16549568147519.jpg“농담이라뇨! 정말이에요. 그냥 힘으로 제압했는데요?”

로제타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금세 허탈해졌다. 그는 영 못 미덥다는 듯이 그녀의 팔다리를 훑어보았다. 저런 가느다란 팔다리로 뭘 하겠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로제타는 의심 많은 그를 위해서 친절히 예를 들어주었다.

16549568147519.jpg“기억 안 나세요, 전하? 제가 전하 입에 있는 독을 강제로 빼낼 때, 어땠는지 말이에요.”

아르문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그 순간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하녀에게 강제로 입술을 빼앗긴, 강렬한 순간을.

16549568147515.jpg‘아무리 저항해도 미동조차 없었지.’

그래, 그때는 분명 산을 상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저 그가 너무 당황한 탓에 제힘을 다 내지 못했던 거라고 여겼다. 고작 그때 한번을 가지고 저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을 순 없다. 심지어 눈앞의 하녀는 ‘황궁의 개복치’라는 우스운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듣자 하니 독을 마시기 전부터 픽픽 쓰러지곤 했다던데, 그런 그녀가 어떻게 그를 힘으로 이긴단 말인가.

16549568147519.jpg“그걸로도 못 믿으시겠으면…… 이건 어때요?”

그의 눈빛을 읽은 로제타가 탁자 위로 팔을 뻗었다. 아르문트는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예상할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16549568147519.jpg“실례가 안 된다면 한 번 하실까요?”

그녀가 눈꼬리를 장난스럽게 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팔꿈치를 탁자에 딱 붙이고, 손바닥을 쫙 편 자세. 무려, 황태자에게 팔씨름을 제안한 것이었다. 정식 대련도 아니고 팔씨름이라. 평민들이나 할법한 행동에 아르문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 샘솟았으나 아무리 로제타가 눈치가 없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까지 장난을 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난이 아니라기엔 또 너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을 쏘아보며 침묵하자 로제타는 얼른 결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팔락거렸다. 후. 결심한 듯 숨을 내쉰 아르문트가 이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16549568147515.jpg‘시험해보고, 거짓말이면 그때 화를 내도 그만이다.’

손을 잡으면서도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시야에 담긴 그녀의 손가락과 팔이 너무 가냘프기 때문이었다. 이런 팔로 무슨 힘을 쓴다고. 아르문트가 코웃음을 쳤다.

16549568147519.jpg“그럼, 시- 작!”

로제타가 생글생글 웃으며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아르문트가 팔에 힘을 줬다.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곧장 넘긴다. 계획은 이러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계획대로만 풀리지 않는 법이었다.

16549568147515.jpg“큿……?!”

아르문트의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불뚝 솟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팔근육이 바르르 떨렸다. 최대한 힘을 줬는데도, 로제타의 손은 시작한 자세 그대로에서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여유롭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16549568147519.jpg“다 하신 거예요?”

가소롭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이럴 리가…… 없는데?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아르문트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그는 다시금 오른팔에 힘을 잔뜩 넣고 그녀의 팔을 넘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도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16549568147519.jpg“그럼 이제 제 차례입니다.”

방긋 웃어 보인 로제타가 이내 아르문트의 손을 꽉 쥐어 잡았다. 손이 터져나갈 것 같은 압력에 아르문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쿵! 아르문트의 손등이 순식간에 탁자를 내리찍었다. 그녀가 적당히 힘 조절을 했기에 손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사고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16549568147519.jpg“이제 믿으실 수 있겠죠?”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아르문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와 그녀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빼곡히 채웠다.

16549568147519.jpg“타고 나기를 힘이 셌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었죠.”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 로제타가 미리 선수를 쳤다.

16549568147519.jpg“체력도 제법 좋아요. 호신을 위해서 검술도 가볍게 익혔거든요. 뭐, 손힘만으로도 어지간한 놈은 제압할 수 있지만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까지 하면, 왜 기사가 되지 않고 하녀가 되었냐고 물을 테다. 그에 대한 마땅한 변명이 없는 이상 그것은 숨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여차할 때를 대비하여, 이 정도 정보쯤은 미리 흘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약한 척만 하다 나중에 갑자기 실력을 드러내면 괜한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말이다.

16549568147515.jpg“그럼, 내가 일찍 이성을 되찾은 건 혹시…….”

아르문트가 말끝을 어물거렸다.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아 아직도 당황이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16549568147519.jpg“네, 제가 기절시켰어요.”

감히 황태자를 공격했다고 혼내진 않겠지? 로제타가 그의 눈치를 흘끔 봤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검술 훈련을 받은 황태자가 일개 하녀에게 제압당하고, 기절까지 한 것이니 좌절할 만도 했다. 그러나 단지 좌절했다기에는 어쩐지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듯 보였다.

16549568147519.jpg“전하, 저도 질문이 하나 있어요.”

로제타의 천연한 목소리에 아르문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무엇을 궁금해할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6549568147515.jpg‘내가 미쳤냐는 것이겠지.’

그런 괴물 같은 모습을 목격했으니 궁금할 만도 하다. 정확히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번과 비슷한 꼴을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주위의 물건을 마구 부수려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무작정 공격하려 하는, 그런 짐승만도 못한 모습을 말이다. 아르문트가 몰아치는 자괴감에 제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가 여린 살을 파고드는 것보다 제 온몸을 조여오는 수치심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통통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16549568147519.jpg“……저도 내쫓으실 건가요?”

마침 창문을 넘어 들어온 새벽 달빛이 고요히 그녀를 비췄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가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로제타의 모습은 심장이 저릿할 만큼 아름다웠다.

16549568147519.jpg“저는 계속 전하의 곁을 지키고 싶어요.”

부디 저를 내쫓지 마세요. 그녀가 슬픈 목소리로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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