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짐승의 의미2021.05.16.
아르문트는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까지 그의 광증을 목격한 사람의 결과는 모두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거리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당한 후 소리 소문 없이 황궁 밖으로 내쫓기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제 방에 기어들어 와 비밀을 알아챈 놈을 황궁에 무사히 남겨둘 수는 없다. 그랬다간 1 황자에게 자신을 공격할 빌미를 주는 꼴이리라. 때로는 우연히 증상을 발견한 사용인도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런 이들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 아르문트는 여지없이 모두를 쫓아냈고, 이에 대해 일말의 아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의 하녀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로제타는 무려 두 번이나 아르문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죽기 전까지 그녀를 전속 하녀로 두겠다는 약속도 했다. 아무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던 몸이 그녀에게는 동했으며, 혹시 그녀가 오늘 죽진 않을까, 그답지 않게 신경도 쓰였다. 자신의 광증을 보고도 저렇게 태연한 반응을 보인 것 또한, 그녀가 처음이었다. 즉, 아르문트에게 로제타는 여러모로 특별한 하녀였다.
‘특별한 게 아니라, 독특한 거지.’
아르문트가 빠르게 단어를 수정했다. 어쩐지 ‘특별’은 너무 부끄러운 단어 같았다. 혼자 생각하는 것뿐인데도 혹 누가 오해할까 민망했다. 한편, 로제타는 열심히 아르문트의 눈치를 살폈다. 침묵이 길어지자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쫓겨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것은 무려 아르문트가 네 차례의 회귀 동안 꽁꽁 감춰왔던 비밀이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아르문트 길들이기> 작전도 반쯤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치 소원을 말하지 않았더라고요.”
“……소원?”
“하루에 한 가지씩.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하셨잖아요.”
벌써 잊으셨어요? 로제타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르문트는 그녀가 치마 속에 숨겨왔던 임명장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달아오르려는 볼을 애써 진정시키며, 더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닥거렸다.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 이게 제 소원이에요.”
로제타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아르문트를 향해 반짝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가끔 발레리안에게 큰 부탁을 할 때나 쓰곤 했던 방법이었다. 발레리안에게는 효과가 좋았으나, 과연 아르문트에게 먹힐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래도 안 되면 혀라도 깨물고 또 죽어가는 척을 해야지.’
로제타가 이렇게 다짐하며 어금니를 혀에 가져다 댔다. 자해 공갈단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아르문트는 어금니를 앙다문 채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이내 어딘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내가…… 두렵지도 않나?”
아르문트가 손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탄탄한 팔뚝 위로 푸른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그런, 미친 꼴을 보고도, 내 옆에 있고 싶어?”
두 눈 위로 스스로에 대한 짙은 혐오감이 비쳤다. 로제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마주 봤다. 이 대답이 그와의 관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 그녀는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런 눈을 하고 묻는 주군 앞에서 가식을 늘어놓을 순 없었다. 로제타는 차분한 목소리로 제 진심을 전했다.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로제타가 짐승 같았던 아르문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고, 달아오른 것을 아무렇지 않게 제 피부에 갖다 대던 그의 행동은, 어지간한 일을 다 겪어본 로제타조차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당혹스러웠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아르문트에 대한 마음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잖아요.”
아르문트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병인지 저주인지, 아르문트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그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저 또 다른 피해자에 불과했다. 저 비참한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고작 한 번 보고서.”
아르문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얼 보고 저렇게 자신을 믿는단 말인가. 늘 회의적으로만 살아온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좋은 분이시니까요.”
로제타가 의심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에 아르문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것도 잠시, 방어적인 태도가 버릇처럼 튀어나왔다.
“네가 뭘 안다고…….”
그가 까칠하게 대꾸하려는 순간, 무엄하게도 로제타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래요. 그리고 만약 전하께서 일부러 그러셨다면, 일개 하녀에 불과한 제게 사과를 하시지도, 이렇게 차를 끓여주시지도 않으셨겠죠.”
로제타는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온기가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그에 힘을 얻은 그녀는 더욱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계속 전하 옆에 있고 싶어요.”
“…….”
“이게 제 진심이에요.”
진심. 또 저 단어였다. 아르문트가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자, 믿지 않는 말. 그러나 여러 번 들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짜증이 솟지 않았다. 그 대신 심장 부근이 미묘하게 간질거렸다. 이상하게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민망했다. 아르문트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예 부정하기에는 이미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후였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로제타 또한 정적에 동참했다. 제 대답이 만족스러웠을지, 쫓아내려는 마음은 여전히 완고한지 알 수 없어 안달이 났지만, 지금은 기다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인고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원하던 대답이 들려왔다.
“……한 번 약조한 것을 번복할 생각은 없다.”
아르문트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말했다. 표정은 세상 까칠했으나 말하는 내용은 아닌 척 다정했다.
“네 마지막은 내가 지켜주겠다 하지 않았나.”
“전하, 그 말씀은……!”
로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훤해졌다. 그녀는 그의 손을 덥석 부여잡곤 상기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저를 내쫓지 않으시겠단 거죠? 그런 거죠?”
“어딜 손을……!”
“감사해요, 전하!”
로제타가 신이 나서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아르문트는 그녀의 손을 내치려 하였으나 힘이 너무 세서 차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무슨 힘이……! 사람 맞아?’
곰에게 잡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르문트가 괴물 보듯 그녀를 응시했다. 로제타는 함박웃음을 입가에 걸친 채 방방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금광이라도 발견한 줄 알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그 바보 같은 모습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르문트는 애써 웃음을 갈무리하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약 다른 곳에서 쓸데없이 입을 놀린다면.”
“절대 안 그럴게요! 제가 그러면 사지를 그냥 다 뜯어도 좋아요!”
능지처참하세요! 시체는 까마귀 먹이로 주시고요! 아니면 효수도 좋아요. 상큼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가볍게만 협박하려던 아르문트는 저가 더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참, 전하. 혹시 어디 아프시진 않으세요? 아까 저와 힘을 좀 겨뤘는데…… 몸에 무리가 가진 않으셨나 해서요.”
로제타가 그제야 기억난 듯 그의 손을 놓고 눈을 맞췄다. 걱정하는 기색이 명백한 눈빛에 아르문트는 또다시 심장 쪽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괜히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다.”
“신관님께 말씀은 해보셨어요? 이…… 변화에 대해서요.”
무어라 표현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다시금 씁쓸해졌다.
“아니, 내 광증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표현을 명확히 짚어주었다.
“대신관도, 베티도, 하녀장도. 하녀장은 아마 내가 저녁이 되면 성격이 포악해져서 방에 들어오는 하녀를 족족 쫓아낸다는 정도로만 알겠군.”
그래서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구나. 로제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위기사였던 로제타도 서른이 되도록 눈치채지 못했으니,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일 테다. 이 좁은 황궁에서 어떻게 비밀을 감출 수 있었을까. 그만큼 철저하게 신경 쓰고, 또 조심했을 것이다. 무려 십 년을 말이다. 어째서 해가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욱 깊어만 졌는지, 로제타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확한 병명도, 이유도 알지 못한다. 3년 전 갑자기 증상이 나타났고, 비밀리에 의사를 찾아갔으나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지. 정기적으로 찾아와 내 몸을 검진하는 대신관 또한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고.”
아르문트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이 하녀를 어떻게 믿고, 이렇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가.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매일 이러는 건 아니야. 정확하진 않지만, 몸이 유독 좋지 않은 날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에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 잠든 후에 변하기도 하고, 잠들기도 전에 갑자기 이성을 잃기도 하나, 항상 해가 진 이후에 발현하더군.”
로제타를 믿기에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녀는 곧 죽을 것이고, 그때까지만 잘 감시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다. 그는 이렇게 합리화하며 눈을 떴다. 모든 것을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네가 본 모습은 어땠지?”
느닷없는 질문에 로제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무런 이지 없이 본능만 좇는 모습이 꼭 짐승 같지 않던가?”
그녀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 같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았어요. 아예 제 말을 못 들으시는 것 같았고, 악력이 아주 강하셨어요.”
“그것이 하는 짓에 대해 말을 높일 필요는 없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게 달려들더라고요. 크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요.”
로제타가 빠르게 존대를 그만두었다. 그녀의 서슴없는 태도에 아르문트는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말을 낮추라 했다 해도 저렇게 빨리? 맹랑한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겼다.
“침대에서 잠시 실랑이를 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바로 제압했어요. 기절하고 얼마 안 돼서 전하가 깨어나셨고요.”
“……그건 다시 들어도 신기하군. 기절하면 돌아올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
원래는 아침이 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오곤 했다. 그것도 꼭 소파 위에 짐승처럼 웅크린 채로. 아르문트가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이렇게 빨리 이성을 찾을 수 있다니,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혹은, 광증을 치료할 방법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지옥 같던 3년의 세월에 처음으로 빛이 보이는 듯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옅은 희망으로 반짝였다.
“제가 돕게 해주세요.”
로제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아르문트는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로제타 또한 그만큼이나 흥분한 얼굴이었다.
“뭐?”
“아시다시피, 저는 변한 전하를 금세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요. 그러니 부디 저를 곁에 두세요.”
곁에 두라는 말은 지금처럼 그저 전속 하녀로 삼아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증상이 나타난 때, 이를 처리할 수 있게 옆에 두라는 뜻이었다. 아르문트는 이를 곧장 알아들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나운 눈매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두 눈동자가 그의 갈등을 드러냈다. 로제타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서둘러 부연했다.
“만약 제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진작에 본색을 드러냈을 거예요. 그럴 기회는 사실 많았으니까요. 저는 단지, 전하를 돕고 싶어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저런 힘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지금까지 아르문트를 죽일 기회는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를 더 돕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제는 지겨울 정도의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신에게 이토록 헌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아르문트를 이를 묻는 대신, 보다 더 합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몸도 좋지 않은 상태인데.”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아르문트가 말을 삼켰다. 그는 변화한 자신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전 피해자들의 진술이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려들어 공격했다. 주변 사물을 던져댔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말 그대로, 짐승 같은 행동이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짐승 같다’라는 것은, 로제타가 말하는 것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여태껏 다른 사용인에게는 입을 맞추거나 아랫도리를 세우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둘 다 짐승 같기는 하나 그 의미는 달랐다. 이전의 경우 그에게 남아 있는 본능이 오로지 공격 욕구이었다면, 로제타 앞의 그는……. 오로지 욕정을 좇았다.
“감당할 수 있겠나?”
이를 알지 못하는 아르문트가 자신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의미로 물었다.
“물론이죠!”
마찬가지로 그 차이를 알지 못하는 로제타가 씨익 웃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네 발정쯤은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