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질투의 서막2021.05.20.
‘됐다!’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전하의 마음을 얻은 거야!’
아르문트의 비밀을 알아차리고도 성에서 쫓겨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비밀에 가담하게 되다니. 신임을 얻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몸이라는 착각이 없었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쾌거였다. 다만 그녀는 그 뒷감당은 나중으로 미뤄놓고 우선 현재의 만족감을 즐겼다. 난공불락의 성을 조금이나마 점령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짜릿했다. 너무 함박웃음을 지으면 혹시나 아르문트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애써 자제해보았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럼, 앞으론 밤에도 이렇게 시중을……?”
“그래. 숙소도 옮기는 게 좋겠군. 내 침실과 이어지는 호위기사용 방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걸 쓰도록 해. 하녀장에겐 내가 말해두지.”
로제타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언급한 숙소는 이전 생에 그녀가 사용하던 바로 그 방이었다. 호위기사일 적에도 아르문트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은 후에야 쓸 수 있었다. 그걸 바로 내어준다니. 자신을 그만큼 믿는다기보다는, 광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겠지만, 감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일찍 그 방을 쓰게 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번 생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몰라.’
발레리안이 자신했던 것처럼, 드디어 이 지겨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로제타는 푸른 눈동자를 보석처럼 빛내며 아르문트를 올려다보았다. 입가에는 결국 참지 못한 미소가 선명하게 걸려 있었다.
“감사해요, 전하.”
그녀가 아르문트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그러자 아르문트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다, 자신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음을 깨닫고 석상처럼 멈춰섰다. 그와 그녀 사이엔 고작 한 뼘만 한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달빛 속에서 해말갛게 웃는 저 얼굴도 퍽 가까웠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군.’
새벽 시간, 허락도 없이 남자의 방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꼴이라니. 그가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기에 망정이지, 다른 놈이었다면 이상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제 하녀가 다른 사내놈에게 이렇게 다가가는 상상을 하니 문득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놈이 오해할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곧 자신을 단숨에 제압하던 로제타의 곰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저 괴력이라면 어디 가서 당하고 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르문트가 천천히 로제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서. 텁. 커다란 손이 로제타의 얼굴을 덮었다. 손길이 부드러워 아프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느닷없이 시야가 가로막힌 로제타가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아르문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 반짝거리는 눈빛이 안 보이니 마음이 그나마 편안해졌다.
“내 방에서 아예 살려는 게 아니면 슬슬 돌아가지그래.”
그런 말을 굳이 왜 눈을 가리고 해? 로제타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장난스럽게 헤헤 웃어 보이는 그녀였다.
“우와, 아예 살아도 돼요?”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나?”
“음…….”
로제타가 고민하는 척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실 이 상황에 그가 할 말이란 뻔하기 그지없었다.
“나가?”
“정답이다. 나가.”
그리고 정답을 맞힌 보상으로 방에서 쫓겨났다. 쾅. 아르문트가 주저 없이 문을 닫았다. 로제타는 내쫓기고도 여전히 기쁜 얼굴이었다. 어차피 볼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 마음 편히 숙면을 취하면 된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던 러크와 시선이 마주했다.
“크흠, 흠.”
러크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 시선을 피했다.
‘이 자식. 또 졸고 있었구나!’
로제타가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짐작했다. 감히 호위 중에 정신을 팔다니. 그를 교육하고 싶은 욕구가 다시금 치솟아 올랐다.
‘어휴, 됐다. 어차피 내일이면 방도 옮길 거니까.’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방으로 숙소를 옮기면 밤중에도 그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최고의 기사였던 입장에서 러크가 못마땅하긴 했으나, 지금의 자신은 그저 하녀일 뿐, 그를 교육할 권리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의 근무 태만을 그대로 넘길 생각은 아니었다. 로제타는 리처드든 누구든 일러주겠다고 마음먹으며 말문을 열었다.
“경, 수고하세요.”
“어, 어. 그래. 너도…… 잘 쉬어.”
러크가 말을 더듬었다. 여전히 그녀와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잘 살펴보니 얼굴색도 좀 붉은 듯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창피한 꼴을 들켜서 민망한 거겠거니, 하고 납득할 뿐이었다. 그녀는 러크를 지나쳐 제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건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아침부터 징조는 있었다. 로제타는 일찍이 일어나 일손을 돕기 위해 만찬실로 향했다. 황태자의 전속 하녀가 된 이후 대부분의 업무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친구들이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종종 업무를 도와주는 그녀였다. 방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가는 걸음마다 사용인들의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로제타를 발견하자마자 합죽이가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를 훔쳐보던 하인이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주목에 로제타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대수롭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기사일 적 그녀는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고, 저러한 시선 따위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별것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엘리아와 멜라니가 있었더라면 따로 알려주기라도 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녀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로제타는 만찬실 청소를 모두 마친 후 아르문트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을 정돈한 후 점심을 먹으러 갈 계획이었다. 어쩐지 아침보다 시선이 더 늘어 있었다. 자신만 모르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커졌다. 그쯤 되니 모르는 척하기도 어려웠다. 로제타는 알고 지내던 동료 하녀 한 명을 덥석 붙잡았다.
“제인.”
“히익!”
그리고 그녀에게 손목을 잡힌 하녀, 제인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시선이 더 몰려들었다.
“로, 로제타. 안녕.”
제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로제타는 안녕, 하고 가볍게 응수한 후 본론을 꺼냈다.
“다들 왜 날 쳐다보는 거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쳐다봐? 그, 글쎄. 난 모르겠는데……. 너를 쳐다보나?”
이걸 모르는 척한다고? 로제타가 어처구니가 없어 한쪽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제인은 티 나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더니, 급한 일이 있다며 허둥지둥 떠나갔다. 로제타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궁금하긴 하지만, 나중에 엘리아와 멜라니를 만나 물어보면 그만이다.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고, 아르문트의 방에 다다르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올곧은 자세로 서서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리처드였다.
‘다시 보니 선남 같군.’
어제까지만 해도 허점만 잔뜩 보이던 그였으나, 러크를 보고 그를 보니 저만큼 충직한 기사가 따로 없어 보였다.
“리처드 경, 안녕하세요.”
로제타가 평소보다 더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지금까지 중 가장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늘 그녀를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쑥스러워하거나, 대형견처럼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던 리처드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촉촉한 눈동자와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바르르 떨리는 볼. 아래로 움찔거리는 입꼬리.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로제타.”
심지어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로제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위로 짙은 슬픔이 일렁거렸다.
“전하를…… 뵈러 온 겁니까.”
“네.”
그럼 달리 올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로제타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처드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비켜드리겠습니다.”
얘까지 도대체 왜 이래? 로제타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지나쳐갔다. 너무 심각하게 우울해 보여서 차마 이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리처드의 힘없는 뒷모습을 흘끔거리다 이내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전하, 로제타예요.”
아차. 노크는 두 번만 해야 했는데. 로제타가 뒤늦게 후회했다. 주변에 신경 쓰느라 까먹고 만 것이었다. 행여 아르문트가 또 까탈을 부리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다행히 아르문트는 그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들어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제타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시선에서 해방되자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휴.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를 느낀 로제타는 빠르게 얼굴 위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전하? 오늘도 날씨가 참 좋네요.”
로제타가 헤헤 웃으며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금세 앞이 가로막혔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르문트가 벌떡 일어나 갑작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가.”
“……네?”
로제타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설마 아르문트까지 이상해진 것인가. 아니, 늘 쌀쌀맞은 그였기에 이상해졌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그러나 아무리 야박한 그라도 이렇게 들어오자마자 축객령을 내린 적은 없었다.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자, 아르문트는 답답하다는 듯 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민망한 마음에 너무 본론만 말해버린 그였다. 부드럽게 얘기하고 싶지만, 워낙 그래 본 적이 없어 어려웠다.
“오늘은 청소할 필요 없다는 말이다. ……잠도 얼마 못 잤을 것 아닌가.”
아르문트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부끄러운 소리를 할 때면 저렇게 시선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제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녀가 입술을 떼려는 찰나, 그가 선수를 쳤다.
“나가서 신관이나 찾아가. 신전 쪽엔 내 소속 하녀가 오면 치료해달라 미리 말해두었다. 그러니 돈 걱정 따위 하지 말고 매일 가서 진료받아.”
“저, 저는 괜찮은데…….”
그녀가 손사래를 치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막중한 임무를 맡았으니, 책임감을 느낀다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야 마땅하지 않나?”
넌 안 그렇게 생각하나 보지? 아르문트가 눈빛으로 협박했다.
‘무슨 걱정을 이렇게 사납게 해!’
그 아르문트 아니랄까 봐, 걱정하는 태도도 까탈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럼요. 오래 살아야죠. 엄청 오래 살고 말 거예요.”
“그래, 잘됐군. 알아들었으면 당장 나가. 숙소를 옮기는 건 나중에 하고.”
그리고 로제타는 또다시 쫓겨났다. 그의 방에 들어간 지 오 분도 안 돼서 말이다. 방문 밖에는 여전히 침울한 상태의 리처드가 서 있었고, 주변을 지나가는 사용인들은 또다시 그녀를 흘끔거렸다. 멜라니와 엘리아는 아직도 바쁠 테고, 그렇다고 아르문트의 말대로 신관을 찾아갈 수도 없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상황에 로제타가 신음을 삼켰다. 그때, 좋은 대안 하나가 떠올랐다.
-“조만간 네 연구실로 찾아갈게.”
발레리안에게 약속했던 말이 타이밍 좋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그래, 거기다!’
목적지를 정한 로제타가 자신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바라보는 황태자궁 사람들을 피해 한시바삐 움직였다. 그곳에 가면 이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궁 연구실에는 황태자궁 사람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검은 망토를 걸친 발레리안이 미소 짓는 낯을 하고선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제 발로 찾아왔구나, 로즈.”
눈매를 부드럽게 휘고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으나,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발레리안이 로제타 옆에 있는 탁자를 한 손으로 짚었다. 그의 흉흉한 눈빛을 코앞에서 마주한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새벽에 그놈 방에선 뭘 한 거야?”